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그래서 그 일 때문에 나 당분간 홍콩에서 지낼 거 같아.”
“왜?”
“일이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진 가장 안전한 곳에서 지낼 거래.”
“같이 사는 거야?”
“응.”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널 책임져야지. 근데, 하. 진짜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지아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숨을 길게 내뱉자, 유정이 안심시키려 작게 웃었다.
“괜찮아. 걱정 마.”
“아니, 뭐. 나도 이제 홍콩 가 봐야 하긴 하는데…….”
미심쩍은 눈빛으로 유정을 보던 지아가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참! 차재이가 나한테까지 찾아와서 너 엄청 걱정했는데. 이걸 어떻게 전해? 전부터 느꼈지만 걔 역시 너 좋아하는 거 같은데.”
지아가 알고 있었단 사실에 놀란 유정이 눈을 깜빡였다.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네가 고용인 아들이라고 선 그어서 그렇지 걔는 쭉 표현했지. 나까지 알 정도면.”
“아아…….”
“아까 들렀을 때 못 봤어? 연락이라도 해 봐. 진짜 발 동동 구르면서 걱정했으니까. 아, 이제 남자한테 연락하는 건 좀 그런가? 내가 전해 줄게.”
“응.”
대답 후 차분히 시선을 내린 유정은 고용인 아들이라 선을 그었다는 지아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했다. 그가 착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라고는 느껴져도, 절대 이성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이성적으로 봐 왔다는 걸 알게 된 순간에는 그녀의 마음에 자리한 사람이 있었다.
생각에 잠긴 유정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목걸이를 매만졌다.
유정을 빤히 보던 지아가 뒤늦게 그녀의 목걸이를 인지하고는 대번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 목걸이는!”
버릇처럼 매만지던 유정이 고개를 숙여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펜던트를 쳐다봤다.
“태경 씨가 선물한 거야.”
그 순간을 떠올리기만 하면 아직도 꿈결같이 느껴졌다. 살짝 축축한 습도, 반짝이는 야경, 캄캄한 밤을 배경으로 서 있는 태경. 함께 나눴던 대화까지 행복해, 현실 같지 않았다.
“내가 큐빅은 딱 알아보는데, 이거 큐빅 아니다?”
펜던트를 조명에 비춰 보던 지아가 부럽다는 듯 유정의 어깨를 툭, 쳤다.
“남자가 보는 눈은 있네. 너랑 잘 어울려. 아니, 사랑하는 거 아니라더니 뭐야?”
지아가 이해 안 간다는 듯 한쪽 눈썹을 휘었다.
“게다가 애지중지하니까 그 나쁜 새끼가 널 뺏어 간 거 아니야? 그 남자의 약점이 너라는 걸 아니까.”
……약점.
별생각 없이 뱉은 지아의 말에 유정의 마음 위로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 * *
호텔로 데리러 온 태경과 집으로 돌아온 유정은 이부자리를 깔면서 아주 오랜만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폭풍 같은 일이 지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듯하여 뭉클해졌다. 이 좁고 열악한 집이 태경과 함께했던 기억들 때문에 그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다.
개흙에 발이 빠진 것처럼 살던 집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낸 유정은 태경의 베개를 반듯하게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의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돌아서는데 협탁에 놓인 핸드폰이 짧게 진동을 울렸다. 유정은 핸드폰을 들어 연락을 확인했다.
[집 앞인데 잠깐 나와 줘요.]
재이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지아가 말해 준 모양이었다.
부담스럽게 느낄까 봐 전화도 잘 안 할 만큼 배려심 깊은 사람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온 걸 보면 급한 일이 분명했다.
멈칫한 유정은 욕실을 힐긋 쳐다봤다. 물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걸 보니 태경은 아직 씻는 중인 것 같았다.
유정은 핸드폰을 챙겨 들고 현관을 나섰다. 어쩌면 그가 지아보다 더 걱정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더 좋아하는 마음을 잘 알게 된 그녀기에 할 수 있는 공감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대문 밖으로 나간 유정은 담벼락에 기대선 재이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재이 씨.”
고개를 떨구고 있던 재이가 유정을 바라봤다. 그녀를 마주하자, 불안해 보이는 그의 눈에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유정 씨! 정말 무사했네요. 다행이에요.”
유정의 양어깨를 잡은 재이가 정말 다행이라는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굳어진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서요.”
“아, 네. 아무래도 결혼식 테러 사건 때문에 다들 걱정 많이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유정 씨.”
“네?”
“정말 아무 일도 없던 거 맞아요?”
유정이 깜짝 놀라 눈만 깜빡이자, 재이가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내가 그랬잖아요. 그 남자 위험하다고. 이번에 유정 씨 사라졌던 거 그 남자 때문인 거 맞죠?”
