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준우는 한층 어두워진 유정의 안색을 바로 눈치챘는지 너스레를 떨었다.
“신경 쓸 것 없어요. 남자들은 원래 다 먹으면 바로바로 일어나거든요.”
그녀가 긴가민가하는 틈을 타, 준우는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근데 어쩌다 마카오에서 살게 된 거예요? 홍콩으로 유학 왔다가 사고라도 친 거예요? 아니면 도박으로 있는 돈 다 탕진?”
준우의 몸은 유정이 있는 방향으로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식탁에 댄 팔에 머리를 괴고는 경청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마구 보냈다.
친화력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테지만, 에이든은 그저 귀가 따갑다는 듯 귓구멍을 후볐다. 흰자위로 그 움직임을 목격한 준우는 그녀를 향해서 웃는 낯을 유지한 채, 식탁 밑에서 멀쩡한 발로 에이든의 발등을 콱 찍었다.
하지만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에이든이 휙 피했다. 준우의 이마에 시퍼런 핏줄이 곤두섰다. 유정은 그들 사이에서 무언의 전쟁이 터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입을 열었다.
“아니요. 사정상 돈이 필요해서 그냥 급하게…….”
준우는 그 말 못 할 사정에 크게 공감한다는 듯 주먹으로 식탁을 탁, 때렸다.
“저도 원래 공무원 하려다가 돈 때문에 이 길로 들었거든요. 보세요. 저도 고국 땅에 발도 못 붙이고 있잖아요. 처음 이 짓 시작했을 땐 향수병까지 걸리고 난리도 아니었죠.”
귀담아듣던 유정은 의문이 생겼다. 한국에서는 공무원을 하기 위해 매년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늘어 가는 추세인데. 하지만 준우의 뉘앙스로 추측해 보건대, 공무원보다 지금의 일이 더 월등하게 좋은 조건인 듯했다.
에이든이 남은 베이컨을 무더기로 입 속에 처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건조한 눈동자는 식탁 어딘가를 무의미하게 부유했다. 대놓고 지적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는 이 상황에 불만이 있어 보였다.
유정이 에이든의 눈치를 보며 수저로 밥알을 뒤적거렸다. 안 그래도 입맛이 없는데 눈칫밥이라니. 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지켜보던 준우는 점점 속이 부대껴 포크를 던지듯 내려놨다. 제 평소 식사량과 비교하자면 5분의 1도 안 될 양인데도 에이든의 눈치를 보느라 도무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미적거리는 모양새를 끈기 있게 지켜보려고 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얜 내버려 둬요. 한국말 못 알아들어서 그렇지, 우리가 무슨 얘기하는지 궁금할걸요?”
그렇기야 하겠지만,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에이든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면 질색하는 부류였다.
“동료 셋이나 한국인이면 이제 몇 마디는 알아들을 때도 되지 않았어?”
준우가 짓궂게 웃었다. 언뜻 듣기에는 상냥한 말투였지만, 에이든은 그 미소가 불길하고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강준우가 여자도 아닌 남자에게 호의적일 리도 없거니와 평소에도 덜떨어진 말과 행동으로 혈압을 올리는 게 주특기인 놈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본디 언어란 게 좀 그렇다. 다른 말은 몰라도 욕은 귀신같이 귀에 쏙쏙 박히고, 입에도 착착 붙는 법이었다.
에이든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얼굴 들이대지 마.”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포크를 움켜쥐는 손이 실로 위협적이었다. 물론 강준우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그는 오히려 곧장 영어로 되받아쳤다.
“싫은데?”
“너, 이 여자보다 더 발음이 뭉개지는데 도대체 언제 제대로 말할 생각이야?”
에이든이 진심으로 한심하다는 듯 쯧, 혀를 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영어 울렁증으로 인해 블랙스완 활동 초기에 어려움을 겪었던 준우였다. 몇 가지 일화는 아직도 회자가 되는 전설로 남았고. 준우는 귀까지 벌게진 얼굴로 발끈했다.
“야. 너 내가 그 얘긴 하지 말랬지. 너 거기 서라? 어?”
에이든은 그의 성화에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고, 싱크대에 식기를 담가 놓으며 주방을 가로질렀다.
“유치해.”
그러고는 지긋지긋하다는 듯하다는 중얼거림을 끝으로 완전히 주방을 나갔다.
“유치? 유치이? 진짜 유치한 게 누군데.”
유정은 보통 남자들의 대화와 다를 바 없는 둘의 옥신각신을 직관한 후 얼떨떨해했다.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하고. 서로 장난 같은 건 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막연한 선입견을 단번에 불식시킨 장면이었다.
씩씩거리던 준우는 뒤늦게 그녀의 존재를 깨닫고 어깨를 굳혔다. 영어 발음 지적이라는 치명타를 입고 그녀의 존재를 망각했었는데, 제대로 체면을 구겼다. 준우는 시뻘건 목덜미를 연신 훑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가끔 저런 무리수를 던지거든요. 야비한 새…….”
