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31)화 (31/83)

31화.

“…하지만…… 서유정 씨, 위험했습니다. 우릴 위해서 협조해 줬는데…….”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준우는 단지 가정일 뿐인데도 아찔했다. 물론 장기적인 위험에 노출될 바에야, 이편이 서유정에게 나은 선택일 터였고, 팀의 입장에서도 미끼를 던져 낚아채는 그럴듯한 작전이 될 수 있었다.

그래. 이성적으로는 그랬다. 작전에 투입된 이들도 그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태경이 동의할지는…….

“선배님, 객실에 틀어박혀서 안 나옵니다. 서유정 씨도 정신을 차렸는지 알 수가 없고요.”

“둬. 내가 면담해.”

주태경도 주태경이지만, 준우는 가끔 광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워낙 말수도 적고, 힘든 내색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특유의 우직함은 그 제멋대로인 태경마저 광현의 말을 그나마 듣는 시늉이라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인해 사이가 틀어질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준우가 걱정이 태산인 얼굴로 상황실을 나왔다.

* * *

유정은 선잠 속에서 악몽이라도 꾸는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꿈에서 도피하듯 눈을 번쩍 들었을 때, 다행히 태경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반갑게 웃으려던 유정은 무덤덤하다 못해 무심한 얼굴을 보고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러는 동안에도 태경의 새까만 동공이 그녀의 얼굴을 선회했다.

오싹했다. 태경은 발렌틴의 저택에서도 이런 얼굴이었다.

멍청하게 인질이나 됐다고 한심하게 여기는 걸까. 탈출도 못 하는 바보 천치라고 생각했을까. 그러려던 게 아닌데. 정말 노력했는데. 유정은 답답한 나머지 목이 막혔다. 무슨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마른 목구멍에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다급하게 침을 삼켰다.

“태경 씨…….”

유정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그는 마치 화답하듯 식은땀이 흥건한 유정의 이마를 쓸어 주었다.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제가 알던 태경이라는 사실에 안도한 나머지, 유정은 부끄러움도 잊은 채 그에게 답삭 안겼다. 하지만 포근한 품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그의 손에 양어깨가 잡혔다.

태경은 그대로 유정을 침대에 눕히고, 눈에 보이는 이불을 죄 끌고 와 덮어 주었다.

잠들어 있는 동안 핏기가 싹 가신 유정의 얼굴은 꼭 시체 같았다. 숨을 쉬는지 코에 손을 갖다 대고 몇 번이나 확인해야만 했다. 지금 이렇게 눈을 뜨고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날 정도로.

“태경 씨……?”

유정이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보던 주태경은 가늘게 몸을 떨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광현은 옅은 두통을 호소하며 엄지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상부에선 지금 어떤 의문점을 가지고 있는 거지?”

노트북 화면 속 에이든이 겸허하게 깍지를 끼며 대답했다.

-작전 수행 중이던 J가 어째서 무단이탈을 감행했는지가 쟁점입니다. 그의 총알이 빗나간 건 천만다행이죠. 이 상황에 러시아까지 과잉 진압으로 물고 늘어지면 답도 없으니까.

“주태경은 피해자다. 우린 그렇게 입장을 고수할 거야.”

-팀장 측에서 J에게 연락을 시도한 증거가 없습니다.

“사전에 공유했다고 하면 돼.”

옆에서 잠자코 있던 강준우가 머리를 박박 긁으며 원성을 터뜨렸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진짜 피해잡니다! 발렌틴 그 새끼가 민간인을 납치했다고요!”

주태경의 최초 작전 이탈은 상부에서도 이례적인 일로 치부했고, 갑작스러운 변화를 의심하는 것 역시 당연했다. 이게 다 끈질긴 발렌틴이 원흉이라는 점에 준우는 화가 치밀었다. 곱게 자란 도련님 주제에 성질만 더럽게 고약해서는.

에이든은 씩씩거리는 준우를 보며 이성적으로 말했다.

-아무리 군인이라고 해도 내 가족, 연인이 다치는 것까지 감수하라고 강요할 순 없을 거야. 우린 그 부분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준우는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을 쓸었다.

“오래 봐 왔지만 선배님이 저렇게 제정신이 아닌 건 처음 봤다고.”

준우는 혼절한 유정을 안아 들고 걸어가던 주태경의 낯선 얼굴이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광현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서유정을 인질로 삼은 발렌틴과 대치하는 게 녹화된 CCTV를 벌써 여러 번 반복해 봤는데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간 인질 구출 작전에 투입됐던 주태경과는 완전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인질이 반 불구가 되든 말든 목숨만 붙여 구출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었는데. 거기에는 쐈다 하면 명중인 점도 한몫했다. 대개는 인질을 쏘게 될까 두려워 포기하고, 회유하기 마련인데 단 한 번도 그런 선택을 한 적이 없었다.

