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36)화 (36/83)

36화.

빈민가의 오래된 폐건물을 개조해 만든 임시 거주지 내부는 깔끔했다. 위치 추적기로도 발견할 수 없도록 설계된 곳이었다. 발렌틴의 생존 이후 이광현이 직접 선택했다.

하지만 호화스러운 환경에 익숙한 강준우는 작금의 현실이 못마땅했다. 총 맞고 드러누운 놈이 뭐가 무섭다고 쥐구멍에 숨는 건지. 태경과의 대련에서 곤죽이 되어 발목에 테이핑을 하고도 전투력이 남아도는 준우는 오렌지 주스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거동의 불편함을 짜증으로 해소하며 소파에 앉은 준우는 에이든을 힐긋거렸다. 주태경의 작전 무단이탈로 인해 그가 맡았던 임무는 어쩔 수 없이 팀 전원이 알게 됐다. 그가 싼 똥을 누군가는 치워야 했고, 그 적임자로 에이든이 선택받았다. 아니, 당했다. 부친 감찰이라니.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거부할 수도 있었잖아. 미련하게 그걸 떠안냐, 떠안길.”

말이 좀 퉁명스럽긴 해도, 준우의 우려이자 염려가 아주 듬뿍 담겨 있었다. 뭐가 됐든 크게 개의치 않는 에이든은 역시나 무심하게 대응했다.

“그래서. 지금 위로받는 타이밍이야?”

사실 준우도 형식상 해 본 말에 가까웠다. 블랙스완이면 혈육이고 뭐고 없다. 주어진 임무는 무조건 완수해야 하니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팀장이 무리할 정도로 배려한 거였다. 안 어울리게 감성적이야 팀장은. 겉모습은 무지막지한데.

준우는 샐쭉한 얼굴로 대꾸했다.

“별로야?”

에이든의 떨떠름한 눈길이 준우의 테이핑한 발목에 꽂혔다.

“위로는 네가 받아야 할 거 같은데.”

태경의 솜씨였다. 쌓인 앙금으로 보자면 발목을 부러뜨렸어도 놀랄 일이 아닌데. 다행히 인대만 늘어난 선에서 끝났다. 준우는 뿌듯한 얼굴로 발목을 매만졌다.

저게 지금 뿌듯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하긴, 강준우의 모자란 구석이 한두 군데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었다.

에이든은 냉정하게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그리고 나한테까지 감찰 들어올 수 있으니 업무에서 배제하는 건 사양이야. 열심히 일하잖아. 안 보여?”

에이든은 부친이 이미 비리를 저질렀으니 돌이킬 수 없다는 태도였다. 준우는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선배만큼 정 없는 인간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도 만만치 않다.”

에이든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사람이 정이 없다고?”

정 없는 인간이 발렌틴의 덫을 스스로 밟나. 에이든의 의문이 전염됐는지 준우도 멈칫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석의 큰 침실을 쳐다봤다.

주태경은 여기에 서유정을 신줏단지처럼 모셔 놨다. 신변 보호를 위해 특수 경호 명령이 내려지긴 했지만, 태경이 주장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신속하게 결정되진 않았을 터였다.

* * *

유정은 억수 같은 비를 쫄딱 맞고, 씻지도 못한 채 곧장 홍콩으로 왔다. 태경도 젖은 건 마찬가지였다. 이동 수단은 헬기였다. 그는 커다란 담요로 감싼 유정을 꽉 끌어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격정적으로 부둥켜안으며 상황이 일단락되긴 했지만 그건 감정에 휩쓸린 것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보이지 않는 갈등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그는 뭐가 됐건 유정의 상황을 고려하여 설명한 후 그녀의 의견을 묻고 진행했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려 주지 않았고. 간간이 하는 말들도 마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늘 한결같이 다정하면서도 헌신적이었지만, 일정한 간격 너머에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차재이를 만나러 항구에 간 일을 계기로, 의도하진 않았으나 그의 감정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결국에 목이 졸린 사람처럼 힘겹게 자신의 감정을 토해 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은 것처럼 유정의 심장은 요동쳤다.

하지만 그의 행동이 여전히 석연치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흥분했는지, 돌발 행동의 이유가 무엇인지 듣지 못했다. 그가 품은 마음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이 없지만, 사랑에 대한 확신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벽은 존재했다. 그의 고백은 고백이 아니라 차라리 포기 같았으니까.

