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태경은 숙소 앞에 차를 주차한 후에 운전석에서 내렸다. 곧장 달려온 유정이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었다. 순간 목이 졸린 듯이 갑갑했다. 셔츠 단추를 뜯듯이 풀어 내린 그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왜 여기 있어요?”
유정을 굽어봤다. 발뒤꿈치까지 들고 필사적으로 우산을 받치고 있었다.
“기다렸어요.”
말을 고르는 시간도 없이 그녀가 곧장 말했다. 그다음엔 조심스러운 손길로 어깨에 묻은 빗물을 털어 주었다.
이 정도로 비가 오면 보통 안에서 기다리는 게 일반적일 텐데. 태경은 키 차이 때문에 한계까지 고개를 젖힌 그녀에게서 우산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자 유정의 큰 눈이 마구 흔들렸다.
“비 오잖아요. 그래서, 그냥…….”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신발 앞코로 젖은 바닥을 툭, 툭 찼다. 터무니없이 작은 발과 물이 튀는 장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순간 우산에 굵은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졌다. 무슨 얼음이라도 맞은 것처럼.
유정은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세웠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게 보였다.
“……고마워요. 유정 씨 덕분에 안 젖었네요.”
그러면서 태경은 굳이 어깨를 털어 주는 손을 치워 냈다. 굳은 얼굴로 목덜미를 쓸어 만지기도 했다.
민망해서 얼굴이 뜨거웠다. 당혹감에 휩싸인 유정이 머리를 매만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가 또 말을 걸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방금 나온걸요.”
대답은 재깍했지만, 유정은 착잡했다. 무안해서 머릿속이 꼬이고, 혀도 꼬부라졌다. 표정은 어떻게 지어야 하며, 무슨 말로 대화를 이어 가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엉망진창이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눈을 깜빡거리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해도 도무지 효과가 없었다. 혼돈에 휩싸인 가운데, 어깨를 감싸는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태경이 집 안으로 이끌고 있었다. 얼뜨기처럼 그러고 서 있을 바에야 차라리 잘 됐다.
유정은 순순히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봤다. 그때 검은자위가 갑자기 쓱, 내려오는 바람에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유정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대신 어깨를 감싼 그의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
집 안에는 광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태경을 보자마자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으니, 기다렸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얼핏 그녀에게도 눈길을 준 것 같았다. 하지만 유정이 의식했을 때는 이미 시선이 떨어져 나간 뒤였다. 그녀도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어서 광현을 쳐다봤으나 그의 딴청 부리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얘기 좀 하지.”
광현은 맞은편 좌석을 턱짓했다. 누구라고 특정한 게 아니어서 모르는 사람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유정은 갑자기 오른쪽 어깨에서 진동을 느꼈다. 그의 손가락이 도드라진 뼈를 툭, 툭 두드리고 있었다.
“유정 씨. 먼저 들어가 있어요.”
태경의 시선은 광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는 천천히 내려다봤다. 새삼 그의 동공이 우묵하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네.”
유정은 방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등 뒤는 조용했다. 그녀가 완전히 들어가는 것까지 본 후에 이야기를 시작할 작정인 듯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태경이 막 소파에 앉고 있었다. 그런 다음 엄지로 눈썹을 문지르는 그에게 광현이 바짝 거리를 좁히는 게 보였다.
저렇게 은밀하게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대체 뭘까. 위험한 일은 아니었으면 했다. 마지못해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유정은 그대로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공간으로.
* * *
밤이었던 것도 같고, 새벽이었던 것도 같고. 어쨌거나 태경은 뺨에 입을 맞춰 주며 일이 생겨 나가 봐야 한다고 했었다. 의식이 몽롱한 와중에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뭔지도 모르고.
이른 새벽부터 잠에서 깬 유정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제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길고, 심각하게 나누었는지 묻지도 못했는데. 귀가한 지 채 몇 시간도 안 되어서 다시 나가 버리다니.
유정은 속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뺨에 남아 있는 온기에 의지해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다시 잠을 청하려는 시도를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신경질만 날 뿐이었다. 결국 유정은 벌떡 일어나서 방문을 열고 나왔다. 찬물이라도 마셔서 혼란한 속을 진정시킬 생각이었지만 정작 거실에 발도 디디지 못했다. 준우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린 탓이다.
“홍콩엔 내가 남을 테니 네가 가.”
그 말에 에이든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현장 요원 투입이라는 말 못 들었어?”
“누가 들으면 넌 총 한 번 안 잡아 본 줄 알겠다, 새끼야.”
준우가 혀를 찼다. 하지만 유정은 들을수록 미궁에 빠지고 있었다.
홍콩. 현장 요원. 총.
태경의 이름이 아직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에 안도해야 하는 걸까. 유정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준우의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너 유정 씨 안 좋아하잖아. 불편해할 게 뻔한데.”
