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는 단추가 있어야 할 자리를 대강 손끝으로 문지르며 셔츠를 살폈다. 관리가 잘 됐다. 목 부위 안감 색도 바래지 않았고, 소매 끝도 해진 구석이 없고. 셔츠를 침대에 툭, 내려놓은 태경이 말했다.
“단추, 달아 줄게요.”
태경이 단추를 이 사이에 끼워 물고서 시선을 들었다.
“……네?”
유정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태경은 이내 어리둥절해 있는 그녀를 두고 방을 나갔다. 그의 등은 마치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양 단호했다.
이곳에 반짇고리가 있을 턱이 없는데. 대체 무슨 수로 단추를 달아 주겠다고…….
유정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침대 위의 셔츠와 열린 문을 번갈아 보았다. 기다려도 태경이 오지 않자, 포기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바디 워시를 묻혀 거품을 낸 샤워 타월로 몸 구석구석 문지르고, 머리를 감았다. 마지막에는 수증기가 잔뜩 낀 거울을 손으로 훔쳐 닦고는,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활동량은 줄고, 먹는 양은 그대로라 그런지 제법 살이 올라 있었다. 유정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볼살을 잡아 쭉, 늘렸다.
살이 오른 탓에 그다지 높지도 않은 코가 더 낮아 보이잖아.
유정은 우스꽝스럽게 늘어난 살을 위아래로 흔들어 본 후에야 놓아주었다. 붉게 손자국이 난 뺨을 달래듯이 손바닥으로 슥슥 문지르기도 했다.
이윽고 욕실 문을 열고 나오려던 유정은 어깨를 움츠리며 멈춰 섰다. 신경질적인 노크 소리가 들린 탓이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언뜻 태경이 보였다.
평소 무조건 한 번은 무시하던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온 이는 준우였는데, 험악하게 찌그러진 얼굴로 무언가를 건네고 있었다. 준우의 손에서 무언가를 건네받은 태경은 휙, 몸을 돌려세웠다. 준우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더니, 곧 이를 갈았다.
“차라리 몸 구르는 일을 시켜 달라고요!”
“…….”
“하다 하다 별…….”
준우는 그가 요청한 것을 구하기 위해 갔던 곳에서의 기억이 끔찍했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까지 하얗게 질렸다. 그러고는 아직도 속이 울렁거린다는 듯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돌아섰다. 곧 문이 쾅, 닫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경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쯤 되자, 더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유정이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얼핏 시선을 들어 보는가 싶었지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서 보니,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말문이 막힌 유정은 그저 가만히 입만 벌렸다. 눈을 내리뜬 태경은 차분했다. 커다란 섬섬옥수가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단춧구멍 사이로 바늘이 자유자재로 드나들었다. 그러니까, 그의 바느질 솜씨는 가히 수준급이었다.
유정은 잠깐 넋이 빠진 채로 구경하다가, 뒤늦게 물었다.
“……바늘이랑 실은 어디서 구했어요?”
“근처에 자수 공방이 있었나 봐요.”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말인즉, 준우가 자수 공방을 방문했다는 게 된다. 소스라치던 준우의 모습이 떠오르자, 유정은 괜히 미안해졌다. 얼마나 민망하고 낯이 뜨거웠을지. 고맙기도 하고.
태경은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알 리 없었다. 그저 단추가 제대로 안착했는지 세심하게 확인한 후, 그녀에게 셔츠를 건넸다.
“다 했어요.”
유정은 얼떨결에 셔츠를 받아 들었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떨어진 자리였는지도 모를 정도로 마감까지 깔끔했다. 그녀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나도 바느질은 못 하는데…….”
학창 시절, 모친도 그녀의 떨어진 단추를 다시 달아 준 적이 없었다. 아니, 못 달아 주었다. 모친은 다림질도 못 하는 공주과로, 단추가 떨어지면 새 셔츠를 사 주곤 했었다.
유정은 감격한 얼굴로 그가 수선해 준 셔츠를 매만졌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사실 그런 질문조차 무의미했다. 태경은 집안일이라면 못 하는 게 없었다. 어떨 때는 그녀보다 한 수 위여서, 민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릴 때 해 봤어요.”
태경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커진 눈, 상기된 두 뺨, 올라간 입꼬리를 샅샅이 뜯어보았다.
“보육원에서.”
* * *
그 말에 유정의 웃는 입매가 희미하게 굳어졌다. 태경은 그 반응을 더 깊숙이, 파고들기로 작정한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한층 더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나이를 말하는 것과 같이 시시한 일일 뿐인데. 유정은 급기야 안쓰러울 정도로 입꼬리를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더 어릴 때부터 혼자 해결해야 했구나, 뭐든……. 그래서 다 잘하는구나…….”
유정의 속눈썹이 처마처럼 아래로 처졌다. 콧잔등을 찡긋거리기도 했다. 어릴 때 고난을 겪은 점이 안쓰러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이었다. 씀벅거리는 유정의 속눈썹이 촉수처럼 심장 구석구석을 기어 다녔다.
