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33)화 (33/83)

33화.

훈련장은 무슨 한증막처럼 더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링 위에는 오랜 시간 스파링을 했는지 땀으로 흥건한 강준우가 지칠 대로 지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대련 상대인 주태경은 어이없을 정도로 멀쩡했다. 땀은커녕 어느 때보다 보송한 피부였다. 그는 안쓰러울 정도로 숨을 헐떡거리는 강준우를 일격에 쓰러뜨리고, 동시에 종아리를 팔로 감쌌다. 뭘 할지는 뻔했다. 토 홀드 기술을 걸고 있었다.

태경이 새끼발가락부터 압박을 가하는 순간, 준우는 필사적으로 탭을 쳤다. 통증을 느끼는 순간부터 발목이 나가는 기술이었다. 광현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링의 난간을 움켜쥐었다. 안타깝게도 태경은 그대로 힘을 가했다.

“윽!”

강준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순간, 광현이 이를 갈듯이 외쳤다.

“주태경!”

고개를 든 태경이 손에서 힘을 풀고 몸을 세웠다. 그러자 준우의 다리가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거칠게 숨을 고르는 소리가 이어지는데도, 태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빨리 왔네요.”

“…….”

“에이든이 질렸다는 낯짝으로 나가길래 올 줄 알았죠.”

그러니까 이광현의 훈련장 방문을 의도했다는 거다. 풀리지 않는 앙금을 이런 식으로라도 해소하겠다는 거였다.

“올라와요. 한 수 배워 보게.”

그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광현은 알 만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저 성질머리에 블랙스완 팀을 나가도 골백번을 나갔을 텐데. 발렌틴의 기사회생으로 팀에 잔류하는 선택을 했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화풀이는 해야 했겠지.

다리를 질질 끌고 내려오는 준우도 홀가분한 눈치였다. 광현은 몇 대 맞아 줄 생각으로 글러브를 끼고 올라갔다.

링에 들어서자마자 스트레이트가 훅 들어왔다. 광현이 무자비한 공격을 가까스로 피하고, 곧장 펀치를 날렸지만, 태경도 가뿐하게 피했다.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풀지. 준우는 왜?”

“서유정 혼자 보낼 거였으면 강준우 쓰라고 하지도 않았지.”

확실히 이광현은 그를 속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입 다물고 있던 것도.”

태경의 공격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러면서도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전부 신경이 쓰여서.”

오픈 핑거 글러브를 낀 주먹이 광현의 오른쪽 뺨에 박혔다. 그래. 박혔다는 표현이 맞았다. 타격감에 광현의 방어 자세가 흐트러질 정도였으니.

태경은 그대로 남은 주먹도 꽂아 넣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잠이 안 오잖아요.”

퍽, 하고 묵직한 타격음이 터졌다. 배를 얻어맞은 거구의 광현이 뒤로 완전히 밀려났다. 광현은 입 안에 고인 피를 침과 함께 퉤, 뱉어 냈다. 태경은 무표정으로 손을 까딱였다.

“일어서요.”

광현은 혀로 아랫입술을 훑으며 말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이용하는 게 평소 네 머리에서 나오던 거 아니야?”

태경은 험악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 여자가 너한테 뭔데.”

광현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에 설명을 요구하는 어조였다.

태경의 매서운 시선이 광현에게 박혔다. 흘러내린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며 흐트러진 숨을 골랐다. 광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찰나조차 놓치지 않을 기세로 응시했다. 하지만 태경에게서 뚜렷한 감정을 발견할 수 없었다. 감정은커녕 고개를 삐딱하게 내리며 건조한 말투로 빈정거릴 뿐이었다.

“뭐겠어.”

태경이 글러브를 벗어서 던져 버리고는 트랙 재킷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그대로 링에서 내려가 훈련장 문짝을 뜯듯이 열고 나가 버렸다.

광현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훔치며 반동으로 여닫히는 문을 쳐다봤다.

“저 새끼가 진짜 온 힘을 다해서 때렸네.”

용병 시절 동료들과의 대련에서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맞은 적은 없었다. 광현은 기가 막힌다는 듯 통증을 덜어 내기 위해 머리를 기댔다.

유정의 집 근처가 어수선했다. 검은 복장의 사내들이 다세대 주택을 헤집고 다니며 검문하듯 수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유정이 발렌틴에게 납치당한 후 안 그래도 동네에 흉흉한 소문이 돌던 터라 대문 밖으론 쥐새끼 한 마리도 돌아다니지 않았다.

쾅-!

발소리도 내지 않는 사내들 사이로 2층 문이 거칠게 열렸다. 노후된 문이 덜컥거리는 것도 무시한 채 밖으로 나온 주태경의 손에 서류들이 들려 있었다.

검은색 양가죽 장갑 안에 구겨진 서류들은 고액의 집세로 1층 집을 싹 비운 증거들이었다.

단 하루를 머물러도 그는 대충 처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간이 저답지 않게 느슨했던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유정에게 주워져 왔을 때부터 했어야 할 일이었다.

이제 조금의 방심도, 틈도 없다.

아무렇게나 들고 있던 서류를 지나가는 사내에게 넘긴 그가 철제 계단을 쿵쿵 내려왔다.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익숙한 집 문 앞에 가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다른 곳은 다 뒤져도 유정과 살던 곳만큼은 손대지 못하게 했던 태경은 문틈 사이로 몸을 넣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릎을 굽혀 상체를 숙인 그가 손가락을 뻗어, 방바닥을 훑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검지와 중지를 확인하는데 까만 가죽 위로 뿌연 먼지가 묻어 있었다.

