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48)화 (48/83)

48화.

부티크는 적당한 소음에 휩싸여 있었다.

지하까지 포함해 총 5층으로 이루어진 부티크는 호텔과 멀지 않았다. 주태경은 프랑스에서 복무할 때 윗사람이 갖가지 이유를 들어서 사저로 초대를 하는 바람에 이런 곳에 몇 번 들락거린 경험이 있었다. 쓸데없이 시간을 소모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나중에는 아예 슈트를 몇 벌 사들여 발길을 끊었는데.

태경은 1층 라운지체어에 앉아 버릇처럼 사위를 훑어봤다. 높은 천장에 달아 놓은 샹들리에 주변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박힌 조명이 보석처럼 빛났다. 클래식 음악이 은은히 들리고, 쇼핑을 도와줄 퍼스널 쇼퍼들이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 고객층이 여성인 점을 고려한다면 이곳은 완벽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무감한 얼굴로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두 손을 깍지 끼웠다. 눈부신 조명이 각진 어깨로 쏟아져 내렸다.

팀장의 부재로 인해 태경이 대신 살펴야 할 것들이 늘었다. 그동안 표적으로 삼은 이들의 현황과 그에 대한 분석 자료, 추후 대응 방안까지. 새벽에 시작한 회의가 공항으로 출발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태경은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묻었다. 무미건조하게 대리석 바닥재를 응시하다가 덤덤히 목을 세웠다. 계단 위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린 그가 일순 크게 눈을 떴다.

난간을 지탱한 손끝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붉은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은 서유정이 계단을 내려오는 게 보였다.

길고 곧은 목덜미를 따라 엷게 각이 진 가냘픈 어깨, 도드라진 쇄골, 한 손에도 잡힐 법한 허리. 그 아래로 풍성한 치맛단이 바닥까지 덮었다. 백지장처럼 하얀 피부가 더 부각이 되는 바람에 주태경의 심장이 순간 철렁했다. 그 감각이 등줄기를 파도처럼 뒤덮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계단을 내려온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그는 타이에 손가락을 걸어 끌어 내렸다.

“괜찮아요?”

유정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돌아올 반응이 걱정인지 목에 건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

퍼스널 쇼퍼가 러시아어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그녀를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유정은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드레스를 신기한 눈으로 훑어봤다. 태경의 목젖이 위아래로 격렬하게 들썩였다. 노련한 퍼스널 쇼퍼는 준비가 되면 부르라고 말하고는 멀어져 갔다.

유정이 거울을 통해 뒤에 선 그를 바라보았다.

“별로예요……?”

그녀는 조금 실망한 목소리였다. 거친 발소리가 그 목소리를 삼키며 다가오더니 이내 태경이 유정의 뒤에 배경처럼 섰다. 그는 한숨을 삼키며 유정의 목덜미로 고개를 내렸다. 시선은 치켜들어 집요하게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보여 주기 싫어졌는데.”

멈칫하며 굳었던 유정이 그의 뜻을 읽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의 둥근 어깨부터 잘록한 허리까지 내려다보던 태경이 고개를 세웠다.

“마음에 들어요?”

“……네.”

유정은 눈을 살포시 내리깔며 뒤를 돌았다. 핏줄이 옅게 비치는 눈가에 속눈썹이 나비처럼 사뿐사뿐 팔랑였다. 유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태경이 분홍빛으로 물든 그녀의 조그만 귓불을 매만졌다.

“그럼 이거로 하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태경은 손을 거둬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유정은 그가 매만지던 귓불을 슥슥 문질렀다. 목덜미 솜털에 뜨끈하게 열이 올라 입이라도 맞춘 느낌이었다. 내일도 이렇게 들떠선 안 되는데. 중요한 자리를 앞두고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것 같았다.

“내일 전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묻는 거에 대답만 하면 되나요?”

“어차피 사과받는 자리라. 우리 쪽에서도 사람 올 건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조금 안심이 된 유정은 거울로 힐긋 시선을 던졌다. 낯선 제 모습보다, 그런 제게서 시선을 못 떼는 태경에게로 더 눈이 갔다.

* * *

옛 대공이 사냥용 별장으로 썼던 세르게이의 하늘빛 저택은 자작나무 길이 담처럼 둘려 있었다. 차를 타고 그 아름다운 길을 들어가다 보면 거대한 기둥과 철제 대문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곳에 도달해야 비로소 저택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대문이 쿠궁, 소리를 내며 좌우로 크게 벌어졌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새카만 세단이 유유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사시사철 푸르른 정원 사이를 가로지르던 차는 이내 저택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유정이 태경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렸다. 저택의 웅장함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던 유정은 뒤따라 들어온 차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 쪽 사람이에요.”

태경이 유정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 순간,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자, 키가 큰 중년의 여자가 내렸다.

화려한 자수의 화이트 슈트를 입은 여자는 미로 같은 정원을 배경으로 선 태경과 유정에게로 다가섰다.

