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53)화 (53/83)

53화.

아침 8시면 절로 눈이 떠진다. 유정은 흐릿한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시야를 확보했다. 적막한 방 안에는 이번에도 그녀 혼자 있었다. 게으르게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다 겨우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 동시에 배에서 뱃고동이 울렸다. 이곳에 온 뒤로 아침을 먹는 게 습관이 되었는지 배꼽시계가 아주 칼이었다.

납작한 배를 슥슥 문지르며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밀었다. 일어서기만 하면 될 텐데, 또 늦장을 부렸다. 잠깐 창문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람결을 따라 시선이 흘러갔다.

오늘따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기지개를 켜 일어나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먼저 치약을 묻힌 칫솔을 입에 넣고 양치를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좀 처참했다. 군데군데 울혈이 선명하고, 심한 부위는 파랬다. 하지만 유정은 놀라지 않았다. 이제는 익숙한 자국이었다. 의연하게 세안까지 끝낸 후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나오는 그녀의 얼굴은 개운하기 짝이 없었다.

스킨과 로션을 듬뿍 바른 후에 거울 앞에 제대로 서서 상태를 점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목 부위 울혈을 가리기 위해 익숙하게 손수건을 찾아 목에 묶고, 유정은 비로소 방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서부터 이미 음식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다. 이제는 냄새만으로도 메뉴가 무엇인지 간파 가능한 정도였다.

차돌박이 볶음밥. 아침 메뉴로는 좀 기름진 편이었다. 주방으로 들어선 유정은 이미 식사 중인 준우와 에이든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곧장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유정 씨 혹시 알람 같은 거 맞춰 놔요?”

준우가 물었다. 유정은 컵을 꺼내 냉장고 디스펜서에 갖다 대며 대답했다.

“아니요. 따로 알람 설정해 두진 않는데, 왜요?”

그녀는 물이 쪼로록, 컵에 담기는 동안 준우를 쳐다보았다.

“거의 같은 시간에 일어나잖아요. 우리한테 물든 거 아니에요?”

준우가 의혹의 눈빛을 보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기실 그랬다. 누가 기상 시간을 정해 둔 것도 아닌데.

“의도한 건 아닌데……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닌 거 같네요.”

유정이 진지하게 말했다. 솔직히 출근만 아니면 제법 잠이 많은 편이었다. 어쩌다 쉬는 날이면 오후까지 늘어지게 자곤 했으니까. 그런데 이곳에 온 뒤로는 일어나고 자는 시간이 일정했다.

“이왕 백수된 김에 즐겨요. 안 그랬다간 나중에 후회합니다?”

“지금도 컨디션은 좋아서요…….”

유정이 말끝을 흐리며 배시시 웃었다. 이내 깊이가 있는 그릇과 수저를 챙겨 준우의 맞은편에 있는 에이든의 옆자리로 향했다. 의도한 자리 선점이었다. 대화는 주로 준우와 하니까. 어차피 에이든은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느라 눈길 한 번 주지 않기도 하고.

“어? 밥 안 먹고?”

유정이 시리얼을 집어 들자, 준우가 대번에 물었다. 함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인데, 준우는 밥에 진심인 편이었다.

“네. 아침이라서 가볍게 먹으려고요.”

“좀 무겁게 드셔야 할 거 같은데.”

제대로 된 식사를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유정은 능숙하게 웃어넘기고는 시리얼을 담은 그릇에 우유를 부었다. 동시에 에이든이 슬라이스 된 아몬드를 담아 둔 밀폐 용기를 그녀에게 밀어 주었다. 그러자 눈매를 좁힌 준우가 무어라고 입을 열다 말고 멈칫했다. 주방 입구에 드리워진 거대한 실루엣을 눈치챈 탓이다.

“팀장님!”

귀신이라도 본 듯 준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에이든은 그 와중에 밀폐 용기의 뚜껑을 열어 주고 있었다. 유정은 뚜껑이 열린 밀폐 용기를 받아 들었고.

그 자연스러운 상황을 목격한 이광현의 눈매 끝이 가늘어졌다.

“안녕하세요.”

유정이 엉거주춤 일어나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광현이 꽤 장기간 숙소를 비운 탓에 어색했다. 마지막으로 본 기억이 광현이 그와 방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였던 때였다. 그마저도 직접 본 게 아니라 목소리만 엿들은 게 다였고.

“네. 오랜만입니다.”

광현이 그녀를 오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눈에서 무슨 감정을 읽어 내기도 전에 준우가 광현을 덮쳤다. 대체 지금까지 연락 안 한 저의가 무엇이냐는 둥, 얼굴이 핼쑥하다는 둥 사교성을 폭발시키며 엉겨 붙었다. 에이든은 식사하긴 글렀다는 얼굴로 일어났다.

“유정 씨, 밥 마저 먹어요. 천천히.”

광현과 함께 주방 밖으로 나가려던 준우가 문득 돌아보며 말했다. 에이든은 이미 둘을 추월해서 주방을 나간 뒤였다. 유정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랜만에 상봉해서 할 말이 많을 테니까.

