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네 총이 빠를까, 내 총이 빠를까.”
발렌틴이 희롱하듯 말했다.
“동시에 죽을 확률이 높겠어.”
태경과 눈이 마주치자 발렌틴이 능글맞게 웃었다. 아무리 빨리 쏴도 유정은 저와 함께 죽을 거라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었다.
“그렇지 아가씨?”
발렌틴이 맞닿아 있는 그녀의 얼굴에 제 뺨을 비비적거렸다. 태경은 음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빈틈없이 붙은 둘의 뺨을 응시했다.
“영화 한번 찍어 보자. 장르는 멜로야.”
“…….”
“뭐해. 총 버려.”
발렌틴이 그에게 턱짓하며 명령했다. 무슨 놀이라도 하는 양 굴었지만, 트리거를 당장이라도 당길 기세였다. 이대로면 서유정은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태경은 뭔가를 가늠하듯 좁힌 눈매로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자 발렌틴이 신경질적으로 유정을 목을 세게 짓눌렀다.
“으윽……!”
태경의 시선이 느리게 그녀를 향했다. 숨을 쉴 수 없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게 퍽 측은할 법도 한데, 그는 미동이 없었다.
그쯤 되자 발렌틴이 좀 급해졌다.
“무슨 생각이든, 내가 다치면 이 여자는 죽어.”
겁박으로 선택을 재촉하고 있었다. 유정은 가까스로 고개를 내저었다. 무리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차라리 도망가라고. 필사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던 태경은 깨진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손목에 힘을 풀었다.
발렌틴을 향해 겨누고 있던 총구가 밑으로 슥 내려갔다. 끝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에 총을 버렸다. 발렌틴의 희열로 가득한 얼굴에 파동이 일어났다.
“좋아. 그거 말고도 가지고 있는 무기 다 바닥에 떨궈 줄래?”
태경은 군말 없이 체스트 리그를 아예 풀어서 바닥에 내던졌다. 이제 그는 최소한의 무기도 없이 완전한 맨몸이었다. 유정은 사색이 되어 외쳤다.
“태경 씨!”
도대체 왜 그랬냐고 다그치는 눈을 태경은 끝내 외면했다. 그것마저 발렌틴의 의도와 일치했다. 비극적인 연인. 도저히 기쁨을 참을 수 없어 발렌틴은 총을 쥔 손끝으로 눈두덩을 문지르며 괴이하게 웃었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는 조롱에 가까웠다.
“그래. 협조해 줘서 고마워.”
유정은 안타까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의 능력이 탁월하다고 칭송하던 강준우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 사람이 이 꼴이 되었다. 저 때문에. 그녀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금부터 내 계획을 말해 줄게. 나는 너의 손톱, 발톱을 모조리 뽑고 신체 부위별로 총알을 한 발씩 박아 넣을 거야.”
발렌틴은 상상만으로도 쾌감이 두피까지 절절 끓는지 몸을 떨었다. 옆에 붙어 선 유정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였다. 이 남자가 지금까지 해 왔던 비정상적인 언행을 생각하면, 방금 말한 대로 충분히 실행하고도 남았다. 무서운 직감이 들자, 유정은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하지만 네 목숨 살자고 도망가고자 한다면 살려 줄게.”
“…….”
“이 여자도 말 잘 들으면 안 죽여 줄 수도 있고.”
그가 동요하지 않자, 발렌틴이 짜증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노력이 가상하니 도망가면 곱게 보내 준다고. 안 믿겨?”
발렌틴은 유정을 압박하던 팔을 약간 풀며, 통신기에다 대고 말했다.
“아까 들어온 놈이 나가면 그냥 보내. 아, 몇 명이 다쳤든 알 바야? 보내라면 보내.”
제 할 말만 내뱉은 발렌틴이 그대로 통신을 차단했다.
“됐지?”
“…….”
“대신, 도망가기 전에 너에게 할 일이 있어. 내 앞으로 와서 무릎 꿇고 비는 거지. 까불어서 죄송했다고 싹싹 빌어. 그럼 뒤끝 없이 보내 줄게.”
미친놈한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라고. 그걸 그에게 하라고. 그 모습을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유정이 목소리를 높였다.
“제발 그냥 가요! 도망가요!”
발렌틴이 신음하듯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이렇게 의도대로 움직여 줄까. 이 여잔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다. 이내 그가 유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 더 간절히 빌어. 널 두고 추하게 도망갈 수 있도록.”
녹화 시스템이 각도별로 작동 중이었다. 주태경이 제 앞에 무릎 꿇고 빌다가 종국에는 추하게 도망가는 꼴을 전 세계에 배포하면, 그가 속한 조직에도 타격감이 막심할 테니. 군인에게 불명예는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정은 있는 힘껏 몸을 비틀었다. 태경이 다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해서 무사할지도 장담하지 못한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남자가 아니던가.
태경이 고분고분 다가왔다. 발렌틴은 이미 그가 제 앞에 무릎이라도 꿇은 양 반색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유정이 필사적으로 발렌틴의 팔목을 깨물었다. 송곳니가 살을 뚫었고, 입에서 비릿한 피 맛이 돌았다.
