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네, 네! 준우 씨가 재능이 있다고 했거든요.”
유정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듯,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물었다.
“강준우가 지금 나처럼 유정 씨 이렇게 잡고?”
“아니요. 그냥 말로만 습득한 거라 잘 안 되나 봐요.”
유정이 크게 상심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리다 말고 그의 자태를 훑어 내렸다. 태경은 보통 남자보다 체격도 크고, 힘도 셌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그녀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지금 엄청 세게 잡은 거예요?”
“아니요.”
그가 당연한 듯이 대꾸했다. 그런데 꼼짝도 안 하지? 유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힘 더 줘 봐요.”
“싫은데.”
“왜요?”
“여기서 더 힘주면 유정 씨 아파요.”
그러자 유정이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바로 포기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녀는 고심 끝에 말문을 열었다.
“다른 것도 배운 게 있긴 한데…….”
유정의 수줍은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숙인 태경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게 보면 어떡하지.”
“네?”
유정의 순진한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렇게 맛있게 쳐다보면 주고 싶어지는데.”
* * *
그런 날이 있다. 필름이 딱 끊긴 지점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해 꿈에서까지 재현되는. 그게 길몽인지 흉몽인지도 모른 채 그저 꿈이라는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다 보면 어느 틈엔가 현실로 밀려나 있다.
주태경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날이었다. 커튼에 가로막혀 들이치지도 못하는 새벽빛이 과민한 의식을 헤집었다.
그는 은연중에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서 다른 손으로는 익숙하게 베개 밑을 더듬었다. 손끝에 툭, 부딪히는 핸드폰을 움켜쥐고는, 얼굴 바로 앞에서 측면 버튼을 눌러 화면을 켰다.
새까만 화면에 뜬 시각은 새벽 4시. 확실히 이른 시각이었지만, 대수롭지도 않았다. 화면을 몇 번 터치해서 어젯밤 설정해 둔 알람을 해제한 후 태경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가볍게 목을 꺾어 우드득, 뼈를 맞추고는 눈이 옆으로 굴러갔다. 최근 자주 마주하는 얼굴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무미건조한 안면에 실금 같은 웃음이 스쳐 갔다. 조소 같은.
그는 이불을 들추어 보았다. 불룩하게 솟은 드로어즈의 중심이 동전 모양으로 젖어 있었다.
씨발. 상태가 어제나 오늘이나 별반 차이도 없네.
머리카락을 털어 내듯 쓸어 올린 후 그는 단번에 침대를 빠져나왔다. 문을 열고 나와 거실로 통하는 입구에 진입했다. 강준우가 너른 소파를 독차지한 채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거실은 적막했다. 몇 번 주의도 주어 봤지만, 태생이 상놈 같은 놈이라 갱생 불가였다.
놈을 지나쳐, 태경이 향한 곳은 주방이었다. 도착한 즉시 냉장고 홈 바에서 생수를 꺼내고는 뚜껑을 거칠게 연 후, 차가운 물을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꿀꺽, 꿀꺽. 목젖이 급격하게 들썩거렸다. 차디찬 물이 공복의 위장을 휘감았다. 그제야 좀 정신이 좀 들었다. 물은 무서운 속도로 바닥났다. 손아귀를 조여 빈 생수 통을 와락, 구겨서는 발치의 분리수거 함에 던져 넣었다.
다시 거실로 나온 태경은 에이든이 매일 죽치고 앉아 있던 책상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윽고 그는 어울리지 않게 노트북의 전원을 켜서 능숙하게 보고서 폼을 찾아 클릭했다. 이제 작성만 하면 되는 건데. 이게 막상 마음이 동하질 않는 거다.
태경은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어선, 보고서 운운하던 낯짝을 떠올렸다. 입 안이 까끌까끌하고 속이 더부룩했다. 시작하기도 전에 집중력을 잃은 눈이 책상 구석에 놓인 막대 사탕에 꽂혔다. 그걸 움켜 와서 껍질을 홀랑 벗기는 데 주저함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곧이어 반질반질한 사탕을 입에 물고 쭉 빨았다. 찬물로 깨워 놓은 위장이 단맛을 보고는 요동을 쳤다.
제법 개운했다. 이제야 노동의 의지가 생겼다. 태경은 손때가 묻은 키보드를 의무적으로 두드렸다. 하얀 공백 위에 까만 글자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 글자를 무료하게 따라가던 시선은 곧 검게 일렁였다. 사고의 흐름이 갑자기 유턴을 했다.
이걸 쓰게 만든 재주 좋은 여자가 어젯밤 저를 어떻게 농락했었는지.
“언제쯤 상황이 안정될까요?”
글쎄, 서유정의 그 질문에는 하반신에 붙은 또 다른 머리를 들썩거리게 했다.
“왜요.”
“언제까지고 쉴 수 없어서요.”
그녀는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돈 때문에 그래요?”
“어……. 네. 아무래도…….”
구질구질한데 솔직하고.
솔직한데 어설프고.
어설픈데 순응하고.
순응하다가 제동을 걸고.
서유정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을 뒤엎는다. 언제까지고 곁에 있을 것처럼 굴어 놓고. 어디서 사람 미치게 하는 약이라도 먹었는지.
