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35)화 (35/83)

35화.

집에서 보낸 메시지를 보고 있는 거 같아 마음이 아픈 유정이 멈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결이 거친 바닥과 단화가 끌리는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든 재이가 유정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재이가 한달음에 유정에게 다가섰다.

“잘 생각했어요. 유정 씨.”

유정은 망설임은 접어 두고 재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뗐다. 어설픈 것이야말로 정말 미안한 짓이었다.

“재이씨. 저는…….”

“……유정 씨. 잠시만요.”

재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유정의 팔을 잡아, 그녀를 제 뒤로 밀었다.

영문도 모른 채 시야가 가로막힌 유정이 조금 옆으로 나와, 앞을 바라봤다. 그녀의 동공이 바들거리며 확장됐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새 푸른빛이 많아진 새벽 사이로 주태경이 천천히 걸어왔다.

동화처럼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빗속의 태경이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려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남자는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청아했지만, 아래로 내리깐 눈동자가 위로 도르르 올라갈 때는 영락없는 짐승이었다. 그와 유정의 시선이 무질서하게 부딪쳤다.

“……어디까지 뒤흔들어 놓을지 궁금하네.”

분명히 그녀에게 하는 말이었고, 마지막엔 작은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날 떠나서 그 남자한테 갈 거예요?”

“…….”

“그래요. 그렇게 해요.”

철컥-.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가 팔을 일직선으로 뻗었다. 손아귀엔 차갑고 무거운 권총이 들렸다. 총구 끝에 빗물이 내려앉았다.

“그 대신 그 남자 죽이게 해 줘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다정하고 우미한 말씨였다.

재이가 놀라서 뒤로 물러서자 유정도 순간 움찔하며 뒤로 주춤했다.

태경의 시선이 주춤 물러선 유정의 단화로 내려갔다.

아무리 살을 부대끼며 살아도 누군가를 완전히 소유하는 건 무리다. 그 빌어먹을 섭리를 누가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도 그는 생존 본능처럼 습득했다.

인간은 타인을 아무리 끼고돌아도 수틀리면 돌변한다. 열악한 보육원 환경이 무색할 정도로 귀티가 난다는 둥 아이답지 않게 의젓하다는 둥 지역 신문에 오를 영재인 걸 떡잎부터 알아봤다는 둥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것들이 어떻게 변했나.

위고 아래고 고아 새끼라며 나불대는 놈들을 몇 번 때려눕혔다고 무슨 깡패 새끼 보듯 했다. 영재 소리가 지겨워 두어 번 시험지를 백지로 냈더니 그들의 눈에 뚜렷한 혐오감이 서렸다. 그 무렵 또래보다 큰 체격도 더는 칭찬거리가 되지 않았고.

갱생시키겠다고 교회며 성당, 절에 데려다 놔도 그는 신에게도 안주하지 않았다.

그게 본능인 걸 어째. 그는 탯줄 끊을 때 뇌의 일부도 도려내진 듯 사람과 사랑을 믿지 않았다. 공감한 적도 없고.

이번엔 달랐다. 해도 뜨기 전에 집 밖으로 기어나가는 걸 보며 당장 주저앉히고 싶은 심정을 누르느라 애를 좀 먹었다. 한마디 언질도 없이 그녀가 떠났다. 함께 홍콩으로 가기로 한 날 아침에. 버젓이 다른 놈의 옆으로.

왜? 차재이 쪽이 더 구미가 당겼나? 대체 어떤 면에서?

태경의 심장이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포악하게 날뛰었다. 유일하게 서유정의 마음엔 의문이 없었다. 같잖은 믿음이란 게 있었나 보지. 저 애송이의 함께 떠나자는 제안에도 그녀의 선택은 당연히 나일 줄 알았는데.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어리석었지.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쉽게 변질되고 옮겨 가는 하찮은 감정인데. 이번엔 그 상대가 서유정일 뿐인데도 속이 드글드글 끓었다.

약속했잖아. 날 따라오겠다고.

아무 힘도 없고 쓸모도 없는 약속 따위를 들먹인다는 게 우스웠다. 빌어먹게도 아팠다. 심장이 끊어질 듯 조여들었다.

배신감.

어이없고 낯선 감정의 파편이 시시각각 목을 압박해 왔다. 누굴 믿어 본 적이 있어야지 내성이 있을 텐데 그는 처음으로 무력감에 허우적거렸다.

이 좆같은 느낌을 어떻게 해야 하지. 며칠째 켜켜이 쌓인 혼란스러움이 번졌다.

태경의 미간에 빗물이 고였다. 눈을 깜빡거리자 그게 눈물처럼 흘렀다. 그저 놀란 눈을 부릅뜬 유정이 보였다.

그는 스산하게 웃었다. 총을 가볍게 고쳐 쥐고 총구의 방향을 유정에게 틀었다.

그랬지. 저 여자는 제가 죽을 위기에서도 구해 달라고 하지 않고 나더러 도망치라고 했었지.

태경이 돌연 총구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겨눴다. 경악하는 그녀에게 보란 듯이 피부 가죽을 쑤셨다.

이제 알겠어요? 가면 죽이겠다는 시답잖은 협박이 아니라, 가면 내가 죽겠다고.

유정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냉정한 얼굴로.

“태경 씨!”

그녀는 턱이 달달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너무 놀라서 굳어 버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물기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자칫 그의 몸짓을 놓칠세라 재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빗물과 함께 눈물이 줄줄 흘렀다.

뭐가 그를 이렇게 만든 걸까.

태경은 사람 목숨을 함부로 쥐락펴락하는 잔인한 사람이 아닌데. 그래서 발렌틴이라는 잔인무도한 자에게서 어떻게든 떨어뜨리기 위해 발버둥 쳤던 건데.

