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후덥지근한 공기로 인해 완전히 익어 버린 뺨에 차갑고 매끄러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더위를 호소하느라 끙끙대던 유정은 무의식중에도 얼굴을 들이밀었다. 시원하다고 감탄을 하며 다시 몽롱한 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러다 귓전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음이 들려왔다. 유정이 눈썹을 움찔, 휘며 실낱과도 같이 눈을 떴다.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아 시야에 들이닥치는 방 안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머물게 된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눈을 뜰 때마다 낯설었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시선을 내리자, 머리맡에 얼음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응시하다가,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어 보니 내부에서 얼음이 녹았는지 제법 묵직했다. 그러곤 다른 손으로는 뺨을 매만지는데, 차가웠다. 잠결에 차갑다 느낀 게 이것 때문이었던 듯한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정은 이불을 제치고 일어섰다. 얼마나 많이 잤는지 머리가 무거웠다. 녹은 얼음물이 죄다 머릿속으로 들어온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비척비척 방문 쪽으로 향하던 유정은 순간 몸을 휙 돌려세웠다. 침대 옆자리가 텅 비어 있는 걸 확인한 다음에는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는데, 벌써 8시였다.
새벽 1시가 되도록 기다렸지만 결국 그는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유정은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턱에 자잘한 우물이 팼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뜨거운 열감이 맹렬하게 덮쳐 왔다. 한증막에 들어서기라도 한 것처럼 턱, 하고 숨이 막힐 정도였다.
이상했다. 여태까지 이곳은 에어컨이 24시간 가동되어 조금 추울 정도의 온도가 유지되었는데. 서둘러 거실 쪽으로 가 보니,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에이든은 컴퓨터 앞에서 티셔츠를 들추어 가며 키보드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고 있었고, 준우는 웃통을 벗은 채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를 끼고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유정 씨 일어났네요. 잘 때 안 더웠어요?”
“네? 저는 잘…….”
“에어컨 고장 났거든요. 와, 새벽부터 미치는 줄 알았네.”
준우의 말투는 당장이라도 욕을 씹어뱉을 듯 거칠었다. 그러면서도 유정의 상태를 염려하며 눈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손에 든 건 뭐예요?”
“아, 얼음주머니 같은데…….”
에어컨이 고장 날 거라고 예견한 것도 아닐 텐데 그걸 옆에 뒀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준우의 표정이 곧 묘하게 바뀌었다. 그러더니 하, 하고 헛숨을 터뜨렸다. 준우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본 유정이 움찔, 목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재빨리 표정을 단속한 준우가 상냥하게 말했다.
“근데 배 안 고파요?”
“방금 일어나서, 아직은요.”
“집이 완전 찜통이라서 여기서 밥 먹는 건 오버거든요. 나가서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네.”
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정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기, 태경 씨는…….”
그러자 준우가 의문이 어린 눈으로 보았다.
“새벽에 왔는데. 못 봤어요?”
유정의 안색에 곧장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준우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입꼬리를 단속했다.
“네. 더 자라고 절 안 깨웠나 봐요. 방에는 없던데, 혹시 어디에…….”
유정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아치형 현관문이 삐걱, 하고 열리는 것을 발견한 탓이다. 아이처럼 쫑알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침묵하자, 준우도 유정의 시선이 향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높이가 낮은 출입구로 주태경이 허리를 구부리며 들어왔다. 곧바로 유정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 방금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옆자리가 비어 있음을 알고 가라앉았던 기분 따위는 다 잊은 듯이 환했다. 준우의 떨떠름한 표정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경 씨.”
유정이 그에게로 달려갔다. 태경은 하얀 드레스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더웠는지 단추가 죄다 풀려 있었다. 소매는 걷어 올리고. 거의 뭐 헐벗었다고 봐야 했다. 평소 자연스럽게 덮어 내렸던 머리카락도 뒤로 넘어가 있었다. 드러난 이마는 머리카락과의 경계선이 깔끔했다.
차마 바로 앞까지는 가지 못한 채 유정이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대신에 그가 성큼 다가왔다.
“잘 잤어요?”
태경의 손이 불쑥 유정의 뺨을 감쌌다. 살갗을 가볍게 쥐고, 엄지로 쓸어 만지는 감촉이 좋았다.
“뜨겁네.”
안타깝다는 듯 흘리는 한마디에 유정의 수축했던 심장이 사르르, 풀어졌다.
“에어컨을 고치러 본부에서 사람을 보낸다고 했어요. 그동안 집을 비워 줘야 할 것 같은데. 갈까요?”