제 실력을 믿는 것도 믿는 거지만, 애당초 인질로 인해 마음이 약해질 정도로 감성이 풍부하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희생자가 나오는 긴급한 상황에서도 얼음같이 차가운 이성으로 판단하여 해결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총을 버렸다. 무릎 꿇고 빌라는 지시에도 고분고분했다. 지금까지는 하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서유정에 대한 감정이 뭔지 물을 때마다 성가시다는 양 굴었던 놈인데. 그 미적지근한 반응을 나침반 삼아 그 여자는 그저 ‘조금 특별한’ 정도로 분류했던 게 실수였다는 꺼림칙한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서유정은 서유정대로 사람을 놀라게 했다. 머리에 총구가 겨눠진 여자가 자기 목숨을 쥔 놈의 팔을 물어뜯다니. 그 겁 없는 행동이 결국 발렌틴의 체포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녀에게 그런 용기가 없었더라면, 아마 상황은 악화가 됐을지도 모르니.

그렇다고 한들 그녀가 주태경의 약점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겠지만.

약점 없는 놈의 유일한 약점.

이광현은 흐린 화면 속의 둘을 착잡한 눈으로 주시했다.

* * *

유정은 고통인지 뭔지 모를 얼굴을 한 태경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는 기절하기 직전에 보았던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국적 불문의 남색 전투복 위에 체스트 리그, 검은색 가죽으로 된 반장갑. 줄곧 선 채로 옆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발간 불꽃이 어른어른 피어올랐다. 금세 새까맣게 꺼져버렸지만.

그를 바라보는 유정의 동공이 점멸하듯 흔들렸다. 기댈 곳이 없는 손은 무의식적으로 그가 선물한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태경은 목걸이를 생명줄처럼 꽉 쥔 작은 주먹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윽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턱관절을 억눌렀다.

“항구에 도착하는 대로 군의관이 몸 상태를 봐 줄 거예요. 귀가는 그 후에 해요.”

“다친 곳은 없는데…….”

그러자 태경의 눈길이 곧장 그녀의 팔꿈치로 향했다. 넘어질 때 바닥과 충돌하면서 상처가 났는지 핏자국이 선명했다. 태경의 동공이 기이하게 일렁이자 유정은 그 팔을 슬그머니 뒤로 감췄다. 고작 찰과상에 불과한데도 태경은 못마땅하게 보는 눈치였다.

“그럼…… 태경 씨도 집에 같이 가나요?”

태경은 침묵했다. 뭐라도 꿰뚫을 기세로 뚫어지게 보던 것도 잠시,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그랬어요?”

그는 더 뱉어 내지 못한 말들을 어금니를 물어 삼켰다. 유정은 무슨 그런 질문이 있냐는 듯이 큰 눈을 깜빡거리다 이내 질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발렌틴의 손목을 깨물었던 걸 질책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겁에 질렸다고 해서 태경이 궁지에 몰리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뭐라도.

“……그 남자가 시키는 대로 태경 씨가 따르는 걸 볼 수 없었어요. 저 때문이잖아요.”

그 말에 태경은 표정을 굳혔다.

“……다시는 그러지 마요.”

“…….”

“알았어요?”

대답을 촉구하듯이 그녀의 뺨을 움켜쥐었다. 힘 하나 들이지 않은 엄지에도 그녀의 한쪽 볼은 쉽게 짓눌렸다.

“하지만…….”

한참이나 머뭇대던 그녀가 고개를 떨구며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태경은 헛숨이 터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 넘겼다.

유정은 추궁하는 시선을 받아 내며 의연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또 그럴 거예요.”

“……왜요?”

그가 긁힌 듯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도망치길 바랐으니까요.”

유정은 순간 목이 콱 막히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태경이 왔을 때 심장도 부서진 유리창과 함께 조각조각 났다. 이미 발렌틴이라는 남자의 잔혹함을 알기에 그가 거기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이들을 상대하며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게 그의 일이라고 해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이마에 작은 상처만 나도 마음이 쓰린데.

“…….”

바닥을 응시하며 태경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지나치게 낮은 목소리에 아무것도 듣지 못한 유정의 불안감은 한층 증폭됐다. 숨을 죽이고 바라보자, 그의 시선이 올라왔다. 이상할 정도로 습윤한 눈은 상처 받은 것 같았다. 순간 당혹감에 휩싸인 유정에게 그는 씹어 뱉듯이 말했다.

“사랑한다면서.”

“……!”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도 그에게서 영원 같은 거리감이 느껴졌다.

“왜 나한테 가라고 해요.”

“…….”

“도망치라고 할 게 아니라 구해 달라고 했어야지.”

눈이 버석하게 마른 태경이 피식 웃었다. 짧게 흐르는 웃음소리로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책망, 배신감, 그리고 괴로움. 하지만 그는 무뚝뚝하게 몸을 돌렸다. 유정은 그가 문고리를 잡기 전에 터뜨리듯 외쳤다.

“사랑해서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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