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56)화 (56/83)

56화.

태경이 있는 아침이었다. 아예 없거나, 있어도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 적이 드물었던 걸 고려하면 대단히 특별한 날 같았다. 약간 부담스러운 것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 텐데.

유정은 목에 스카프를 두르다 말고 거울에 비치는 그를 힐긋거렸다.

높다란 콧대를 중심으로 절반이 햇빛을 받고 반짝거렸다. 남은 절반은 조명을 켜지 않아 새카맣게 음영이 드리웠다. 완벽하게 대조되는 분위기가 희한하게도 공존하고 있었다. 나태하게 벌린 다리 사이에는 뜯긴 비닐봉지가 수북했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태경은 그녀의 시선을 부추기는 것처럼 다리를 좀 더 벌렸다. 일순 얼굴에 피가 쏠려 새빨개진 유정이 황급히 눈을 피했다. 애석하게도 스카프를 묶는 손이 달달 떨렸다.

도무지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잖아.

낭패감에 유정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태경은 개별 포장된 마카롱을 하나 더 뜯어서 베어 물었다.

파사삭.

두툼한 마카롱을 반쯤 씹어 물자, 녹은 필링이 사방으로 튀어나왔다. 그의 입가에도 하얀 필링이 묻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경은 남은 마카롱까지 한입에 삼켰다. 그런 다음에는 입가에 묻은 하얀 필링을 혀로 핥아 먹으며 침대에서 몸을 세웠다.

곧 길고 곧은 다리를 뻗으며 유정에게 다가왔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달콤한 마카롱 냄새와 섞인 묘한 체향에 유정은 넋이 빠졌다.

그는 유정의 등 뒤에 딱 붙어 섰다. 그리고 다짜고짜 엉망인 스카프의 매듭을 잡아 내렸다. 사라락, 하고 목이 허전해졌다. 살갗을 점점이 수놓은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태경의 엄지가 그중 하나를 쓸어 만졌다.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들키기 싫어 어금니를 꽉 물어야만 했다. 안쓰러울 정도로 힘이 들어간 턱 밑으로 불쑥 손이 들어와, 힘을 풀라는 듯 한가운데를 꾸욱, 짓눌렀다.

그런 다음에는 손수 스카프를 목에 묶어 주었다. 이럴 거면 굳이 왜 풀었는지 의문이었지만, 다시 물어볼 기운이 없었다.

“나가서 바람 좀 쐴까요.”

스카프의 매듭을 짓느라 신중하게 내리뜬 눈으로 태경이 물었다. 유정은 흡사 놀이공원에 가자는 말을 들은 다섯 살 아이처럼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금방이라도 탄성을 터뜨릴 얼굴이었으나 그녀는 습관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오늘은 안 바빠요?”

담담한 목소리였다. 대단한 자제력이었다.

“네.”

태경은 그녀의 이마를 괴롭히는 잔머리를 치워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여자는 외출을 준비하는 시간이 길다.

숙소에서 번화가까지 운전한 시간과 주차 시간, 브런치 카페로 오던 와중 에그타르트 상점에 들른 시간까지 다 합쳐도 여자의 외출 준비 시간보다 길지 않았다.

주태경은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눈은 그녀에게 고정돼 있었다. 유정은 하얀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저 원피스 하나를 고르느라 탈락한 옷들이 침대에 쌓여 있는데. 립글로스도 발랐는지 입술도 촉촉했다. 뭐 그리 대단한 변화를 준 것도 아닌데 그녀는 쑥스럽다는 듯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았다.

“포르투갈식 에그타르트도 먹어 보고 싶어요. 페이스트리 도우를 사용한다던데.”

유정은 그렇게 말하며 입맛을 다셨다. 여섯 개를 사서 두 개는 그 자리에서 먹어 치웠으면서. 확실히 길에서 풍기는 버터 향을 맡았을 때부터 이미 매료되었다고 봐야 했다. 강준우와 에이든, 이광현에게도 나누어 줘야 한다더니. 탐욕 가득한 눈으로 에그타르트 상자를 힐끔거렸다. 정작 제대로 된 식사는 반도 먹지 않고 그에게 떠넘기다시피 주었다.

태경은 그녀가 남긴 다 식은 해시 브라운을 조각내며 말했다.

“밥을 남기지 않고 먹으면 데려가 줄게요.”

흡사 식사 시간에 만화를 보느라 한눈파는 아이에게 협상안을 제시하는 말투였다. 그걸 또 유정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태경 씨가 먹으라고 하는 양이 너무 많아요. 반만 줄여 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그는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했다. 유정도 그걸 눈치챘는지 배시시 웃었다. 이럴 때는 나름 엄격하다니까. 결국 대신 먹어 준 횟수만 해도 셀 수가 없으면서. 그녀는 기다란 소시지를 포크에 찍어 그대로 베어 무는 태경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건 꼭 에그타르트 때문만은 아니었다. 테라스 자리인 탓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출입문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 모두 한 번씩은 태경을 쳐다보았다. 오죽 존재감이 있어야지. 그런데도 태연히 식사하는 그가 존경스러웠다.

