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38)화 (38/83)

38화.

유정은 눈 부신 햇살을 손으로 가렸다. 어젯밤 그는 이곳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재건축 허가를 받은 후 주민들이 대거 떠나고 빈집이 많다고 했다. 바로 앞에 졸졸 흐르는 개울 너머 연식 있어 보이는 주거 건물들이 제법 평화로워 보이는 건 그 탓이었다.

여긴 그중 몇 채를 사들여 벽을 허무는 대공사를 한 곳이니 생활 반경이 넓어 그의 동료들과 자주 부딪칠 일은 없을 거라는 말도 태경은 굳이 덧붙였다.

홍콩까지 와 놓고 막상 집 앞에서 약간 망설였더니 그걸 오해한 모양이었다. 물론 태경을 제외한 다른 남자들과 한 지붕 아래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도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좀 더 심층적인 우려에 가까웠다.

그의 동료들은 지난번 호텔에서처럼 다들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태경도 짐을 풀자마자 어디론가 가 버렸고. 유정은 여기가 단순한 숙소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유추해 냈다. 제 존재 자체로 방해가 되는 건 아닐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은 혼자 하는 외출도 자제해야 하니, 자리를 피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제 몫으로 주어진 방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게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유정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 발코니 햇볕에 널어놓은 빨랫감을 바라봤다. 제 옷과 태경의 옷이, 부는 바람에 일제히 펄럭였다. 흐뭇한 행복감과 약간의 죄책감이 섞여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는 사랑한다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서운하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그의 집착적인 욕정으로 이미 그 대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일평생 없을 수도 있겠지만, 유정은 그것마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쩐지 조금 홀가분했다. 마음이 좀 편해지자, 유정은 갈증을 자각했다. 도착한 이후 한 거라고는 그를 안에 받아들이는 일뿐이었다.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교성을 질러 댄 탓에 목구멍이 쩍쩍 갈라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유정은 어쩔 수 없이 방문을 조금 열어,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너무 광활한 나머지 시야에 담기는 거라곤 몇 없는 가구뿐이었다. 기척을 내서 괜히 일을 방해하고 싶진 않은데. 한참을 고심하던 유정은 마지못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섰다.

대신 뒤꿈치를 들고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움직였다. 내부를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인데, 미로가 따로 없었다. 주방을 찾아서 헤매던 유정은 문득 벽에 걸린 거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헐렁한 반팔 티셔츠로는 가려지지 않는 부위에 선명한 울혈이 가득했다. 놀라서 절로 입이 벌어졌지만, 재빨리 손으로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새된 비명을 질러 그의 동료들에게 들킬 뻔했다. 그런데 바로 근처에서 강준우의 음성이 들렸다.

“선배는 지금 사령부 통해서 세르게이랑 대화 중?”

“그렇지. 며칠 걸릴 거야. 협상도 해야 하니까.”

모퉁이만 돌면 그의 동료들이 진을 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정은 사색이 되어 굳은 다리를 도로 자신의 방 쪽으로 틀었다. 도무지 이 꼴로는 마주칠 수 없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숨소리까지 죽이고 슬금슬금 움직이는데, 일순 뒤통수가 따가웠다.

“유정 씨,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기척을 읽는 거라면 강준우도 태경에게 뒤지지 않았다. 아까부터 가까워지던 발소리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는데, 다시 멀어지려 하길래 당장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서 이토록 조심스러울 사람이 그녀 말고는 없으니.

놀라서 어깨를 들썩인 유정이 돌아봤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난처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준우는 의문스러운 눈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뭐 필요한 거라도……?”

유정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목을 손으로 가렸다. 방황하는 눈동자가 사방을 훑다가, 준우의 테이핑 된 발목을 발견하고는 커다랗게 확장됐다.

“아뇨, 그런 건 없는…… 어? 다치셨어요?”

준우는 무슨 소리냐는 듯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리고는 이내 멋쩍게 웃었다.

“아, 이거요? 별거 아니에요.”

“괜찮으세요? 발목은 한번 다치면 계속 그러는데…….”

“에이, 저 통뼈라서 괜찮아요. 그리고 이 정도로 넘어가 준 게 다행이죠.”

유쾌하게 대답한 준우는 순간 움찔했다. 쓸데없는 말까지 해 버렸다는 걸 바로 자각한 탓이었다. 그래서 의아한 그녀의 눈빛을 읽어 놓고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화제를 돌렸다.

“저 친구는 전에도 본 적 있으시죠? 에이든이라는 녀석인데, 미국 놈이거든요. 영어 할 줄 아세요?”

준우는 에이든이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는 점을 이용해 ‘놈’이라고 서슴없이 칭하며 히죽 웃었다. 말을 알아듣진 못해도, 준우가 웃었다는 사실 자체로 에이든은 기분이 나쁜지 인상을 구겼다.

“아, 네. 유창하진 않지만…….”

