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세르게이는 잇새로 조소를 흘렸다.
이깟 여자 하나 때문에 그 난리였던 게 말이 되나.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태경과 협상하는 것만으로도 금 갔던 자존심이 다시금 꿈틀댔다.
대통령만 아니었어도.
세르게이는 어금니를 갈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대립 중인 공화국 수장을 심복으로 만들어 기껏 위로 올려 두었더니, 대통령은 언제 도움을 받았냐는 듯 경계했다. 막상 그렇게 만들어 놓은 힘이 거슬렸던지, 조금의 흠집이라도 있기만 해 보라는 듯 눈을 빛냈다.
약이 바짝 올랐지만, 일단은 이번 일을 잘 무마시키고, 해결했다는 걸 표면적으로 드러내야 했다. 그런데 막상 문제의 여자를 앞에 두니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 게다가 인사조차 맛있게 씹은 태경이 분노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지폈다. 합의점 찾을 때부터 재수 없더니, 어떻게 된 집단인지 같이 온 상관 눈치도 안 보는 듯했다.
“후…….”
세르게이는 뜨거운 숨을 작은 한숨으로 흘려보냈다.
심부름꾼으로 부릴 때는 편했는데 반대편 입장이다 보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국제 평화를 내세운 집단을 위협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칼 긋기였다. 미국의 개새끼들 주제에.
“제 아들이 두 차례나 실례를 저지른 일은 안타깝게 됐습니다. 부득이하게도 이 자리에 참석은 못 했지만, 이해 바랍니다. 지금 병상에 누워 있어서.”
병상에 누워 있다는 말이 힘주어 나왔지만, 정작 태경은 표정 변화도 없었다.
“아들이 반성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벌인 일이기도 하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조현병으로 정신과 치료 예정입니다.”
세르게이는 오른손을 가슴께에 가볍게 붙였다.
“다시 한번 사과 하겠습니다. 아가씨한테도 미안하군요. 그런 일을 겪어서 많이 무서웠겠네요.”
특이한 억양의 발음……. 그 말투에 발렌틴이 떠오른 유정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 네. 이제 괜찮아요.”
“보상은 이른 시일 내로 해 주겠습니다.”
티 나지 않게 말끝을 흐린 세르게이는 주름진 눈매 끝을 구부리며 시선을 올렸다.
“그런데……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비켜 지나갔더군요. 정말 죽이려고 했던 건 아닌지?”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 씨. 그런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결론 났습니다.”
톤제 부대장이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며 의혹을 빠르게 차단했다.
그녀를 흘겨보던 세르게이가 까끌까끌한 턱을 매만졌다.
“허벅지에 한 발 쏜 것만으로도 제압은 이미 된 거 아닌가?”
“아시다시피 녹화된 장면을 보면, 허벅지에 한 발 맞고 쓰러지면서 여자한테 총을 겨눴습니다.”
“그쪽에서 내놓은 결론 말고, 난 J에게 직접 듣고 싶은데.”
쓸모없는 소린 닥치라는 거였다. 세르게이의 두툼한 손이 의자 팔걸이를 움켜잡았다. 예의 미소를 띤 얼굴은 무척이나 건조했다. 부드럽게 접힌 눈매 속 회안이 주태경에게 위협적으로 꽂혔다. 정적은 꽤 오래갔고, 아무 반응 없던 태경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천천히 입을 뗐다.
……그리고, 그때.
쾅-!
응접실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누군가 들어왔다.
날이 선 긴장감을 깨고 무례하게 들어온 사내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열린 문과 쿵, 쿵 부딪혔다,
“크윽……!”
통증 섞인 신음을 뱉어 내며 열린 문을 뒤로 쾅, 닫았다. 가슴이 아픈 듯 한 손으로 감싸며 상체를 숙인 남자의 지저분한 레몬빛 머리가 밑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후우…….”
한 걸음, 두 걸음……. 흐느적흐느적 움직이던 새까만 가죽 구두가 지익, 듣기 싫은 마찰음을 일으키더니 우뚝 멈췄다. 남자는 헐떡이는 상체를 천천히 세웠다. 한 움큼씩 뭉친 머리카락들이 뒤로 스르륵 넘어가며 얼굴이 드러났다. 가느다란 턱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오랜만?”
쥐어뜯듯 머리칼을 쓸어 넘긴 발렌틴이 웃으며 말했다.
응접실 내부는 그가 들어오기 전보다 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사색이 된 세르게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뒤로 밀려난 의자가 바닥을 구르며 큰 소리를 내는데도, 모두의 시선이 발렌틴에게 쏠렸다.
발렌틴은 서 있는 것도 버거운 듯 아직도 숨을 헐떡이면서 히죽 웃었다. 분칠한 것처럼 하얀 얼굴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눈 밑은 새파랬다.
“내 일로 모인 건데 내가 빠지면 재미없잖아.”
움푹 팬 퀭한 눈이 유정에게로 굴러갔다.
“오늘 예쁘네?”