에이든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아마 또 상종도 하기 싫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하긴 선배는 어차피 안 갈 텐데, 뭐. 어제 입 꾹 닫고 있었잖아. 유정 씨 두고 어딜 가겠어? 차라리 때려치우면 때려치웠지.”
그 말 다음에는 이상할 정도의 정적이 찾아왔다. 준우가 작게 한숨을 쉬며 욕설 비슷한 걸 한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또 기척을 들킨 것 같았다. 이대로 못 들은 척 방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지만, 유정은 거실로 들어가는 걸 선택했다.
준우는 이미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는데도 막상 모습을 드러내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에이든은 감정 변화 없이 힐긋, 쳐다볼 뿐이었다.
“어딜 간다는 거예요?”
유정이 묻자, 준우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에이든에게 보냈지만, 에이든은 저라고 방법이 있겠냐는 듯이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결국 준우가 창백한 얼굴로 어물어물 말했다.
“어, 그게 그러니까……. 잠깐 며칠……. 그냥 선배님한테 직접 들으시는 게 어떨까요?”
“준우 씨.”
유정이 꾸짖듯이 부르자, 준우는 좌절한 얼굴로 뒷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쯤 되자 에이든은 아예 자리를 피했다. 유정은 꿋꿋이 준우를 응시했다. 그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준우는 곧 체념한 듯 말을 이어갔다.
“그게, 팀장님 쪽 일이 잘 안 풀려서 다시 가야 하는 상황이에요. 선배는 아마 안 갈 겁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말이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사전에 충분한 설명을 해 주던 태경이었다. 이번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갈 생각이 없는 거였다.
업무상 세계 곳곳을 누벼야 한다고 했는데. 오늘은 홍콩에 있어도 내일은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다고. 그러지 못하는 게 누구 때문인지는 너무나 투명하게 보였다.
강준우는 복잡한 감정이 버무려진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계획했던 대로 상황이 풀리지 않는 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골치 아픈 일들이 블랙스완이라고 해서 반가울 리 없었다.
성가시고 까다로운 일의 적임자는 항상 주태경이었는데. 그래. 그랬는데, 어제의 주태경은 사뭇 달랐다. 숨 막혔던 어제의 일이 준우는 눈앞에 생생했다.
기껏 비를 쫄딱 맞으며 숙소로 돌아왔더니 분위기가 개판이었다. 발렌틴의 정신 나간 납치극 이후로 냉전 상태인 이광현과 주태경이 그 핵심 인물이고. 어물쩍 자리를 피하려는 시도도 해 봤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어림도 없었다.
앉으라는 말보다 광현의 살벌한 눈빛 한 방에 굴복해, 남은 자리 하나를 꿰차고 앉았다. 그러자 광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예상보다 심각한 상황이다. 인원 투입이 불가피해.”
전에도 인원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은 수도 없이 많았다. 다만 그때마다 차출되는 인물은 주태경이었다. 본인이 자원하기도 했고, 이광현의 지시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일로 회의라니. 절차가 있는데도 절차가 없는 것처럼 이어진 관습이 깨진 것이다.
“에이든은 여기 남고. 혹시 모르니 현장에서 움직일 수 있는 인원만 간다.”
표면적으로나 회의지, 이건 거의 주태경을 설득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준우는 힐긋, 그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앉아 있는 자태가 상관보다 더 느긋했다. 아주 압권이군, 압권이야. 준우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겉으로는 신중한 척 인상을 굳혔다.
“주태경.”
“…….”
“넌 이번 기회에 블랙스완에 결점 없는 멤버라는 걸 입증해야 한다.”
그 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불가피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징계를 면했지만, 어쨌거나 주태경은 사적인 이유로 두 차례의 문제를 일으켰다. 상부에선 주태경을 시한폭탄으로 간주하고 주시하는 상황이었다.
일장춘몽이 따로 없었다. 서유정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타공인 블랙스완의 에이스였는데. 물론 본인은 그깟 평가 따위, 별 미련 없어 보이지만.
“세르게이 쪽은 이제 잠잠한데. 어쩔 생각이지?”
그 말인즉, 분쟁 지역까지 서유정을 데려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말이었다. 태경도 광현의 점잖은 압박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팀장을 응시하자, 준우가 중재에 나섰다.
“어차피 여기도 한 명은 남아야 하고. 돌아올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하면 되잖습니까.”
태경의 새까만 눈이 준우에게 내리꽂혔다. 준우는 찍, 소리도 못 내고 눈을 내리깔았다. 다행히 큰 감정은 없었던 모양인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긴 다리를 뻗으며 복도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주태경은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건 묵비권보다는 무시에 가까웠다. 그 참혹한 분위기는 자다가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