헬기에서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원했지만, 다시 가면 너머로 사라졌다. 유정은 그가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총을 겨누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제가 살던 집과 비교조차 안 될 만큼 넓은 공간에 들어와서도 유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짐이라도 빨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캐리어를 돌아봤는데, 그만 몸이 굳고 말았다. 태경이 그녀의 뒤에서 시커먼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거실을 가로질러 올 때, 분명 광현이 그를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그녀가 가 봐야 하지 않냐는 눈빛으로 돌아보자 태경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사용할 방을 가리키며 재촉을 했었다. 그래서 따라오지 않을 줄 알았던 터라 유정은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그녀에게 태경이 다가와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목소리가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오해였다면서. 그럼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

유정은 고개를 푹 떨궜다.

“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유정은 바지 자락을 움켜쥐었다.

“오해하게 만든 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난…….”

고개를 들고 유정이 그를 응시했다.

“난 묻고 싶어요. 항구에서…… 왜 그랬어요?”

“…….”

“왜 태경 씨 자신에게 총을 겨눈 거예요? 왜…….”

그녀는 그가 다치는 게 무엇보다 두렵고 무서운데. 태경은 자기 자신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야속하고 서운했다. 그의 엄지가 젖어 드는 눈가를 훔치고 지나갔다. 계속하라는 듯 시선도 피하지 않고. 그것으로 유정은 용기를 얻었다.

“아무리 오해가 있어도 그러면 안 돼요. 너무 나빴어요.”

어느새 그가 유정을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등이 차가운 벽과 맞닿았다. 그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가 뱉은 말은 즉, 이유가 뭐든 감정을 표출하지 말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안 그래도 감정 표현이 없다시피 한 사람인데, 너무 가혹한 투정이었다. 유정은 아차 싶은 마음에 정정하려고 했지만, 그의 거침없는 움직임에 가로막혔다.

단단한 허벅지가 유정의 다리 사이로 단번에 침투했다.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경직됐다. 태경이 유정의 눈높이에 맞게 몸을 구부려 입술을 덮었다. 그녀의 입술은 비를 맞아 차갑게 식었는데, 똑같이 비를 맞은 그의 입술을 기이할 정도로 뜨거웠다.

“유정 씨.”

무언가가 범람하듯 그의 눈이 일렁이는 것을 발견한 유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못돼 먹었거든요, 나.”

“…….”

“유정 씨는 날 따듯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사실 난 그렇지 못해서 유정 씨가 필요해요.”

그의 새까만 눈은 이제 기묘한 갈망을 확연하게 드러냈다. 유정은 온몸의 솜털이 섰다. 그가 자신을 원한다는 말이 가진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태경이 그녀의 생각만큼 부드러운 남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챈 지 오래였다. 동료들이 시시때때로 그의 눈치를 보는 데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장벽이 되진 못한다. 태경의 냉혹한 기질이 저만 피해 간다는 사실은 두렵지 않고 오히려 기꺼웠다. 그것이 이기심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잠깐 품었던 서운함이 침몰했다. 유정이 떨리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붙어 있는 입술을 더 꾹 눌렀다. 그가 눈썹을 휘며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갈급하게 그녀의 윗입술을 사리물었다.

유정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도발에도 속수무책으로 끌려와 주는 그의 반응이 좋았다. 태경이 그녀의 머리와 허리를 끌어당겨 게걸스럽게 입술을 집어삼켰다. 격렬한 흥분과 비이성적인 욕정에 휩싸인 혀가 난잡하게 안을 휘저었다.

유정은 정신이 아찔했다. 잠깐이나마 그가 이성을 잃었다는 사실에 들떴지만, 막상 태경의 이성이 완벽하게 무너진다면…….

생각의 범위가 예측 불가한 지점까지 넓혀 가다가 뚝 끊겼다. 두 다리가 허공에 붕 뜬 탓이다.

“샤워는 해야죠.”

그가 유정을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두 다리 다 멀쩡하니 안겨서 갈 이유도 없는데. 하지만 만류하기도 전에 이미 욕실에 도착했다. 그는 상대적으로 너른 욕조를 두고 굳이 비좁은 부스 안에서 유정을 내려놨다. 이어서 곧장 그녀의 티셔츠 끝을 잡고 올리자, 유정은 얼떨결에 팔을 들었다.

순식간에 상반신에 브래지어만 남았다. 대담하게 먼저 입술을 지분거릴 땐 언제고, 유정은 부끄러움에 눈을 내리뜨며 시선을 피했다. 제 눈을 가리면 상대방도 모습이 안 보이는 줄 아는 아이 같았다.

물론 헛수고였다. 태경의 뜨거운 시선이 이마부터 코, 입술을 지나 쇄골과 가슴 언덕까지 차례대로 훑어 내렸다. 눈길이 닿은 부위는 죄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녀는 저절로 다리를 배배 꼬았다.

그 모습을 숨죽이고 보는 태경의 눈이 정욕으로 번들거렸다. 허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다. 눈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곧 그가 입을 맞춰 왔다. 아까처럼 조급한 느낌은 없었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농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