간지러워.
태경은 희미하게 한쪽 눈썹을 구겼다.
“어릴 때부터 못 하는 게 없네요. 태경 씨는.”
“엄하게 컸거든요.”
엄한 수준을 넘어 학대였지만. 그는 굳이 그 말을 덧붙일 생각이 없었다. 아주 사소한 일 한 가지라도 사실대로 말하는 순간 서유정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지금도 큰 눈망울이 젖을 대로 젖어서, 위태했다.
“유정 씨는 어땠어요. 어릴 때.”
그녀는 의도대로 충실히 따라와 주었다. 어릴 때를 회상하는 듯 미간을 살짝 모은 채 사색에 빠진다.
“좀…… 천진난만했던 거 같아요. 딱히 엄하게 크지도 않았고.”
회상에 흠뻑 취한 듯이 유정이 말을 이었다.
“아빠는 항상 바빴던 거 같아요. 집에 잘 안 들어왔어요. 엄마도 오빠를 신경 쓰느라고 저한테는 관심이 조금 덜했거든요. 오빠가 저 때문에 다치는 바람에.”
그녀의 부친과 모친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자격 미달인데. 오빠란 놈은 병신이고. 음험한 속내와 달리 태경은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세웠다.
“여름 휴가로 펜션에 갔었는데 거기에 풀장이 있었거든요. 오빤 안 들어오고, 밖에서 제가 좋아하는 인형으로 줄까, 말까 장난을 쳤어요. 제가 인형을 잡으려다가 실수로 오빠까지 풀장에 빠진 거예요. 수심이 깊었나 봐요. 오빠는 수영할 줄 몰랐는데……. 발버둥 치다가 가라앉았고…….”
유정은 당시의 공포가 다시 떠올랐는지 얼굴이 하얘졌다.
“제가 엄마를 불렀는데, 엄마가 오빠를 건져서 안고는 많이 놀라셨는지 그대로 방 안으로 가셨어요. 오빠는 아직도 그 후유증이 남아 있대요. 그래서 저는…….”
실수로 사람과 부딪친 것도 통증을 동반하는데, 하물며 목숨을 위태롭게 한 기억이 오죽할까. 서유정처럼 심약한 인간에겐 버티기 힘든 기억이겠지. 가족이란 것들이 그 점을 이용하는 줄은 꿈에도 모를 테고.
태경은 우물이 팬 그녀의 턱을 툭, 툭 건드렸다. 그제야 유정이 멍한 시선을 들었다.
“나였어도 그랬을 거예요.”
“…….”
“유정 씨는 고의도 아니었잖아요.”
“…….”
“난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는 걸 빼앗아 가면, 그게 누구든 물속에 처박았을 거예요.”
태경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별일 아닌 것처럼.
“위로해 주는 거예요?”
“진심인데.”
“…….”
“유정 씨는 너무 물러요. 착하기도 하지. 그게 실수라니.”
순간 유정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것마저도 나중에는 좀 과격한 위로라고 판단했는지 금세 풀어졌다.
태경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여상히 물었다.
“인형은 어떻게 됐어요?”
유정은 일순 눈을 크게 뜨고,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그 인형에 대해 물어봐 준 사람은 태경 씨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눈이 퍽 슬퍼 보였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슬프게 하는지 태경은 알 수가 없었다.
“……사랑해요, 태경 씨.”
심지어 달콤한 말을 하면서 쓰게 울었다.
* * *
애지중지했던 인형은 그날 엉망으로 망가져 물에 둥둥 떠 있었다. 혼자 남겨진 것보다 그게 더 아팠는데. 지금까지 그 인형의 행방을 물어본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자신조차 모친의 반응이 두려워 입에 올리지 못했었다.
“……사랑해요, 태경 씨.”
무작정 그에게 매달려 입술을 갖다 붙였다. 손바닥에 닿은 태경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귓가에서는 거칠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모르는 체하고, 입술을 더 꾹 눌렀다가 떨어져 나왔다.
그가 퍼붓던 키스에 비하면 가벼운 입맞춤에 불과한데도, 숨이 가빴다. 하지만 호흡을 고르기도 전에, 그에게 어깨가 잡혀 침대 매트리스에 등이 부딪혔다. 커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젖을 움켜쥐었다.
아픈 신음이 터져 나오는데 무언가가 투둑, 하고 뜯어지는 소리가 같이 터졌다. 무심코 내려다보던 유정은 이내 경악했다. 셔츠 형식의 잠옷 단추가 사방으로 튀는 게 보였다.
“……?!”
유정은 움직일 수 없었다. 상체를 세우기도 전에 브래지어 위로 태경이 얼굴을 묻은 탓이다.
“내가 다시 다 달아 줄게요.”
가슴골 사이에 얼굴 처박고 태경이 숨을 들이마셨다.
“좋아하잖아요. 그렇게 해 주는 거.”
그가 앓는 신음을 흘리며 브래지어 컵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