“윽……!”
발렌틴이 고통으로 신음하며 얼굴을 우그러뜨렸다.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 왔다는 생각에 긴장이 잠깐 느슨해진 틈을, 그녀가 비집고 들어간 거였다. 경계가 흐트러진 그 짧은 순간, 태경은 순식간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거꾸로 놓인 권총을 한 바퀴 손에서 굴린 후 발렌틴의 허벅지를 조준했다.
탕-!
총성이 터졌다. 허벅지에 총알이 관통당한 발렌틴이 털썩 주저앉았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을 의심할 새도 없이 유정은 물에서 건져진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며 옆으로 비켜났다.
발렌틴의 휘청거리는 총구가 그녀를 겨냥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태경이 먼저였다.
비스듬하게 각도를 비튼 그의 총구가 정확하게 발렌틴의 심장을 조준하는 순간. 제 발에 제가 걸린 유정이 바닥으로 엎어졌다.
방아쇠를 당기는 태경의 시선이 잠깐 흐트러졌다.
탕-!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발렌틴이 뒤로 풀썩 넘어갔다.
태경은 이내 권총을 패대기치고, 유정에게 다가가 일어서는 걸 도왔다. 밖에서도 한 차례 총성이 들렸다. 그녀의 동공에 그제야 선명한 공포심이 자리 잡았다. 어떻게든 태경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잔혹한 상황을 뒤늦게 인지한 거였다.
태경은 비척거리며 기절한 유정의 팔을 제 목에 두르게 하고는, 그대로 안아 들어 끔찍한 현장을 가로질렀다. 등 뒤로 발렌틴의 신음이 달라붙었지만, 그의 워커는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아무렇게나 지르밟고 출구로 직행했다.
* * *
“이번엔 동료와 인질 구출이 우선이다. 수틀리면 제압에서 끝내지 마.”
준우의 한 마디에 지상에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이 기척도 없이 움직였다. 거칠게 자란 잡초를 투박한 워커로 밟아 꺾으며 동료들을 따라나서던 준우는 저택 주변에 넓게 분포된 가드부터 정리에 나섰다.
그들이 가까이 오고 나서야 기척을 눈치챈 가드가 폴딩 나이프를 위협적으로 꺼내 들자, 한 손에 들고 있던 자동 소총을 올린 준우가 가드의 허벅지를 겨냥했다.
탕-!
“윽……!”
고통에 다리에 힘이 풀린 가드를 개머리판으로 내려친 준우가 사나운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산탄총을 든 가드들은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저격수들에게 몸이 꿰뚫려 픽픽 쓰러졌다.
블랙스완 팀은 발렌틴의 저택 무력 진압에 성공했다. 발렌틴과 그의 수행원, 그리고 저택 주변의 무장 가드까지 완벽하게 제압했다.
광현은 무전을 통해 팀원들의 보고를 받으며 현장 정리를 지휘했다. 무엇보다 인질이 존재했다는 점, 이번 일이 과잉 진압이 아니었다는 점, 일촉즉발의 현장이었다는 점 등의 증거 확보를 위해 발렌틴이 저택에 설치한 CCTV 자료 화면도 수집했다.
마지막으로 전용선 앞에서 인원 체크를 하던 광현은 기절한 서유정을 안고 오는 주태경을 발견했다. 동료의 사람을 사지로 몰았으니, 사과의 말을 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알량한 죄책감은 주태경의 하얗게 질린 얼굴 앞에서 무력해졌다. 전쟁이 터져도 동요하지 않을 검은 눈이 일렁이고 있었다.
태경은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싸늘하게 지나쳤다. 그 바람에 어깨와 어깨가 제법 세게 충돌했다. 평소였다면 불러 세웠을 테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파도를 따라 넘실거리는 배 위를 꼿꼿하게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태경은 곧장 특실로 들어갔다. 군대에 제공되는 선박이라, 특실이라고 해 봤자 볼품없었지만.
준우가 재빨리 따라붙었으나 눈앞에서 특실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누가 봐도 침입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였다.
* * *
저녁 시간. 준우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들고 특실 앞까지 갔지만, 한참의 고민 후 돌아서야만 했다. 음식이 넘어갈 리도 없고, 어차피 문전박대당할 게 뻔했다. 준우는 식판을 던지듯 내려놨다.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착잡한 얼굴을 마른 손으로 쓸어내리던 준우는 이윽고 상황실로 들어갔다. 발렌틴의 저택에서 확보한 CCTV 녹화본을 확인하던 광현이 돌아봤다. 그는 준우를 의식하며 리모컨으로 영상 중지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
“지금 팀 분위기 개판인 거 아시죠?”
광현은 침묵했다. 긍정인 셈이었다. 준우는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판단, 옳았습니다. 네.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죠. 근데, 이번 일은 차선책이 없었습니까?”
“어차피 서유정은 이미 발렌틴의 표적이었어.”
“저희가 보호했어야 합니다. 선배님도 그걸 원했고요.”
“언제까지? 인질로 데려가 봤자 어차피 손도 못 댈 거고, 그래서 결국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어.”
준우는 말문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