마카오에서 먹고살려면 영어는 필수였다. 유정은 한국에서 가세가 기울기 전까지는 그나마 영어 과외를 받아 왔어서 아예 못하진 않았다. 물론 대학 입시를 위한 공부였기 때문에 회화가 뛰어나진 않았으나, 마카오에 살면서 많이 는 편이었다.

유정은 신비한 녹안의 에이든을 힐끔 보며 묵례를 했다. 에이든도 고개를 끄덕인 건지 숙인 건지 헷갈리긴 하지만, 어쨌든 인사를 받아 주긴 했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피곤한 듯 창백한 안색과 다른 이들에 비해 마른 체격으로 보아 좀 예민한 성격 같았다. 그리고 바빠 보였다. 인사를 주고받는 현재도 노트북을 끼고 앉아 쉴 새 없이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준우는 어정쩡하게 서서 머쓱함을 숨기지 못하는 유정을 살뜰하게 살피며 물었다.

“혹시 선배님 찾으세요? 저녁쯤에나 올 텐데.”

“아, 그렇구나. 알려 줘서 고마워요.”

내심 태경을 기다리는 참이었던 유정은 그 한마디에 혈색이 좀 돌았다. 준우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가만 보면 유정도 주태경 못지않게 솔직한 것 같았다.

“집은 좀 둘러봤어요? 아직 아는 게 없죠? 저쪽 복도로 쭉 가다 보면 욕실 하나 있거든요.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주방이 있어요.”

준우는 눈치가 정말 빨랐다. 가려운 곳은 죄다 긁어 주었다. 주방이 어디 있는지 듣자마자 격렬한 갈증이 몰려온 유정은 재빨리 말했다.

“고마워요. 그럼 하던 일 계속하세요. 방해해서 미안해요.”

유정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얼른 몸을 돌렸다. 준우는 잰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뒤에 대고 익살스러운 말을 덧붙였다.

“방해는 무슨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편하게 계세요, 편하게.”

안 그랬다간 주태경이 무슨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걸지 모르니까. 준우는 어쩐지 욱신거리는 발목을 들어 올려 손으로 매만졌다. 에이든은 노트북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로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모텔이 아니라고.”

에이든이 불편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자, 준우가 놀란 얼굴로 돌아봤다. 평소 저에 비하면 에이든은 주태경에게 대단히 호의적인 편이었다.

둘 다 세상만사에 관심이 없는 편이라 동족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이라도 느끼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아예 불만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지. 준우의 장난기가 또 발동이 걸렸다.

“부럽냐?”

그 말에 에이든은 인상을 팍 구겼다. 발끈한 게 아니라 신빙성 없는 추측으로 제 수준이 강준우의 수준으로 격하된 느낌이라 기분이 더러웠다. 준우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모른 척 쐐기를 박았다.

“너도 안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나가서 여자 좀 만나.”

퍽 안쓰럽다는 말투였다. 에이든은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짜증을 담아 쿠션을 있는 힘껏 강준우에게 집어 던졌다.

* * *

유정은 1L 생수 한 통을 품에 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썰렁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준우의 쾌활함 덕분에 어색하거나 불편한 점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에이든은 투명 인간 수준으로 조용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가슴을 쓸어내리다 말고, 유정은 정면에 바로 보이는 거울을 통해 제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이내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몇 마디 주고받느라 까맣게 잊었는데, 얼굴이며 목, 팔에 그의 흔적이 너무 선명했다. 아래는 긴바지를 입어 다행이었다. 거기도 성한 곳이 하나 없을 텐데.

유정은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냥 못 들은 척 도망갔어야 했는데. 봤겠지? 뒤늦게 밀려드는 창피함에 생수 통을 꼭 끌어안았다. 다시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긴 팔, 긴 바지로 갈아입겠다고 다짐했다.

바닥에 닿지 않고 허공에 뜬 다리를 흔들며 유정은 방을 둘러봤다. 확실히 이 방이 제일 고급스러웠다. 킹사이즈 침대와 벨벳 커튼, 높다란 천장에 매달린 펜던트 조명이 하나같이 심혈을 기울인 티가 났다. 욕실도 딸려 있고.

아까 욕실의 위치를 알려 준 걸 보면 준우는 이 방에 욕실이 있다는 걸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객식구 주제에 좋은 방을 꿰찬 것 같아 양심에 찔렸다.

무료한 시간은 무척 더디게 흘렀다. 해의 위치가 바뀌고 노을이 질 때까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기란 힘든 일이었다.

태경도 그랬을까. 그 작은 집에서 하염없이 저만 기다렸을까. 갑자기 가슴이 시큰거렸다. 이렇게 긴 기다림인 줄은 상상도 못 하고, 그저 집에 가면 그가 있다는 생각에 저는 기쁘기만 했었다.

한심했다.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건 어쩌면 태경이 아니라 자신일 지도 모른다. 유정은 침울한 얼굴로 침대 헤드에 기댔다.

그즈음, 문이 열리며 그토록 기다리던 태경이 들어왔다. 유정은 조금 전까지 우울해하던 것도 잊고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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