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조종사는 미러로 뒤를 자꾸만 흘깃거렸다. 아무래도 주태경의 낌새가 수상쩍었다. 미친놈처럼 조종석에 난입할 땐 언제고, 이제는 쥐 죽은 듯 조용한 게 어째 더 불안했다.
블랙스완은 동료가 다치는 한이 있어도 임무가 최우선이었다. 주태경은 그중에서도 특출난 놈이었다. 사회성이 좀 떨어지긴 해도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임무 이탈이라니.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저를 집어 던지고 조종석에 앉을 기세라 어쩔 수 없었다. 돌아가면 시말서를 쓰게 될지도 몰랐다. 그 원흉인 놈은 정작 신경도 안 쓰는 게 더 억울했다.
태경은 수신기를 쥔 손을 허벅지 위에 올린 채 바위처럼 앉아 있었다. 조종사가 푸껫 공항에 착륙 허가를 요청하는 것도 아득히 먼 곳에서 전해지는 양 웅얼웅얼 들렸다.
민간인을 납치할 간 큰 인간은 발렌틴뿐이다. 무슨 수작인지야 뻔하지. 그의 귀에 들어가라고 대놓고 움직인 거다. 다행이었다. 유인이 목적이면 서유정 몸에 함부로 위해를 가하진 않을 테니. 그렇다고 죄가 가벼워지진 않는다. 눈알을 뽑고 손가락을 자르고 고막을 파열해도 시원찮았다.
문제는 납치 과정인데. 강준우와 함께 움직였다면 그런 사고가 발생할 리 없었다.
뭐 이렇게 허술하게 당했을까. 뭣보다,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진 않을 텐데. 이미 팀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들에게 맡기면 되는데, 그런 계산 따위는 머릿속에서 깡그리 밀려났다.
태경은 눈을 감았다. 가늘게 진동하는 몸은 김을 뿜어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규칙적인 호흡은 기이할 정도로 포악했다.
발렌틴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가 주는 다디단 시간에 빠져서 그간 해이해지긴 했지. 빈틈이 생기자 바로 서유정이 위험에 빠졌다. 그나마 최후까지 남은 본능 덕을 봤다. 목걸이에 위치 추적 기능을 심어 놨으니. 그게 없었더라면 찾느라 시일이 더 걸렸을 텐데.
눈꺼풀을 들어 올려 드러난 태경의 눈동자가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얼굴도 모르는 인간들 지키는 게 일인데 서유정 하나 못 지켜.
기분이 아주, 개같았다.
그때, 잠깐 먹통이었던 이어폰이 신호가 잡혔는지 치지직 소리를 냈다. 태경은 손가락을 굽혀 이어폰이 귀에 딱 맞도록 조정했다.
-도대체 주태경 씨한테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유정의 목소리였다.
가뭄의 단비 같은 그것을 태경은 허겁지겁 삼켰다. 착륙 한 시간 전이다. 도착하기 전까지 무사해야 하니, 웬만하면 도발이 될 법한 말은 안 해야 할 텐데.
아니, 애초에 놈과 말을 섞는 것조차 짜증이 치밀었다. 당장 그녀를 잡아서 제 등 뒤로 감추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태경이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시 정적이었다. 혼자 남은 건지, 아니면 다친 건지. 그는 청각을 곤두세웠다. 이윽고 단내 풀풀 나는 음성이 들렸다.
-착각하신 거예요.
유정은 어쩐지 비장했다.
-난 주태경 씨의 여자가 아니에요.
발렌틴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반응이 안 좋은지 그녀는 재차 강조했다.
-저기요. 주태경 씨한테 난 딱히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태경의 눈썹 앞머리가 급격하게 휘어졌다. 대체 누구한테 무슨 헛소리를 주워들었는지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나 혼자 좋아해서 매달린 거예요. 그분이 너무 착해서…… 그래서 절 내치지 않은 거고.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왜. 왜 저 혼자 좋아한다는 거지. 태경은 가슴 속에서 거친 파동이 일었다. 분명 저도 좋다고 했는데. 마음에 든다고도 했고.
아직도 고백하던 순간의 공기가 어땠는지, 온도와 습도까지 기억하는데. 소름 돋게 생생한데. 저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 준 그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을 맞추며 분명히 대답했는데.
태경의 가슴이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뭔가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고요한 밤. 사랑해요, 하고 말하던 서유정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수신기를 쥔 태경의 손등에 시퍼런 심줄이 돋았다.
-내기할래? 네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수신기 속 발렌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꽂혔다.
무서울 정도로 무뚝뚝한 얼굴이 사선으로 드리운 어둠에 잠식됐다.
그놈의 사랑. 그게 그렇게 중요하단 말이지. 결국 서유정도 그것 때문에 자기 앞가림도 못 하고 빌빌거리고 있었다. 지금도 발렌틴이 얼마나 미친놈인지 모른 채 돼먹지 않은 도발이나 일삼고. 그저 주태경을 위해서. 주태경을 사랑하니까.
미련했다.
주태경은 기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깟 미련한 감정을 가져 주지 않았다고 지금, 저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지껄여. 그는 콧숨을 내쉬며 경직된 입매를 비틀었다.
* * *
1500m 상공에 헬기가 투두두두, 소리를 내며 한 자리를 맴돌았다. 무장한 광현이 위치를 가늠하는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십오 분 후에 들어간다.”
