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제 손목을 한 번 잡아 주시겠어요? 혼자서는 아무래도 힘들어서요.”
그 말을 들은 준우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얼굴을 경직시켰다. 아무리 숙련자라고 하더라도 긴장되겠지. 유정은 그의 심정이 이해되고, 고마웠다. 손목을 내어 주며 눈빛으로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준우가 입술 색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깨물었다.
“이건 순간적인 힘이 중요합니다.”
어쩐지 목소리도 떨리는 것 같고. 유정은 강한 힘은 사용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한껏 몸을 굽혔다.
“그러니까 평소에는 그런 힘이 발휘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일단 자세를 완벽하게 익히는 게 먼저예요.”
유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배운 대로 자세를 잡아 봤다. 이내 잡힌 손목을 비트는 시늉을 거듭하다가 하얀 얼굴이 발갛게 물이 들 정도였다. 준우의 얼굴이 찌그러진 깡통처럼 일그러졌다. 그러나 유정은 손목을 빼내는 상황에 놓였다는 가정을 하고 온 신경을 몰두하느라 그 변화조차 놓쳤다.
“유정 씨.”
준우의 긁힌 듯한 목소리에 유정이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쏟아져 있던 머리카락이 사라락, 걷히며 드러난 커다란 눈이 보는 이의 심장을 강타했다. 이런 눈을 보며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이는 드물었다.
“좀 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확실한 방법이라면…….”
준우는 자신의 하반신을 눈짓하며 말했다.
“진정한 고수는 급소를 노리는 법이거든요.”
유정이 아연한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냥 발로 까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요.”
“……정말 그게 효과가 있어요?”
“제대로 차면 기절할 수도 있어요. 급소니까.”
급소. 유정은 그 단어를 곱씹으며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준우는 의기양양하게 운동도 몇 가지 추천해 주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중해 있던 유정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몰라도 에이든이 팔짱을 낀 채로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태연하게 의자를 빙글 돌려서 등을 보이는 바람에 표정까지는 보지 못했다.
* * *
날이 까맣게 저물었다. 종일 틀어박혀 컴퓨터 전자파를 감당한 에이든이 통나무 문을 삐걱, 열고 나왔다. 자연석 재질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며 뒤춤에 꽂아 둔 담뱃갑을 꺼냈다.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서며 담배를 입에 무는데, 아직 열감이 채 가시지 않은 지프를 발견했다. 트렁크 쪽으로 돌아서 가 보니 정작 운전석은 비어 있었다.
에이든은 고개를 숙여 찰칵,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숙이 빨아들이자, 불꽃이 점멸하며 필터를 태웠다. 지프의 창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뒤로하고, 에이든이 개울 쪽을 바라보고 섰다. 분명 과거에는 풍족했을 물줄기가 가늘기 그지없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마을과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에이든은 개울을 옆으로 두고 선선히 걸었다. 겨우 몇 걸음 앞에 있는 후미진 골목에서 지프의 주인이 벽면에 기대어 눈꺼풀을 내린 채 고요하게 서 있었다. 누가 보면 잠들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늦었네요.”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흘렀다. 태경이 눈꺼풀을 들며 고개를 틀었다. 이미 기척의 주인이 에이든인 것을 알고 있었는지 놀라는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엔 신세를 졌어.”
어둠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이 골목에서 한 걸음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달빛을 먹어 치웠다. 빛이 고인 얼굴이 기이하게 일렁였다.
면목이 없다는 말도 꼭 저런 식으로 하지. 에이든은 한쪽 어깨를 들썩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부친도 일을 저지르면서 후일을 각오했을 터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미련하기 짝이 없는 거고.
그보다 에이든의 관심은 그의 손에 들린 서류 한 부였다.
“받아 냈나 봅니다, 결국.”
태경이 별것도 아니란 듯 묵직한 서류를 든 손을 저었다. 그렇지만 러시아를 상대로, 그것도 거만하기로 악명이 높은 세르게이를 상대로 사과와 보상금까지 받아 낸 건 큰 성과였다. 아마 머지않아 국제적으로 오르내릴 사건이었다.
물론 주태경의 성질로 보자면, 중상으로 드러누운 발렌틴을 잡아끌어 서유정의 앞에 무릎을 꿇리지 않는 이상 절대 만족하지 않겠지만.
에이든이 바싹 줄어든 필터에서 마지막으로 재를 떨어내었다.
“전 이제 들어갈 건데. 안 가십니까?”
그가 먼저 가도 된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별일이었다. 서유정을 여기에 데려다 놓은 이후로는 그토록 갑갑하다고 했던 방에 도착하는 즉시 들어가지 않았던가. 여자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눈치였는데.
