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팀장이 부재중인 현시점에서 결정권자는 그다음 격인 주태경이었다. 에이든은 그의 결정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손에 쥔 컵을 반 바퀴 휘이, 저으며 뭔가를 생각하던 태경은 이윽고 컵을 탁, 내려놨다.
“위치만 제대로 파악해 둬.”
그가 나직히 읊조린 그 말이 유정의 심장에 쿡 박히는 느낌이었다.
* * *
허기진 배를 채운 후, 결국 준우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가서 카페로 이동했다. 태경과 둘이서도 와 본 적 없었는데, 시커먼 남자 셋과 아기자기한 카페라니. 유정은 신기했다.
“와, 천국이 따로 없네.”
에어컨이 고장 났던 아침의 기억이 어지간히 끔찍했던 모양인지 준우가 연신 감탄을 늘어놓았다.
그 거침없는 언행에 여기저기서 그들의 테이블을 힐긋거렸다. 취향은 또 어찌나 각양각색인지. 태경은 당도가 높은 망고 스무디, 에이든은 에스프레소, 준우는 밀크티를 각각 앞에 두었다. 유정은 스푼으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입 떠먹으며 메뉴와 그것의 주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래전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을 당시, 남자들 대부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었는데. 이들의 개성 있고, 확고한 취향이 또 신기했다.
유심히 보던 유정의 시선은 어느 순간 에스프레소에 오래 머물렀다. 식사 후에 불편한 얼굴로 배가 부르다고 했던 에이든은 식후 간식이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인지 먹지 않고 있었다.
“에이든. 이거요, 제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뿌리면 아포가토가 되거든요. 되게 맛있어요.”
에이든을 지켜보던 유정이 에스프레소 잔을 집어 들었다. 평소 네 것, 내 것의 구분이 확실한 에이든인데. 준우는 그가 급발진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눈빛으로 곁눈질했다.
묘한 분위기 속에서 유정이 에스프레소 잔을 기울였다. 커피가 쪼로록,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뒤덮었다. 그녀가 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놨을 때는, 이미 양이 반절 줄어 있었다. 준우가 여차하면 에이든의 입이라도 틀어막을 기세로 지켜보는 가운데, 에이든이 커피잔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웠다.
“난 단 건 질색이라.”
그렇게 말하면서 잔을 기울여,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포가토에는 관심이 없으니 혼자 먹으란 뜻이었다. 그 선선한 반응에 준우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하지만 곧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에이든을 흘깃, 쳐다봤다. 분명 서유정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태도가 갑자기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달지 않은데…….”
그가 입에도 대지 않는 게 혹시 쓰디쓴 커피가 입에 맞지 않아 그런 걸까 짐작했던 유정이 작게 읊조렸다. 분주히 남은 스푼을 챙겨 건네려던 손이 무안해졌다.
턱을 괸 채 지켜보던 태경은 이도 저도 못 하는 유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간단히 상황을 정리했다.
“먹어요.”
“하지만…….”
“안 먹겠다잖아.”
그는 에이든에게 양해를 구하는 언행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준우는 빨대로 밀크티를 쭉 빨아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에이든이 그녀에게 항의라도 했다면 그가 어떻게 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 * *
그가 돌아온 건 아침이었으니 다시 나갈 일도 없겠다고 생각해서 종일 붙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온 순간부터 유정의 기대는 산산이 깨어졌다. 태경은 마치 몸에 에이든의 영혼이 접신이라도 된 것처럼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도무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나도, 의자에서 눈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유정은 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준우가 빌려준 개인 노트북으로, 보다 말았던 한국 드라마를 본 유정은 저녁도 준우와 먹었다. 주의를 끌기 위해 잠깐 산책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그의 고개가 유정을 향했다. 물끄러미 보는 시선에 그녀는 조금 희망을 품기도 했었다. 하지만…….
“저녁엔 쌀쌀한데.”
그가 위아래로 유정을 훑어봤다. 얇은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는 산책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옷차림이나 평가해 달라고 산책에 나서겠다 말한 게 아닌데. 응축된 감정이 단전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오른 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태경이 다가와 담요를 건넸다. 그녀가 받지 않자, 그는 손수 펼친 담요로 유정의 몸을 감싸고 꼼꼼히 여며 주었다.
다정한 손길이 오늘따라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같이 있고 싶은데. 매일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유정이 원망을 담아 올려다보았지만,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경은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손아귀에 담요를 꾹, 움켜쥐고 그를 쳐다보았다.