“…….”
“새가슴이라. 네.”
유정은 웃음이 터지려는 걸 혀를 씹어 참았다.
* * *
유정은 오랜만에 식곤증에 집어삼켜져 한참 허우적거렸다. 너른 침대에서 새우잠을 자다 말고 문득 의식이 돌아온 유정은 입가에 고인 침을 닦으며 어리둥절했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나 겪어 봤지, 성인이 된 이후로는 처음 겪는 현상이었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앉은 이마를 더듬으며 유정은 방 밖으로 나갔다. 거실은 역시 살풍경했다. 에이든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컴퓨터 키보드를 또닥거리고, 준우가 소파에 앉아 섀도복싱을 연마 중이었다.
유정은 테이블 위에 칼 각으로 정렬된 생수를 한 통 집어 들고 뚜껑을 돌렸다. 누구 하나 그녀의 움직임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도 이 공간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것 같아, 유정은 생수통을 기울이며 웃었다.
그제야 준우의 시선이 날아왔다.
“어? 왜요?”
“아뇨. 그냥…….”
준우는 비어 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앉기를 권했다. 무료하던 차에 잘 됐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유정은 잠깐 고심했다. 대화를 흥미롭게 이어 가는 방식이라든가, 지루하지 않게 같이 뭔가를 하는 건 어려웠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옛날부터 노는 건 젬병이었다. 그렇다고 꼭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었는데.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으세요!”
방에 모셔 두고 혼자만 몰래몰래 보고 싶은 주태경의 심정이야 속속들이 이해하나, 준우는 거기에 장단을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저도 이렇게 답답한데, 평소 자유롭게 다니던 그녀는 오죽할까. 준우는 재미없는 남자들 틈에 낀 그녀가 안타까워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녀의 갈등은 준우의 초롱초롱한 눈빛 앞에서 그대로 힘을 잃었다. 유정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소파에 착석한 상태였다.
“방에만 있기 갑갑하죠?”
“네, 좀…… 가만히 있기 그래서요. 뭐라도 해야 마음도 놓일 것 같은데……. 제가 여기 청소를 해 드려도 될까요?”
준우는 간담이 써늘했다. 그랬다가 주태경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 줄 알고.
“아니요. 절대. 누누이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냥 계시면 돼요. 아셨죠?”
준우의 거듭되는 당부에 그녀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주태경이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압박감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니. 준우는 새삼 제 처지가 한탄스러웠으나, 금세 괜찮아졌다. 그래도 그 징그러운 인간이 끼고도는 서유정은 근래 보기 드문 착한 성품이라는 게 나름대로 위안이 된 탓이었다.
말도 재깍 알아듣고. 이래서 미쳐 죽나 보지. 그 인간과는 완벽하게 정반대인데.
무슨 변태도 아니고, 주태경의 여자 취향은 경악 그 자체였다. 이런 걸 보통 가증스럽다고 하지. 준우는 그녀의 말간 얼굴을 안쓰럽게 응시했다.
유정은 자신과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는 준우를 존경스러운 눈으로 지켜봤다.
동안이기도 하고, 눈만 마주쳐도 서글서글 웃는 인상이어서 미처 몰랐는데 준우는 운동 신경이 상당했다. 어깨에서 팔뚝으로 이어진 근육이 특히 옹골졌다.
이런 건 배워 두면 요긴할 것 같은데. 누가 해코지를 하려고 하면 대응도 할 수 있을 테고. 유정의 눈이 점차 학구열로 타올랐다.
“저…… 혹시 호신술 같은 거 알려 주실 수 있어요?”
준우는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아, 혹시 위험할까 봐 걱정되는 거라면 이번엔 정말 안심하셔도 돼요.”
그녀의 우려를 어렴풋이 파악했는지 준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존심이 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냥 익혀 두면 좋을 거 같아서요.”
한껏 굳어졌던 준우의 안면 근육이 움찔했다. 그는 유정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죠.”
준우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자세를 잡았다. 직접 시범을 보이려는 모양이었다.
“손목이 잡히면 몸을 최대한 이렇게 말아요.”
유정은 그가 상체를 구부린 자세를 유심히 살폈다.
“그 손을 꽉 잡고, 잡힌 손목을 비틀어서 빼내는 거죠.”
칼을 소지한 놈에게도 먹히는 방법이다. 간혹 총기를 소지한 경우에도. 하지만 준우는 제가 알려 주고도 썩 도움이 되지 않겠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애당초 그녀의 운동 신경을 전혀 믿지 않는 탓도 컸다. 그러한 반응을 유정도 눈치챘는지 새초롬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기세에 준우의 눈이 또 한 번 둥그렇게 변했다. 그러곤 묘하게 입매를 위로 들썩였는데, 자세를 잡기 위해서 한눈을 파느라 유정은 보지 못했다. 연습 삼아 허공에 대고 보았던 움직임을 진지하게 재현해 보았지만, 역시 혼자서는 무리였다. 유정은 준우를 힐긋, 곁눈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