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고꾸라지는 시야가 마지막 기억인 유정은 쿵쿵 뛰는 심장에 손을 올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괜찮아요. 좀…… 많이 놀랐나 봐요.”
납치당했을 때의 일이 트라우마처럼 새겨져 발렌틴을 보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제게로 겨눠진 총구에 덜컥 겁을 먹은 것도 있었지만, 태경이 또다시 위험에 처하고, 난처해질까 봐 마음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불안했다.
“많이 걱정했죠?”
유정은 노심초사하는 눈빛으로 태경을 바라봤다.
“바쁜데 나 때문에 못 움직이는 거 아니에요? 여기서 뭐 했어요?”
“유정 씨 머리카락 만지고 있었어요.”
“그전에는요?”
“얼굴 계속 보고 있었어요.”
그게 마치 중요한 일인 것처럼 말하던 태경은 가늘게 한 줌 남아 있는 유정의 불안을 읽었다.
“발렌틴은 무사해요. 마취제 맞은 거라.”
미군의 신기술로 제작된 마취제는 바늘처럼 가느다란 형태라서, 전용 저격 소총으로 발사하는 형식이었다. 아직 실험 단계에 있어 효과가 미비하다는 평이 많았지만, 서 있는 것도 용한 발렌틴에게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병원으로 옮겨졌어요. 법적 조치 받고 정신 병원에 강제 입원당할 거예요. 평생.”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거라며 못을 박았다.
귀신같이 오싹한 발렌틴의 모습을 떠올린 유정은 눈을 질끈 감으며 불안감을 떨쳐 냈다. 정말 이제 끝인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숨을 길게 내쉬며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유정은 시선을 들어 올려 태경을 바라봤다. 그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길로 마주하고 있었다.
줄곧 이렇게 보고 있던 건가? 유정은 괜히 간지러운 듯한 얼굴을 살살 문지르며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에만 있었어요?”
“네.”
간결히 대답한 태경이 말을 이었다.
“뭐든 안 예쁜 게 없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처음이라. 계속 보고 있었어요.”
조금의 장난기도 묻어 나오지 않는 말에 유정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진짜 예쁜 사람이 말하니 민망해요.”
엉뚱하다는 듯 태경이 눈썹을 움찔하자, 유정이 눈을 굴렸다.
예쁘다는 건 남자한텐 조금 앙증맞은 표현인가.
“아름답다?”
그 순간 태경이 유정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감싸, 앞으로 조금 당겼다. 빈틈없이 맞붙은 입술 사이로 애틋한 숨결이 갈급하게 오고 갔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어요.”
태경이 천천히 입술을 떼며 말했다.
“더는 놀라게 하지 않을게요.”
수심이 깊은 물속 같은 그의 눈이 안개가 낀 것처럼 자욱하게 느껴졌다.
유정은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이마를 맞대 오자, 얼굴 위로 호수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 * *
욕실에서 차림새를 정돈하고 손을 씻고 나온 유정은 벽에 등을 기대 팔짱 낀 자세로 기다리고 있던 태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후 어서 가자는 말을 꺼내려던 찰나, 불청객의 목소리가 날 서게 끼어들었다.
“욕실 앞에서 기다리는 건 실롄데.”
태경과 유정의 시선이 동시에 옆으로 향했다.
복도 끝에 있던 세르게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다신 발렌틴 꼴 보긴 어렵겠어. 아버지인 나조차도 말이지.”
그들 앞에 멈춰 선 세르게이는 유정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 가로로 휘, 저었다.
“휩쓸려서 안타깝게 생각해. 진심이야. 하지만 네가 그 남자를 만났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고, 그 남자는 내 아들을 죽이려 했으니 살인자의 여자가 될 뻔했군.”
교묘한 혀가 유정을 농락하려 움직였다.
유정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혼자 있었으면 모를까, 태경이 같이 있어서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혹시나 그가 이 말을 주의 깊게 들을까 봐 애가 타는 느낌도 들었다.
“멋대로 판단하지 마세요.”
그녀는 앞에 선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세르게이의 존재감은 까맣게 잊고, 불쾌한 투로 말했다.
“설사 아드님이 죽었어도 이 남자는 존경받을 거예요. 웬 미친놈에게서 저를 구해 줬으니까.”
순간 태경의 고개가 유정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여유가 없던 유정은 그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앞장서 나갔다.
“가요, 태경 씨.”
유정은 드레스가 구두에 밟히든 말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태경을 일방적으로 끌고 나왔다는 걸 인지했다.
겨우 제 가슴께쯤 오는 여자에게 반항 없이 끌려 온 태경을 마주하며 조금 민망해진 유정이 손을 놓자, 그가 다시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놀란 유정이 고개를 들었다. 홍조를 띤 것처럼 언뜻 눈가가 붉어진 태경은 그녀의 이마, 뺨, 코, 입술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너무 좋아 못 참겠다는 입맞춤에서 상쾌한 흥분감이 느껴졌다.