이윽고 혼자 남은 유정은 개수대에 꽉 찬 식기들을 힐긋 쳐다봤다. 그동안 그들의 철벽 방어로 손도 못 대 본 설거지를 할 기회였다.

시리얼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후에 설거지까지 다 끝내고 주방 밖으로 나갔을 때는, 그들도 이미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주태경은 그럼 러시아 건 뒤처리로 바쁘겠군.”

광현의 목소리였다. 유정은 거실로 진입할 엄두도 못 내고 ‘러시아’라는 말에 절로 어깨를 말았다.

“말도 마요. 발렌틴 그 새끼가 아주 죽으려고 용을 썼다니까.”

준우의 신랄한 언사에 에이든이 픽 웃는 소리도 들렸다. 다행히 그가 러시아에서의 일 때문에 곤란한 지경이 된 건 아닌 듯했다. 유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고개를 세웠을 때는 눈앞에 준우가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시리얼 다 먹었어요?”

유정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가만 보면 태경을 비롯한 이곳의 사람들은 기척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네. 다 먹었어요.”

“슬픈 소식이 있어요.”

“뭔데요?”

유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준우는 심란한 얼굴로 말했다.

“저 일 때문에 나갑니다. 심심해도 저녁까지 참으세요. 선배님 여덟 시쯤 온다고 했으니까요. 전 그전에 올 수도?”

그 말에 유정은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 * *

정오부터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비가 내렸다. 처음엔 가늘었던 빗줄기가 점차 굵직하게 변했고, 나중에는 무슨 폭포수처럼 내렸다. 유정은 기겁하며 열어 둔 창문을 닫아걸어야 했다. 다행히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닫아 두었던 창문을 살짝 열고, 팔을 뻗어 보니 이제는 산발적으로 흩날리는 수준이었다.

침대로 돌아와 매트리스에 걸터앉은 유정은 먹구름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태경이 걱정이 되어 거실로 나갔다. 아치형 현관문 앞에 도착했는데, 그 순간 밖에서 먼저 문을 여는 바람에 유정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태경보다 먼저 귀가할 수도 있다던 준우인 줄로만 알고 그녀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녀왔…….”

하지만 막상 맞닥뜨린 얼굴은 에이든이었다. 반갑게 올라간 입꼬리가 그대로 굳어졌다. 에이든과는 살갑게 대화하기에는 조금 어색한 사이인데. 어떡하지. 눈을 굴리던 유정은 겨우 말을 이어 붙였다.

“다, 다녀오셨어요?”

에이든은 대답하는 대신 어깨에 묻은 빗물을 툭, 툭 털어 냈다. 어차피 기대한 것도 아니었던 유정은 열린 현관문을 통해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에이든의 목소리가 발에 감겼다.

“밖에 비 와요.”

에이든은 돌아보는 그녀에게 무덤덤한 얼굴로 제가 썼던 장우산을 내밀었다. 유정은 얼떨결에 우산을 받아 들었다. 에이든이 말다운 말을 건넨 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넋이 나간 사이, 멀어지는 기척이 들렸다.

“고, 고마워요.”

유정이 황급히 돌아봤지만, 에이든은 그새 어디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손에 든 장우산의 손잡이 부분이 아직 따뜻하다는 게 느껴졌다.

* * *

숙소까지 3km가 남아 있었다.

지프의 연료 경고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벌써 숙소에 도착하고도 남았다. 태경은 주유소의 정차선 안으로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고 창문을 내리자 직원이 달려왔다. 그동안 몇 번 이용했다고 얼굴을 기억하는지 직원은 따로 묻지 않고 카드를 받아 갔다.

태경이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리자, 자석에 철 가루가 붙듯이 주변의 시선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런 시선들에 그는 무감각했다. 바람이 불어 재킷이 펄럭거리자, 성가시다는 듯 젖히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상점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계산대 직원이 인사를 건네 왔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아 준 후, 태경은 음료 코너 쪽으로 향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캔 콜라를 하나 집었다.

직원은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보통은 더 살 게 없더라도 굳이 한 바퀴를 도는데, 그는 곧장 계산대로 왔다. 상의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아무 카드나 집히는 대로 건네더니 계산이 끝나자 그림자처럼 소리도 없이 멀어져 갔다.

태경은 상점에서 걸어 나오면서 캔 콜라를 절반 가까이 먹어 치웠다. 시선은 허공 어딘가에서 부유했다. 억센 비가 주유소 안까지 들이치고 있었다. 배수로는 빗물을 감당하지 못해 울컥댔다.

이윽고 그는 귀찮다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손으로 구긴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서 지프에 올라탔다.

숙소가 있는 골목까지는 금방 접어들었다. 낙후된 길거리를 감흥 없이 훑으며 모퉁이를 돌던 태경은 일순 척추를 곤두세웠다. 긴 머리를 반묶음 한 서유정이 길가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지프를 발견하고는 얼굴에 선선한 웃음이 번지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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