그렇게 묻는 말투가 꼭 데이트를 신청하는 뉘앙스였다. 유정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각자 샤워 후 출발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어,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11시였다. 돌아서면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는 게 특기인 준우는 메뉴판을 훑으며 빈정거렸다.
“무슨 남자 새끼가 샤워를 사십 분 동안 하냐고. 하는 짓만 보면 삼 일은 안 씻을 것 같은 놈이.”
“오 분 만에 끝나는 게 비정상이지. 제대로 씻기는 하는지 의심스럽다.”
시선을 메뉴판에 고정한 에이든은 진심으로 더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준우는 아예 메뉴판을 덮어 버리고서 추궁을 해 댔다.
“공동생활하려면 스피드가 생명이라고. 샤워 따위로 미적거리는 건 군인의 수치고. 솔직히 말해 봐. 너 고문관이었지? 그치?”
에이든은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힐긋 보았을 뿐, 휘둘리지 않았다. 그러자 준우가 메뉴판을 내던지며 본격적으로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비속어만 사용하지 않았다 뿐이지, 그건 거의 저주에 가까웠다. 이러고 대체 어떻게 같이 살아왔는지 의문이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유정이 연신 눈치를 살피는데, 태경은 마치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사람처럼 그녀에게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그가 몸을 붙여 왔다. 메뉴판을 함께 보려고 머리도 기울였다. 그러자 고급스러운 바디 워시 향과 섞인 태경의 체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그 향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좋아서 살짝 어지러웠다. 유정은 상기된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음…… 차가운 국물 같은 게 있을까요? 더워서.”
“덥다고 찬 거 먹으면 탈 나요. 여긴 딤섬이 유명한데. 먹어 볼래요?”
“그럴게요.”
유정이 고개까지 끄덕이며 긍정한 게 신호였다. 그는 자세를 뒤로 기울여 시선을 맞추는 것으로 간단하게 서버를 호출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준우는 태경과의 연합을 위해 그를 끌어들이려 했다.
“선배님, 저 새낀 지가 이기적인 놈인지 진짜 모르는 것 같은데. 말씀 좀 해 주세요.”
“글쎄, 그 전에 네 입부터 막아야 할 거 같은데.”
그 방식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될 것이라는 눈빛이었다. 준우는 곧바로 입을 닫았다. 에이든이 희미하게 웃는 것 같았다. 준우에게는 미안하지만, 유정도 입가가 들썩거렸다. 반응이 귀여워서 그랬는데, 준우는 그녀까지 한통속이라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낀 눈치였다.
뾰로통한 얼굴에 유정은 난감했지만,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서버가 도착했다. 태경은 그녀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고는, 딤섬을 비롯해 몇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신기하게도, 냉랭한 분위기는 얼마 못 가 허물어졌다. 딤섬을 보자마자 준우가 폭주 기관차처럼 집어 먹기 시작한 탓이다. 자신의 몫으로 놓인 딤섬을 한입에 삼키고, 우적우적 씹으며 곧바로 하나를 더 집어 가는 준우를 보느라 유정이 식사도 못 할 정도였다. 반면에 에이든은 점잖기 짝이 없었다.
태경은 딤섬을 접시에 올린 후, 젓가락을 사용해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속이 훤히 드러난 반쪽을 집어 그녀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뜨거우니까 조심.”
그 순간, 무서운 속도로 딤섬을 먹어 치우던 준우는 물론이고 깨작거리던 에이든조차 둘을 쳐다봤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는 눈빛이었다.
유정은 정말이지 난감했지만, 그의 배려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딤섬의 속 재료가 흘러 입에 묻자, 혀로 핥아서 먹었다.
태경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지더니 목을 단단하게 굳히고 유정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유정이 왜 그렇게 보냐는 듯 슬며시 눈을 들어 올리자 젓가락을 내려놨다. 이윽고 태경은 작고 둥근 컵을 움켜쥐어 차를 벌컥 마셨다. 일직선 눈썹의 끝이 희미하게 치켜 올라가 있었다. 저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유정은 갑자기 돌변한 태경의 태도에 당황해서 말을 붙이려고 했지만, 에이든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팀장 쪽은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확실해?”
준우가 음식을 삼키며 물었다. 그들끼리는 식사 도중에 일 얘기를 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쪽에서 들어온 정보니까 믿을 만해.”
“아직 연락 없는 거 보면 해결의 여지는 있는 것 같은데. 좀 더 기다리는 게 낫지. 괜히 나섰다가 엇갈리면 그게 더 문제야.”
준우가 냉정하게 평가했다. 다소 단순하고 둔감해 보이는 평소의 이미지와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소가 여물을 씹듯이 음식을 씹어 대고 있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