짧은 금발과 어우러진 올리브색 눈동자가 태경에게서 유정으로 자연스레 시선을 옮겼다. 호감은 조금도 묻어 나오지 않는 냉랭한 눈길을 느낀 유정은 인사해 봤자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저 태경의 옆에 얌전히 있었다.

“이 여자가 그 사건의 여잔가?”

태경이 입을 뗐다.

“네. 톤제 부대장.”

블랙스완은 사무국에서 단독으로 감독하지만, 총장이 올 순 없으니 레바논 부대 톤제 부대장이 대리인으로 참석했다. 레바논 부대 쪽에서 감독하는 것처럼 내세우는 용도였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부족한지 감시자들이 부대장을 속속히 따라붙었다.

이름마저 꺼림칙한 블랙스완.

군의 비군사적 한계로 써먹을 도구로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얘네한테 걸리면 귓구멍까지 탈탈 털렸다. 총장한테 직접 감독받으니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니는지 공유도 되지 않았다.

대외적 이미지를 끔찍이도 중요하게 여겨서 중립, 평화를 내세우는 집단이 만든 모순적인 그룹.

과정이 어떻든 뜻은 같지만, 피하고 싶은 상대였다. 어차피 모양만 챙기라는 명령이니 서둘러 끝나고 돌아갈 생각이라 톤제 부대장은 더 이상의 말 없이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쳐다보던 유정은 태경이 팔 안쪽을 조금 벌리며 고개를 까딱 움직이자, 냉큼 그의 팔을 잡았다. 이어서 그들도 고용인의 응대와 함께 궁전 같은 저택에 입성했다.

단조롭던 대리석 바닥이 기하학적 무늬를 띄는 구간에 들어선 순간, 우아한 현악기 음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울려 퍼졌다.

러시아 쪽 정치인, 잔뼈 굵은 사업가, 사무국에서 보낸 감시자……. 세르게이의 초대를 받고 온 사람들이 거대한 샹들리에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하는 일부터, 국적까지 다 다른 그들은 유독 눈에 띄는 태경과 유정을 힐긋 쳐다봤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에 어쩔 줄 모르던 유정이 붙잡은 태경의 팔에 힘을 줬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에요.”

태경이 고개를 숙여 유정을 바라봤다.

“내 눈엔 저들이 그렇게 보이는데요.”

“어떻게 그래요?”

발상의 전환이라 생각하며 신기해하는 그녀에게 그가 가볍게 답했다.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해요.”

“……평소엔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노력해 볼게요.”

깊이감 없이 대답한 태경은 은색 트레이를 들고 다니는 남자를 제스처로 불렀다.

“떨리면 샴페인 한잔해요.”

“난 태경 씨가 아니에요. 괜히 긴장된 상태에서 술 마셨다가 중요한 사람들한테 실수하면 어떡해요.”

“재밌겠는데요. 그래도 돼요. 내가 수습해 줄게요.”

다정한 목소리는 한 치의 꾸밈도 없었다. 재밌겠다고 한 것마저 진심인 게 문제지만.

“그러다 제가 욕하거나 깽판 치면 어쩌려고요.”

유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태경이 천천히 입을 뗐다.

“유정 씨 취하면 그래요?”

“…….”

“안 그랬는데.”

허공에 배회하던 그의 눈동자가 유정에게로 내려왔다.

그와 술을 마신 적은 있지만, 만취한 적은 없었던 유정은 뚫어져라 바라보는 태경의 집요한 시선에서 흥미를 읽었다.

“알딸딸한 적은 있었지만 만취할 정도는 없었어요. 만약 그런다 해도 절대 그러지 않고요. 궁금해하지도 마요…….”

“알겠어요. 나만 보고 싶을 거 같으니까 여기서 술 마시지 마요.”

태경은 다가온 남자에게 다시 가라고 턱짓했다.

자기만 보고 싶다는 건 뭐람. 유정이 당황하며 장난이었다고 해명하려는 순간, 세르게이의 비서가 다가와서 인사했다.

“두 분,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올 게 왔구나. 유정은 잠시 느슨해졌던 긴장을 바짝 조였다. 비서를 따라서 응접실에 가니 여섯 명 정도 되는 사람이 동그란 탁자를 두고, 각각 일인 소파에 앉아 있었다.

톤제 부대장과 마주 보고 앉은 세르게이의 눈빛이 태경에게 닿았다.

“제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군요.”

그는 발렌틴과 눈동자 색만 같을 뿐, 모든 게 달랐다. 가슴 쪽에서부터 드레스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질 만큼 커다란 몸에, 속을 알 수 없는 표정. 선이 굵은 얼굴에는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지만, 결코 그 나이대로 보이지 않았다. 선뜻 말을 걸기에도 무서운 인상이었다. 주변 기압이 높은 것처럼 느껴질 만큼 무게감이 상당했다.

먹구름 같은 눈동자가 유정에게로 느리게 굴러갔다. 세르게이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흠칫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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