태경은 그녀를 잡아다 침대에 앉혀 두고 보상금 수령 내역서를 펼쳐야만 했다.
“이거 유정 씨 거예요.”
삼천만 원. 공이 하나, 둘, 셋, 넷……. 몇 개지? 일순 유정의 갈색 눈이 흔들렸다.
“지난번 일에 대한 보상금.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서도 보상금 나올 건데 그것도 며칠만 기다려 줘요.”
“전 안 받는다고 했었는데요?”
어떤 표정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을 서유정의 도화지 같은 얼굴에 언뜻 불쾌감이 서렸다.
“내가 받아 뒀어요.”
“…….”
“보상 없이 입 닦으면 소송이라도 걸고 물고 늘어져야 정상이죠. 이건 합당한 보상금이고.”
“……알겠어요. 하지만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그녀는 제법 큰 액수인데도 혹하는 기색도 없었다.
“수중에 이렇게 큰돈 있어 본 적이 없어서요.”
처치 곤란하다는 투였다.
“이게 뭐가 많아요. 다음에 받을 보상금은 어떻게 받으려고.”
서유정은 사뭇 심드렁했다. 마음도 갈구하지 않았던 것처럼 돈 앞에서도 조급해하거나 기뻐하지도 않았다.
태경이 어금니로 사탕을 와그작, 깨물었다. 사탕은 단번에 산산조각이 났고, 그 파편들이 입 안에서 부유했다. 보고서의 공백은 적당량 채워졌지만, 그의 동공은 반대로 스산하게 비어 버렸다. 그저 반복적으로 사탕을 씹어 먹었다.
와그작, 와그작.
“으…… 허리야. 씨발.”
사탕 씹는 소리를 강준우의 잠긴 목소리가 덮었다. 겨우 상체를 일으켜 세운 준우는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하고서 손바닥으로 허리를 짚었다.
불편한 자세로 여덟 시간 가까이 있었으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길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익숙하게 스트레칭까지 해치우려던 준우는 태경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와, 깜짝이야! 여기서 뭐 하십니까? 귀신도 아니고.”
태경의 검은자위가 쓱, 올라와 시선을 맞추자 준우는 깨갱, 꼬리를 내렸다.
“……의리 없는 새끼, 깨우지.”
괜히 에이든의 흉을 보며 준우는 자리에 앉았다.
왜 아침부터 나와서 설치는 거지? 의문과 긴장감이 뒤섞인 시선이 조심스럽게 태경을 살폈다. 등지고 있어도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 그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는 의혹을 밥 먹듯이 받아 왔다. 그러니 이번 역시 함부로 긴장을 풀 수 없는 노릇이다.
준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파일 인쇄 버튼을 눌렀다. 프린터기가 갑자기 작동하자, 준우는 등골을 세우며 경기했다. 하마터면 꼴사납게 비명도 지를 뻔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태경은 인쇄된 보고서를 들고 준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탕 없는 막대기를 담배처럼 물고서 건성으로 내용을 훑어 내렸다.
그걸 보고 있자니, 준우는 주태경에 의해 고장 난 발목이 갑자기 욱신거렸다. 아무리 지은 죄가 있어도 그렇지. 빈말로라도 괜찮냐고 묻지도 않고. 하여간 지독한 인간. 준우는 쳇, 하고 혀를 찼다.
정말로 안 들리는 건지, 그런 척을 하는 건지 몰라도 주태경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준우를 건너뛰고, 막 잠에서 깨어 초췌한 안색으로 나오는 에이든에게 박혔다.
“팀장은.”
빨리도 묻는다. 에이든은 어이없다는 듯 마른세수하며 대답했다.
“카라바흐로 갔습니다.”
강준우가 곧장 아는 체를 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민병대 소집했다던가?”
에이든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면으로는 팀장만 한 인재가 없지. 최고의 용병이었잖아.”
그때 이광현의 명성으로 말하자면, 오랜 기간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높은 임무 성공률, 성실함, 과묵함……. 따지고 보면 용병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란 덕목은 다 갖추었다.
그 자격으로 블랙스완 팀의 팀장으로 스카우트되었고, 이후 분쟁 지역에서 민병대를 소집하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있을 시 그에게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다. 직급만 팀장이지, 뺑뺑이 돌리는 걸 보면 여느 말단 군인보다 못했다.
태경은 쓸데없는 사족은 그만 덧붙이라는 듯 서류 너머로 에이든을 힐긋 쳐다봤다. 그러자 에이든이 곧장 말했다.
“이틀 뒤에 돌아오는 걸로 압니다.”
그러자 태경이 테이블 위에 용지를 툭, 내려놨다. 강준우의 호기심 어린 눈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두 줄 정도만 썼어도 많이 썼다 싶었을 텐데, 그래도 반은 채워 놓았다. 그만큼 세르게이 측과의 이해관계가 대립했다는 뜻이겠고.
태경은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펜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용지의 하단에 펜촉을 올린 후 사인을 했다.
“오면 그대로 전해.”
곧이어 멋스럽게 구불거리는 글씨 위에 펜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들었다.
“장난질 칠 생각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