얼떨떨하게 받아 주던 유정이 결국 얼굴을 손으로 막자, 손목을 그러쥐어 손바닥에 입술을 붙였다. 그 상태로 시선이 부딪치자, 유정은 조금 전 있던 일을 떠올리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기분 상하지 않았어요?”
“내가 왜요?”
이해하지 못한 듯 태경이 눈썹 끝을 구부리며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곧이어 그의 눈길이 다시 유정에게로 왔다.
“그 노인네 말은 기억도 안 나요.”
정말인 듯 그의 기분은 여전히 좋아 보였다.
행여나 그가 자신에 대한 염려로 세르게이의 말에 휩쓸릴까 걱정했던 유정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태경이 그런 유정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제 품 안에 가두었다. 꼭 붙어 있는 둘의 모습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한둘 쳐다보기 시작했다. 시선을 의식한 유정이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들었다.
“우리, 이제 가요.”
“어디로?”
태경이 얼굴을 숙이며 묻자, 유정은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홍콩으로요.”
그림을 감상하듯, 유정의 얼굴 곳곳을 훑어보던 태경이 얼굴을 더 기울이며 입을 맞췄다.
입술만 살짝 맞대는 버드 키스에도 유정의 심장은 달랑달랑 떨렸다. 동시에 바르르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자,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위를 덮었다.
저택의 아름다움이 그 둘의 완벽한 배경이 되어 주어, 마치 명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 * *
현장에 있던 톤제 부대장은 레바논에 복귀하자마자 사무국에 보고를 올렸다. 모두 기밀이긴 했지만 어떤 방어벽이든 쉽게 뚫는 에이든은 어렵지 않게 톤제 부대장이 올린 보고를 다른 창에서 띄웠다. 러시아 쪽 기록을 보내라고 지시받기 전에 톤제 부대장 쪽 기록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에이든의 옆에 서서 책상을 손으로 짚고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준우가 참석자 목록을 읽어 내리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이 인간들이 다 참석했었다고?”
보여 주기식 사과가 지울 수 없는 목격자를 만들어 버린 꼴이었다. 정·재계에서 굵직한 놈들만 모아 놨는데 오히려 그게 독이 됐다.
에이든이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듯 읊조렸다.
“이 대째 대통령 만든 실세가 자국에서 감시받게 생겼네.”
“쪽팔려서 어떻게 살아? 나 같으면 머리 박고 죽었다.”
키득 웃으며 주먹으로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던 준우는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다른 창이 나타나고, 10분 간격으로 써 내린 세세한 기록이 떴다.
[am?:[email protected]#dg6^#%000]
[am?:[email protected]%hmk)_3xxx97*]
알 수 없는 기호로 한 번 더 막혀 있었지만, 에이든이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자 암호화가 손쉽게 풀렸다.
[am11:13-v, 응접실 침입. 무장/리볼버. j와 여자를 위협. 여자 혼절.]
유정에 대한 기록에 눈살을 찌푸린 준우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냥 기절만 한 건가. 어디 다친 건 아니고?”
다행히 밑으로 더 내려 봤지만 그런 언급은 없었다.
준우는 안심하면서도 심란함을 떨칠 수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모르고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것처럼 말했던 게 떠올랐다.
유정의 가녀린 체구를 떠올리며 준우가 안타까운 숨을 내뱉는 순간, 현관이 벌컥 열렸다.
태경과 유정이 나란히 들어오는 모습에, 준우는 현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셨어요? 몸은 괜찮아요?”
크게 티 내지는 않고 돌려서 묻는데, 유정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오는 내내 잤어요.”
“그래도 비행기에서 잔 거라 찌뿌둥할걸요. 푹 쉬어야 돼요.”
준우의 마중과 함께 이제 진짜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은 유정은 한국도, 마카오도 아닌 이곳이 집인 것처럼 느껴져, 신기하면서도 가슴이 따듯해졌다.
그런 그들을 컴퓨터 의자 등받이에 기대 쳐다보던 에이든의 눈길이 다시 모니터로 향했다.
* * *
옷을 갈아입으려 단추를 풀던 유정은 단추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걸 보고는 주워 들었다.
“아…….”
벌린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스무 살에 받은 첫 아르바이트 월급으로 샀던 셔츠였다. 그때 집 형편은 모든 상황을 통틀어 가장 최악이었는데, 이걸 사면서 잠깐이나마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참 아끼는 옷이었다.
괜스레 슬퍼지기까지 한 유정은 일단 옷을 다 갈아입고, 떨어진 단추와 셔츠를 양손에 쥐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욕실에서 씻고 나온 태경이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기민한 그의 시선이 그녀가 들고 있는 것들로 내려갔다.
“왜 그래요?”
“아끼는 옷인데 단추가 떨어져서요. 처음으로 탄 월급으로 산 셔츠거든요.”
손에 든 젖은 타월을 다른 곳에 걸친 태경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