더위를 피해 넘겼던 머리는 다시 이마를 가리며 덮였다. 눈을 찌를 듯 말 듯 한 앞머리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높다란 콧대 위로 흔들렸다. 그녀가 입으면 우스꽝스러운 원피스가 될 법한 흰 티셔츠를 입고도 어깨 끝에 각이 졌고 스포츠 브랜드의 로고가 작게 박힌 5부 바지 아래로 여문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온몸이 그토록 근육질인데, 종아리만큼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직선으로 뻗었다.
근사한 자태로 시야를 어지럽히는 그에 대하여 그간 조금씩 쌓인 서운함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유정은 돌아섰다.
어라? 분위기 이상한데.
과자를 먹던 준우의 시선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유정의 뒷모습에서 주태경에게로 이동했다. 그는 마치 못 본 것처럼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눈치 없는 에이든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주 환장의 파티구만. 보다 못해서 몸을 일으킨 준우가 어슬렁거리며 창가로 다가갔다. 곧 창문 밖에 그녀의 조그마한 머리통이 나왔다. 열이 제법 받았는지, 빠른 속도로 개울 앞으로 이동했다.
준우는 곤란하다는 듯 턱을 쓸어 만졌다. 힐끔 돌아보니, 태경은 나가 볼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준우가 서성대며 컴퓨터 책상 근처로 접근했다. 그러고는 뭔가 논의하느라 말을 주고받는 태경과 에이든의 옆에서 슬쩍 운을 떼었다.
“거, 밖이 엄청 어둡네. 눈이 침침해서 어디 다니겠어?”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누구 하나 관심을 보이는 이도 없었고. 준우의 목표였던 태경은 질문하는 에이든에게 해결 방안이나 알려 주고 있었다. 답답한 준우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발 잘못 디디면 개울에 빠지겠네, 빠지겠어.”
준우는 의도적으로 크게 혀를 찼다. 그러자 에이든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면서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을 더욱 치떴다.
“일하는 꼴도 안 보일 정도로 눈이 침침하면 안과를 가.”
뭐라는 거야, 이 눈치도 없는 새끼는. 순간 감정이 욱, 하고 올라왔으나 준우는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예, 예. 어제도 하고 오늘도 하던 그놈의 일하러 컴퓨터 안으로 그냥 처들어가세요.”
준우는 세상 한심하다는 눈으로 둘을 번갈아 보고는, 저벅저벅 창가로 돌아왔다. 개울 앞에 우두커니 선 유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 *
유정은 바닥에서 작은 돌 몇 개를 주워다가 개울에다 툭, 툭 던져 넣었다. 퐁당, 또 한 번 퐁당. 그 모습이 꼭 그를 만나고 난 후에 일어난 자신의 감정 변화 같았다.
태경이 그녀의 심장에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을 던지고, 또 던지고. 저는 어떻게 피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맞고, 또 맞고. 일어난 파장이 걷잡을 수 없게 번지고, 계속 번지고. 그러다 결국에는 거기에 완전히 잠식되어 버린 걸까.
그가 바라봐 주고, 다가와 주고, 만져 주고.
그 모든 게 너무 좋아서 종일 그것만 기다리는데. 그는 너무도 태연히 건너뛰어 버리니 속상했다. 바라는 건 그게 전부인데. 그 전부가 사라진 것 같았다. 투박한 돌 하나를 쥐고 바닥에 긁으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
유정은 놀란 숨을 삼키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일에 몰두하느라 눈길도 잘 주지 않았던 태경이 그녀의 팔을 낚아채 일으킨 탓이었다.
“태경 씨.”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녀의 음성을 들은 태경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왜 이러고 있어요.”
그가 손목을 놓아주며 물었다.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삐딱하게 고개를 내린 태경의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산책하고 있었어요.”
태경은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곧바로 대꾸했다.
“그거 말고.”
“그럼요?”
“여기로 무슨 생각 했는지.”
태경이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 툭 치며 말했다. 유정이 선뜻 말하지 못하자, 그의 손이 턱 밑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녀의 턱이 추켜세워졌다. 그 바람에 태경의 형형한 눈과 꼼짝없이 시선이 마주쳐 버렸다. 그의 동공에서 발간 불꽃이 어른어른 피어올랐다.
“보고 싶었거든요.”
유정이 순순히 말했다. 역시 그 목소리는 이기적인 욕심 따위는 없었다. 좀 생길 만도 한데.
“기다렸는데…….”
“…….”
“만지고 싶고…….”
그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흉곽이 씨근덕거리는 게 보였다.
“근데 태경 씨는 아닌 거 같아서요.”
“…….”
태경의 얼굴에 실낱처럼 희미한 웃음기가 스쳤다.
“무슨 소리예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지금까지 발정 난 개처럼 치댄 건 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