다행히 살짝 있던 체기는 식후 레모네이드 덕분에 쑥 내려갔다. 레몬은 시다는 편견 때문에 어디서 주문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와 레몬 맛 사탕을 먹어 보았던 경험이 편견을 타파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유정은 문득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무슨 맛 사탕을 제일 좋아해요?”

그는 설핏 눈매 끝을 좁혔다.

“글쎄. 다 비슷한데.”

“마카오에서 레몬 맛 사탕만 먹었잖아요.”

“그건 유정 씨가 처음 골라 준 거라서 먹었어요.”

“만약에 계피 맛 사탕 골랐으면 그거만 먹었겠네요?”

유정이 흥미롭다는 듯 되물었다. 태경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랬겠죠.”

“감동이에요.”

그녀가 양손을 턱을 괸 채 말했다. 뉘앙스가 놀리는 쪽에 가까운데. 태경이 뭔가를 가늠하려는 듯이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유정은 작전인지 뭔지, 손을 씻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로 가면서는 버릇처럼 핸드폰을 확인하는 게 보였다. 언뜻 안색이 굳어진 것 같았는데,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바람에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곤 그대로 화장실에 들어가 버렸다.

태경은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린 채로 기다렸다.

* * *

하늘이 석양에 물든 무렵에 숙소에 도착했다. 주차를 마친 지프의 조수석에서 내리면서 유정은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고 웃어 보였다.

“이걸 주면 좋아하겠죠?”

에그타르트를 비롯한 각종 디저트가 들어 있는 쇼핑백을 흔들어 보였다. 기껏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고 들어 왔는데, 좋지 않은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핸드폰을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쌓인 메시지는 쇳덩어리처럼 유정을 짓눌렀다. 오빠가 취직했다는 둥, 근데 금방 잘릴 것 같다는 둥 그동안 등한시했던 가족들의 근황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근 근황은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엄마 쓰러졌다. 지금 병원이야.]

놀라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국제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 연결이 되지 않았었다. 부재중 전화가 찍힌 걸 확인했다면 다시 연락해 올 텐데 감감무소식이고.

하지만, 심각한 일은 아닐 거야.

히스테릭한 성정의 모친은 자주 쓰러졌다. 대부분 제 분을 못 이긴 혼절이었다. 부친의 회사가 부도를 맞았을 때, 빚만 잔뜩 남기고 부친이 작고했을 때 등등.

하지만 몸이 마음만큼 따라 주지 않았다. 긴장으로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손을 따뜻한 체온이 불쑥 감싸 왔다. 태경이었다.

“그렇겠죠. 아무래도 속세 음식이니까.”

그들은 에어컨 고장으로 외식을 한 번 했던 걸 제외하면 외출을 하지 않았다. 집을 비우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건 일 때문이고. 그러니 이런 디저트류가 귀할 수밖에.

태경은 그녀를 집 안으로 이끌었다. 유정은 그 손을 더 꽉 맞잡았다. 그것만으로도 의지가 되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 훈기가 느껴졌다. 24시간 에어컨이 가동되는 집인데 훈기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랬다. 준우가 혼자서 축구공으로 드리블을 하고 있고, 한 손에 바게트 빵을 든 에이든이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무언가에 또 열중하는 모습이 꼭 그런 감상을 자아냈다.

그런 와중 태경이 테이블 위에 쇼핑백을 내려놓자, 준우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가지고 놀던 축구공은 데굴데굴 굴러서 그녀의 발치에 부딪혔다.

“에그타르트? 여기 맛집인데. 와우, 유정 씨 센스 있다. 잘 먹을게요!”

준우는 굳이 그녀를 콕 집어서 언급했다. 주태경이 자발적으로 온정을 베풀 리 없었다. 언젠가 싱가포르에 작전 투입되어 가는 그에게 카야잼을 사다 달라고 요청했다가 무시당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명치가 아픈데.

“그래요? 맛집이었구나. 어쩐지 맛있더라고요.”

그녀가 웃었다. 준우는 에그타르트 하나를 꺼내 보란 듯이 입에 물며 태경을 쳐다봤다. 애석하게도 그는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는 유정의 뒤통수에 눈을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주 징그럽다, 징그러워.

준우는 목에 걸린 에그타르트를 콜라를 마셔 삼켰다.

“유정 씨는 안 먹어요?”

어서 와서 같이 먹자고 준우가 손짓했다. 그녀는 괜찮다고 고개를 젓고는, 그대로 방문을 닫았다. 다행히 태경이 바로 따라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안심할 순 없었다.

유정은 곧장 욕실로 자리를 옮겨,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오빠, 진기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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