“…….”
“유정 씨한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예요?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제가 도와줄게요.”
“오해가 아직 안 풀린 거 같은데 위험한 사람 절대 아니에요……. 그 사람, 군인이거든요.”
재이는 유정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는데, 그녀라고 쉽게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유정 씨. 고민해 봤는데, 당분간 머물 곳 마련해 줄게요. 심청에 렌트한 집이 있어요.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모르지만, 또 그런 일이 없을 거 같아요?”
유정은 순간, 지아의 말이 떠올라 머리가 멍해졌다.
그런 일이 있으면 나는 또 휩쓸릴 수밖에 없을 텐데.
옥에 티처럼, 저가 그의 약점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내일 오전 5시 항구 터미널 바깥에서 봐요.”
“재이 씨. 나는 재이 씨를 좋아할 수 없어요. 그런 마음이 아니에요.”
“알아요. 그래도 지켜만 볼 순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후회했다. 조금이라도 더 욕심내 볼걸. 본질이 위험한 사람인 걸 알았으면 끝까지 말려 볼걸.
재이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유정을 바라봤다.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탁-.
재이가 마지막 말을 꺼내는 순간 뒤편에서 들리는 소리에 유정은 뒤를 돌아봤다. 오래된 플라스틱병이 바람에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내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 유정은 점차 멀어지는 재이를 부르려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터덜터덜 집 문 앞까지 돌아오는 동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태경 씨가 애지중지하는 게 나라서? 그래서?
‘주태경 씨한테 난 딱히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납치범에게 했던 자신의 말이 물음표로 돌아왔다.
“……!”
새것으로 바뀐 문을 어색하게 여는데, 현관문 안쪽에 태경이 서 있었다.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한 발자국 뒷걸음질 친 유정이 뒤늦게 문을 닫고 들어섰다.
“아, 다 씻었어요?”
“어디 갔다 와요?”
유정이 질문을 했는데 태경도 질문했다.
움찔한 유정이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아……. 그냥 잠깐 밖에 나갔다 왔어요.”
선뜻 솔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재이 씨를 안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유정은 뺨에 지그시 닿는 눈빛을 느끼고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손목이 휙 잡아당겨지더니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감정 조절에 능숙한 편인데 조절이 안 돼.”
“…….”
“유정 씨는 내가 원하는 것이라 그래요.”
목 안을 깊게 울리며 나온 저음이 나중엔 본능을 억누르듯 차분했다.
어둠 속에서 또렷이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가슴이 미세하게 떨린 유정은 그에게 잡힌 손목이 델 것만 같았다. 거짓이 아닌 온도였다. 그랬기에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태경 씨. 태경 씨는 여전히…….”
“…….”
“……아니에요.”
유정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폭 감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듯 얼굴을 숙였던 태경이 키스 대신 제 품 안에 그녀를 안았다.
“내일 아침에 가는 거예요.”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에 유정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커다란 손으로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던 태경이 그녀를 이불로 이끌었다.
다정한 손길이지만 거기서 더 깊어지진 않았다. 태경은 먼저 눕힌 유정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옆에 누웠다. 방 안이 어두워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 알 수 없었다.
유정은 그를 바라보고 누운 자세로 눈을 꾹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하얀 아지랑이가 일었다. 도통 잠들 수 없었다.
무시하려 했지만 협탁에 놓인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결국 잠을 설친 유정은 어스름한 새벽에 눈을 완전히 떴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잠든 태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그녀는 핸드폰을 먼저 찾았다.
오전 4시 30분.
유정은 괜히 마음이 초조해져, 재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재이 씨. 항상 저에게 잘해 주시고 관심 주셔서 고마웠어요. 이번에도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못 갈 거 같아요. 미안해요.]
보내 놓고 나니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듯싶었으나, 점차 더 신경이 쓰였다.
재이가 많이 걱정했다는 지아의 말,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재이의 말.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서 다른 생각을 했던 것까지 전부 마음에 걸려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제 못 볼 수도 있을 텐데. 평소 그가 마음 써 준 것을 생각하면 이래서는 안 됐다.
유정은 결국 조심히 몸을 일으켜 신발장으로 갔다. 단화를 신고 태경을 살피자 미동조차 없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드는 점이 의아했는데, 며칠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조금 안도한 유정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둑한 새벽인데도 느껴질 만큼 날씨가 흐렸다. 곧 비가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하늘이었다. 비라도 맞으며 기다렸으면 어쨌을까. 유정은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항구로 향했다.
오전 5시에 맞춰 도착한 터미널에는 새벽인데도 사람이 꽤 있었다. 유정은 바깥으로 나가, 투박한 시멘트 바닷길을 걸어 나가며 재이를 찾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재이를 발견했다. 재이는 침울한 얼굴로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