몸소 쓸고 닦고 했던 짓들이 무색하게 며칠 비웠다고 먼지가 쌓였다.

쯧, 혀를 찬 태경이 몸을 뒤로 돌려 신발장 밖으로 나왔다. 다른 노후된 문과 다를 바 없이 고장 난 문을 힐긋 보던 그가 커다란 손으로 문을 틀어잡았다. 힘 있게 잡기만 했는데도 문이 덜컹거렸다. 그대로 경첩을 발로 차니, 쿠쿵, 소리가 나며 분리됐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안 들던 것을 기어코 부순 그는 그대로 부서진 문을 집고 모퉁이를 돌았다.

그런데 그 순간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차재이였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나름 숨어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애초에 하루 머물기 위해 부지런 떠는 것도 혹시 모를 잠복을 대비하기 위함이었기에 오고 가는 주민들을 막지는 않았었다. 그러니 그의 행동은 쓸모없는 짓이었다.

태경은 오해하고 있는 눈빛의 재이를 보며 잡고 있던 문짝을 옆으로 쿵, 던졌다. 모래 먼지가 안개처럼 퍼졌다.

바닥에 떨어진 뜯어진 문을 보던 재이가 턱관절에 힘을 주며 다시 태경을 쳐다봤다.

유정이 사라진 직후, 체구가 거대한 남자들에게 집 앞에서 납치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부터 걱정되는 마음에 매일 집 앞을 찾아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그녀의 마음을 바꾸고자 하는 행동이 추한 이기심으로 느껴져 너무 쉽게 포기한 건 아닌지. 그래서 결국 그녀가 위험한 일에 처하도록 방관하게 된 건 아닌지.

재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위험의 배후가 누군지 짐작이 갔고, 지금 그 당사자가 눈앞에 있는 순간,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남자의 본모습을 모른 채 끝까지 속았다.

“유정 씨 집에서 뭘 한 거예요. 유정 씨는 어디 있어요?”

태경은 들리지도 않는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려 앞으로 지나쳐 갔다. 비어 있는 집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부하를 손가락으로 까딱하며 지시했다.

“문 없는 곳 도어 록으로 새로 달아 놔.”

“네. 알겠습니다.”

깍듯한 대답과 함께 남자가 사라지자, 태경은 건물 옥상을 올려다봤다. 옥상에서 사라진 남자와 비슷한 복장의 남자들이 분주히 뭔가를 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단숨에 투명 인간 취급을 받은 재이는 주먹을 움켜쥐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왜 대답을 못 하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요. 서유정 씨 이용해서 어떤 나쁜 짓을…….”

“내가 뭘, 이용해?”

그가 재이의 말을 끊고 반응했다.

몸을 반쯤 돌려 쳐다보는 그에게서, 공포에 질려 있던 사람들을 떠올린 재이는 숨을 골랐다.

“자꾸 말 돌리면 한국에 신고할 거예요. 그러니까 유정 씨 어떻게 했는지 말해요.”

태경이 시선을 올려 허공을 배회하다가, 지겹다는 듯 눈을 내려 재이를 쳐다봤다.

“집에서 부려 먹던 여자를 동정이라도 하는 건가?”

재이가 놀란 듯 눈을 키우며 입술을 짓씹었다. 단연코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없기 때문에 거침없는 그의 표현이 불쾌했다.

“이제 일 그만뒀으니까 네 부모한테 전해.”

태경은 기다란 눈매 끝을 구부렸다.

“호의 좀 베풀었다고 뭐라도 되는 줄 알지.”

“말 돌리지 말고 유정 씨 어딨냐고요!”

“예쁘게 모셔 두고 나쁜 짓 하는 중인데.”

나붓이 들리는 낮은 음성에 믿기 힘들다는 듯 재이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무슨 상관이지?”

그는 별 같잖은 사람의 오해를 풀어 줄 만큼 아량이 넓지 않았다.

* * *

태경이 집 근처 반경 3km까지 샅샅이 뒤진 사실을 모르는 유정은 유난히 주변이 조용한 것과 집이 비어 있던 것치곤 깨끗한 점을 의아해하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직장과 친구 때문에 딱 하루만 있는 것이기에 도착 직후 계속 밖에만 있기에 바빴다.

마주치는 아는 사람마다 모두 놀라기 일쑤였고, 유정은 갑자기 크게 아파서 한국에 잠깐 돌아갔었다 둘러대며 진땀을 뺐다. 그러다 그 누구보다 깜짝 놀라고 방방 뛰는 지아를 만나서는 사실대로 말했다.

“세상에. 안 그래도 성당 결혼식 사건 때문에 말이 얼마나 많았는데. 진짜 납치당했었다고?”

“태경 씨한테 앙심 품은 사람 짓이었어.”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에 할 말을 잃은 지아는 유정의 이곳저곳을 만져 보며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너 괜찮아?”

“응. 멀쩡해. 나를 해하거나 그러진 않았어.”

“그래도 그렇지! 그 남자 계속 만나도 되는 거야? 이런 일이 또 있는 건 아니고?”

지아가 걱정스러운 듯 묻자, 유정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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