허무하게 서유정을 놓쳤다. 주태경이 돌아오기 전에는 제 자리로 돌려놔야 했다. 광현은 가볍게 고글을 고쳐 썼다.
“1km 떨어진 부근에 경비행기 발견.”
조종사의 말에 광현이 벌떡 일어나 밖을 확인했다.
말대로, 경비행기가 있긴 했으나 위협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저쪽도 목표가 저택으로 보였다. 심지어 이쪽보다 한발 앞서 움직였다.
상공에서 낙하산이 펼쳐졌고, 정확히 저택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의문으로 점철된 광현의 눈이 낙하산을 좇았다.
* * *
발렌틴은 설치된 장거리 식별 레이더(LRDR)를 통해 헬기의 접근을 보고 받았다. 요격 지시를 해도 가능했는데, 하지 않았다. 대신 태평하게 콧노래나 흥얼거리며 체리를 집어서 먹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바깥은 소란스러웠다. 어디선가 비명도 들리고. 보초를 세운 인원은 몇 되지도 않았는데, 하는 꼴을 보니 내부로 금방 들어올 모양이었다.
주태경이 올 거라고 짐작했지만, 그게 단 하루 만일 줄은 몰랐다. 설마, 비행기를 돌린 건가. 발렌틴의 목울대가 전율하듯 떨렸다. 흥분감이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올랐다.
소리 내어 웃고 싶은 충동을 손으로 하관을 틀어막으며 자제했다. 발렌틴은 재빠르게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침울한 얼굴로 무릎을 모은 유정의 손목을 다짜고짜 잡아서 질질 이끌었다.
“내가 이겼어.”
바싹 마른 주제에 악력이 상당했다. 유정의 발이 대리석 바닥에 질질 끌렸다.
“왜, 왜 이래요.”
“우리 아까 내기했잖아.”
발렌틴의 동공이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확장됐다. 눈이 마주친 순간 엄습하는 공포감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반갑게 맞이해.”
나태할 정도로 느긋했던 말투도 괴기스럽게 빨라졌다. 그녀는 발렌틴에 의해 중앙 현관 앞에 세워졌다. 폭풍 전야의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드르륵, 탁.
뒤에서 낯선 금속성의 소리가 났다. 등허리가 쭈뼛 섰다.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리볼버를 정성스럽게 장전하고 있는 발렌틴이 있었다. 유정의 두려움으로 점철된 시선을 받으면서도 그는 태연하게 웃었다.
“손님맞이 하자.”
뒤로 다가온 발렌틴은 다정하게 그녀를 감싸 안고는 한쪽 팔만으로 목을 압박했다.
이내 관자놀이에 총구가 겨눠졌다. 여차하면 총알이 살과 뼈를 찢고 머리를 관통할 거라는 암시. 유정의 귀에 먹먹할 정도로 자신의 큰 제 맥박 소리가 들렸다.
총구 앞에 선 것만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런데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앞선 경험보다 더 비이성적인 두려움에 휩싸였다. 상대는 사람 목숨을 죽이고 살리는 걸 재미로 삼는 이였다. 극렬한 공포심으로 피부가 덜덜 떨렸다.
채채챙-!
일순간 창문이 깨졌다. 조각난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뚫린 구멍으로 날아든 두 사람은 한 덩어리처럼 뭉쳐 바닥에 뒤엉켰다.
유정의 시선이 허겁지겁 두 사람을 더듬었다. 둘 다 시커먼 옷을 입어 도대체 구분이 어려웠으나, 날렵하게 자세를 고치는 태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소름 끼치는 반사 신경으로 가드의 손을 꺾고, 그 손에서 나이프를 가로채서는 손잡이 부분으로 상대의 뒷덜미를 가격해 단번에 기절시켰다. 그것이 모두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벌어졌다.
이윽고 몸을 바로 세운 태경은 장갑 낀 손으로 어깨에 앉은 유리 조각들을 걷어 내며 검은자위를 굴렸다.
발렌틴은 본능적으로 리볼버를 더 꽉 쥐었다. 저벅, 저벅. 다가서는 태경은 놀랍도록 침착하고 태연했다.
발렌틴은 마치 거대한 늑대와 조우한 것처럼 오싹했다. 하지만 반대로 야릇한 쾌감도 같이 타올랐다.
어쩌지. 네가 늑대라면 난 미쳐 날뛰는 파수꾼인데.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발렌틴이 말했다.
“손님이면 문으로 들어와야지. 친절히 열어 놨었는데.”
“…….”
“왜 남의 집에서 까불어?”
발렌틴은 거기서 멈추라는 듯 턱짓을 했다.
“네 집 내 집이 없어서.”
말을 뱉은 태경은 순순히 걸음을 멈췄다. 대신 체스트 리그에서 새까만 자동 권총을 꺼내 총구를 겨눴다. 자세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시선이 유정을 핥아 먹을 듯 응시했다. 그러자 발렌틴의 팔이 그녀의 목을 더 압박했다.
유정은 시야가 꺾인 채로 태경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폈다. 창문을 깨고 들어온 여파로 이마가 찢어졌는지 붉은 상처가 나 있었다. 복부의 흉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상처가 또 하나 늘었다.
마음이 아파 유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방아쇠를 감싼 태경의 손가락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당장 이걸 당겨 놈의 숨통을 끊어 놓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