그녀는 입술을 아리도록 깨물었다. 필사적으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제대로 서 있는 태경이 시야에서 마구 흔들릴 정도로.

“태경 씨, 하지 마세요. 이 총 내려놓으세요. 네?”

유정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높이 치켜들고 그의 팔뚝을 잡고 매달렸다. 미동도 없이 눈을 내리뜨고 쳐다보는 태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그가 이렇게 돌변했을까. 내가 뭘 어쨌다고.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매번 태경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처신 똑바로 하라고 화를 내고 다그칠 법도 했는데. 그는 한 번도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다. 한결같이 다정했다.

폭발할 만하지. 이유가 뭔진 몰라도 그가 이러는 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급기야 유정은 그의 팔뚝을 끌어안았다. 태경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벌벌 떨었다. 말릴 수 없으면 어쩌나. 불안감과 초조함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태경은 그녀의 떨림이 옮겨 붙어 가늘게 진동하는 제 팔을 스윽 쳐다봤다. 비에 젖어 미역처럼 늘어진 긴 머리카락 사이로 시체처럼 허연 유정의 피부가 언뜻 보였다.

그악스럽게 수축됐던 팔 근육에서 거짓말처럼 힘이 빠졌다. 그가 팔을 떨구듯이 내렸다. 총구가 바닥을 향했다. 그러자 유정이 총을 뺏으려고 황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에 태경의 손아귀 힘이 완전히 풀리며 총도 바닥을 굴렀다. 빈손은 유정의 손목으로 채웠다. 손에 잡히자마자 끌어당겨 가냘픈 몸을 품었다.

“이럴 거면서 왜 가려고 했어요?”

그의 목소리가 수렁에 빠진 것처럼 억눌렸다. 유정은 직감적으로 그가 지난밤 일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심장이 급박하게 뛰었다. 그에게 안겨 있지 않았더라면 비이성적인 불안감에 정말로 터졌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해예요. 가지 않겠다고 말하러 온 거예요.”

유정은 고개를 들어 파랗게 질린 입술을 열고 절실하게 눈을 맞췄다.

“정말이에요.”

태경은 희미하게 안색을 굳혔다. 그의 입에서 하, 헛숨이 터졌다. 병신같이 잠깐 숨 쉬는 것마저 까먹고 있었다. 뒤늦게 들이마신 숨이 늑골을 짓눌렀다. 유정은 무서울 정도로 차분한 얼굴을 허겁지겁 살폈다. 동요하지 않는 그가 경계심 많은 야생 동물처럼 보여 가만히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동공에 가슴이 아렸다. 그의 먹물처럼 짙은 머리카락에서 툭, 떨어진 빗물이 그녀의 미간에 고였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게 사랑이라면.”

그녀의 꺾인 시야에 들어온 태경의 얼굴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묻어났다.

“사랑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그의 기분은 더 바닥에 처박혔다.

고작 오해였다고. 그녀가 거절을 위해 비운 잠깐의 시간조차 못 참을 정도로 제 인내심은 바닥이었다.

말이 잠깐이지, 감정이 한계까지 몰리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의심, 배신감, 안도감. 감정이 미친 듯이 널을 뛰었으니.

일순간 들끓던 고삐 풀린 집착과 추잡한 소유욕. 태경은 서유정에 한해서는 자신의 인내심이 형편없음을 새삼 실감하며 이를 갈았다.

“태경 씨…….”

피를 토하듯 사랑을 말하는 그의 눈동자는 왜인지 황폐했다. 유정의 목소리는 울음기가 섞여 어눌했다. 큰 덩치가 제 목덜미를 파고들자 충만감에 몸이 다 떨렸다. 그녀는 거물거물한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날카로운 것에 긁힌 것처럼 따끔거리고 욱신거렸다. 저를 낳고 기른 모친에게서도 일생 듣지 못한 말이었다. 그 결핍에 무뎌져서 이제는 누군가의 사랑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정말 받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 것도 같았다.

하지만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게 가득 채워졌고, 한편으로는 또 무너져 내렸다.

유정은 덜덜 떨리는 두 손을 세워 겨우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는 놀랍도록 뜨거웠다.

“……저도요.”

겨우 대답을 뱉어 낸 그녀는 무심코 태경의 허리께를 꽉 움켜쥐었다. 볼썽사납게 갈라지는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저도요. 태경 씨.”

차가운 비를 맞고 굳어진 유정의 몸이 마구 떨렸다. 목덜미에서는 난폭하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유정은 본능적으로 까치발을 들었고, 곧장 강철 같은 두 팔이 그녀의 몸을 사슬처럼 휘감았다.

차재이는 허탈감과 무력감을 동시에 느꼈다. 잔혹한 남자라, 역시나 제 목숨을 빌미로 착한 그녀를 현혹하려 한다고 생각했는데. 다 틀렸다. 유정은 남자를 받아들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무모할 정도로. 마치 상처 입은 거대한 짐승을 그녀가 보듬은 것 같았다.

둘은 서로에게 굶주린 듯 허겁지겁 끌어안았고, 폭우조차 갈라놓지 못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몸이 고장 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남자는 비정상인데. 자기 목숨조차 볼모로 삼아 그녀를 묶어 둘 정도로 광기 어린 집착을 보이는데.

달리 막을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는 예감.

지독한 패배감과 실망감에 휩싸인 차재이는 비틀비틀 몸을 돌려세웠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귀를 때렸다. 재이는 파도에 떠밀리는 난파선처럼 밀려 나갔다.

유정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태경이 눈을 치뜨고 차재이를 응시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총과 차재이가 한 프레임에 담겼다. 순간 그는 더욱 팔을 조였다. 유정이 제 품으로 속절없이 끌려 들어오는 게 말도 못 하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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