하지만 뭐, 개입할 일은 아니지.
걸음을 떼려던 에이든은 이내 생각을 바꿔 그에게 다가섰다. 그러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담배에 절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협상이란 건 본디 골치 아픈 일이긴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대체 몇 명이 얼마나 피워 댔는지 가늠조차 안 될 만큼 고약한 냄새가 배어 있었다. 에이든은 이제야 주태경이 집으로 바로 들어오지 않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주세요. 제가 들고 들어가죠.”
태경은 서류를 에이든에게 순순히 넘겼다. 들고 있기 귀찮았겠지. 그는 원래도 뭐가 됐건 몸에 뭘 소지하고 다니는 걸 성가셔했었다.
에이든은 서류를 받아 들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 * *
유정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았다. 준우가 선뜻 빌려준 그의 개인 노트북 화면을 담은 시야가 흐릿흐릿했다. 한국에서 흥행했다는 좀비 영화였는데. 참신한 설정이 꽤 마음에 들어 제법 집중해서 보았으나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의식이 몽롱해졌다.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졸음을 쫓았다. 눈이 건조했다. 주먹 쥔 손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 봐도 소용이 없었다. 초조한 눈에 들어온 탁상시계는 밤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태경이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
눈꺼풀이 깜빡거리는 빈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끝내 밀려오는 수면욕을 무찌르지 못하고, 유정의 고개가 픽 고꾸라졌다. 그가 돌아오면 언제쯤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가족들이 한국에서 내 월급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인물들의 대화 소리는 차츰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몽롱한 의식 속으로 기척이 들린 것 같았다. 잠에 취한 유정의 흐리멍덩한 눈이 허공을 더듬었다. 마치 우기처럼 음울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태경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유정은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고 말았다.
“태경 씨…… 왔어요?”
행여 꿈일까 봐. 그를 붙잡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유정이 가는 팔을 무작정 뻗었다. 크고 차가운 손이 손바닥을 완전히 감싸고, 손가락 사이에 빈틈없이 깍지를 끼워 왔다. 순간 잠기운이 싹 달아난 유정이 몸부림을 치듯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타이도 없이 두어 개 풀린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가 침대맡에 걸터앉아, 유정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더 자지 않고, 왜.”
“괜찮아요.”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태경 씨 기다렸어요.”
“…….”
안 그래도 긴 그의 눈매가 가로로 더 늘어졌다. 유정은 눈을 비비며 일과를 되짚어가며 웅얼거렸다.
“밥도 먹었고.”
그 이야기를 유정은 일부러 앞세웠다. 태경이 제 끼니를 걱정하던 게 신경이 쓰였었다.
“참, 준우 씨한테 호신술도 배웠어요.”
태경의 동공이 순간 검게 그을렸다. 유정은 괜히 제 발이 저려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 그게요. 제가 진짜 제발 알려 달라고 해서 그런 거예요. 너무 가만히 있으니까 몸이 찌뿌둥하기도 하고! 사실 좀 심심했거든요. 태경 씨 말대로 방에만 있으려고…… 하긴 했는데, 그게, 너무 답답하고…….”
흐응, 하고 그의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늘게 좁힌 눈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해 봐요, 그럼.”
“……네?”
“배웠다며. 보여 줘요.”
그가 짐짓 기대된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머뭇거리던 유정은 이내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이참에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해 볼 참인지, 서둘러서 일어났다.
바닥을 지탱하고 선 그녀의 하얀 발등에 태경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가, 이내 위로 올라갔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유정은 일순 눈이 커졌다. 어째서 서 있는 자신과 앉아 있는 태경의 눈높이가 딱 맞을 수가 있는 걸까? 갑작스러운 위화감에 유정은 주눅이 들 뻔했지만 재빨리 떨쳐 냈다.
“제 손목을 한 번만 잡아 볼래요?”
그가 거부감 없이 유정의 손목을 잡았다. 너무 가늘어서 손이 남아돌 지경이었다. 그의 감상을 알 리 없는 그녀는 오후에 배웠던 대로 몸을 휙 낮추고는 태경에게 잡힌 쪽의 손을 잡아서 얼른 손목을 비틀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 더 안간힘을 써 보아도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유정의 당혹감에 휩싸인 시선이 힐끔, 그를 향했다. 태경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 이게…… 이게 왜 이러지? 웬만하면 다 풀린다고 했는데…….”
분명 준우 씨가 잘한다고 칭찬도 했었는데. 유정의 얼굴이 점점 울상으로 변해 가는데, 태경은 심상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이걸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