새하얗게 질린 유정의 얼굴에 끈적거리고 질척한 눈길이 달라붙었다. 유정을 제 뒤로 옮겨 시선을 차단한 태경이 재킷 버튼을 풀고 걸음을 옮겼다. 제게로 성큼 다가온 그의 얼굴을 보며 솜털이 곤두선 발렌틴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방금, 진짜 죽여 버린다고 생각했지?”
등 뒤로 숨겼던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추악하게 말아 쥔 그의 왼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순간, 창가 쪽에 바짝 붙어선 사람들이 숨을 집어삼키며 동요했다. 평소에도 반쯤 미쳐 있다는 평의 발렌틴이지만, 오늘은 그 수준을 넘어 눈빛이 돌아 있었다.
“너! 뭐 하는 짓이야……!”
혼란스러운 얼굴로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던 세르게이가 다그쳤다. 그제야 비로소 세르게이에게로 고개를 돌린 발렌틴이 얼굴을 우그러뜨렸다.
“당신이 남 눈치나 살살 보면서 자꾸 실망스럽게 구니까 이러는 거잖아. 그래 봤자 2인자 이상은 되지도 못할 팔자인 거 모르나.”
“당장 총 집어치우지 못해?!”
목덜미에 핏줄이 굵게 선 세르게이가 격양된 얼굴로 소리쳤지만, 발렌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수습되지도 않을 터였다. 발렌틴은 차분하게 총을 고쳐 잡았다.
그날 이후,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는 매일 미쳐 갔다. 제대로 멜로 한번 찍고 보상에 사과까지 요구하다니. 결국 저들 좋은 짓만 했다는 생각에 잠도 이룰 수 없었다.
발렌틴은 쩍쩍 갈라진 입술을 짓씹으며, 울음 같은 웃음을 실실 뱉어 냈다. 구멍 뚫렸던 가슴에서 울컥, 피가 새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에 더 흥분됐다.
“자, 2차전이야. 이번에도 J가 여자를 구하자.”
발렌틴이 손목을 옆으로 기울이자, 차가운 총구가 태경의 뒤편에 있는 유정을 향했다. 트라우마가 생긴 듯 벌벌 떠는 그녀를 보며 발렌틴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매일 그때를 떠올렸어. 억울해서. 내가 짠 판인데 내 총은 놀고만 있었잖아.”
총을 든 것만으로도 팔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트리거를 감싼 손가락에는 힘을 놓치지 않았다. 구부러진 검지 끝이 삐끗, 움직였다.
쨍그랑-!
그 순간 창문이 깨지며 발렌틴이 픽 쓰러졌다. 창가에 서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두커니 선 태경의 양옆으로 비켜 지나갔다.
시선을 밑으로 내린 태경은 바닥에 처박혀 꿈틀대는 발렌틴을 지저분한 것을 보듯 응시하다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발끝에 걸린 총을 옆으로 걷어차며 굽힌 무릎으로 발렌틴의 등을 압박한 그가 발렌틴의 두 손을 뒤로 꺾은 채, 고개를 들었다.
“반성을 많이 안 한 모양이네요.”
안타깝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에 세르게이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태경은 시시각각 변하는 세르게이의 얼굴을 감상하며, 발렌틴이 들어오기 전 상황을 상기시켰다.
“내가 그때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지?”
큼직한 손을 주먹 쥔 세르게이의 눈이 크게 뜨였다.
털썩.
팽팽한 긴장감 끝에, 유정의 몸이 힘을 잃고 밑으로 가라앉았다. 다급히 뒤를 돌아본 태경의 시선이 붕괴하듯 흔들렸다. 한걸음에 다가선 그는 유정의 축 처진 여린 어깨를 감싸고는 가뿐히 안아 들었다. 붉은 드레스가 밑으로 축 처지며 그녀의 고개가 그의 가슴으로 툭, 기울었다.
* * *
응접실과 사뭇 다른 분위기의 방은 버건디색의 커튼으로 창이 다 막혀 있어, 어두웠다.
장미 자수가 새겨진 벨벳 소파에 누운 유정이 온통 붉은 것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태경은 구부린 손등에 턱을 기대며 유정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저택 근방에 저격수들을 배치해 둔 그로선 발렌틴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전, 나뭇가지 부러지듯 맥없이 쓰러지는 그녀를 보며 발밑이 꺼지는 줄 알았던 그는 심장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처럼 불안과 안정이 널을 뛰듯 변동하는 좆같은 감정이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이 병신 같은 감정에 사랑이란 이름을 붙인다면 사랑이겠지.
건조한 숨을 뱉은 태경은 유정의 코 밑에 손을 대, 호흡을 확인했다. 이렇게 해야만 안심이 되었다. 그의 손길은 그대로 입술로 내려가 도톰하고 말랑거리는 아랫입술을 건들다가, 붉은 드레스 위에 겹쳐진 손가락도 매만진 후, 소파 팔걸이까지 펼쳐진 기다란 머리카락을 가볍게 쥐며 엄지로 문질렀다.
그 순간, 유정이 흐린 눈을 깜빡깜빡하며 정신을 차렸다. 바로 초점이 잡힌 동공에 태경이 비치자, 그녀는 내심 안심하며 두리번거렸다.
“아…… 어떻게 된 일이에요?”
“유정 씨 잠깐 기절했어요. 이제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