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28)화 (28/83)

28화.

“선배님 쪽에 소식 전달할까요?”

태경은 윌 터너 소장의 감찰을 위해 투입됐다. 피도 눈물도 없다지만, 아무려면 동료의 부친을 조사, 체포하는 게 그라고 쉬울까. 그런 상황에서 서유정까지 잘못되고, 그 잘못됐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임무가 우선이다.”

하지만 광현은 고개를 저었다. 주태경은 산티아고행 수송기에 탑승했고,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는 이상 태평양 한가운데서 이번 일을 알게 될 일은 없었다.

만약 정말로 서유정이 죽었다면, 후환이 염려되긴 하나 어찌 됐건 임무를 최우선으로 두어야 한다.

팀장의 의중이라면 이젠 눈 감고도 알 것 같은 준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우는 차에 앉아 노트북을 반대로 돌려, 카메라가 폭파 현장을 담을 수 있게 했다. 그러면서 스프링으로 연결된 이어폰을 건드리자, 에이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소유자 확인하는 중이야.

광현은 화재 진압 현장으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어차피 보여 주기식 쇼일 가능성이 있었다. 발렌틴이 제아무리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어 대도, 살인자가 될 배짱은 없는 놈이었다.

어디로 빼돌렸을까. 광현은 차분히 발렌틴의 행적을 곱씹었다. 분명히 어딘가에 단서를 흘렸을 텐데.

그 순간, 서유정의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눈을 보며 광현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약속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약속합니다.’

입술 안쪽을 짓씹으며 휙 돌아선 광현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무조건 잡는다. 그의 머릿속엔 그뿐이었다.

* * *

새카만 전투복을 입은 주태경의 손끝이 연신 무릎을 두드렸다. 수송기, 헬기, 비행기. 이동 수단이라면 밥 먹듯이 탔다.

당장 추적 미사일을 맞고 여기서 추락한다고 해도 두렵지 않을 강심장인데, 어째선지 그는 뭔가 초조했다. 물론 겉으로 봐선 소름 끼칠 정도로 태연했지만.

그는 감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광현의 쓸데없는 조심성은 익숙했다. 성가시고 따분하지만, 그게 절묘하게 도움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고. 하지만 섬세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광현은 남의 연애사나 주워들으며 알량한 조언을 건네는 저급한 성격도 아니었으며 군인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하긴 했지만, 원래는 본인의 이익을 우선으로 움직이는 용병이었다. 그런 면에서 블랙스완은 군인보다는 용병에 가까웠고. 의심의 바늘이 촉수처럼 뻗어 갔다.

이윽고 태경이 품에서 작은 수신기를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곧장 서유정의 위치가 떴다.

그녀에게 선물한 목걸이 펜던트 안에 위치 추적기와 음성 출력기를 심어 놨다.

아무려면, 최소한의 준비도 없이 제가 순순히 서유정을 내놓을 리가 있나. 발렌틴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 누가 그녀를 채 갈 줄 모르는데 말이지.

물론 펜던트 속 내용물에 대해 유정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보다 침착한 편이긴 해도, 그녀는 겁이 많은 편이었다. 괜한 불안감을 심어서 유정의 일상에 영향을 끼치는 건 꺼림칙했다. 그 여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편이 더 예뻤다.

아무튼, 이광현의 침입은 운이 좋아서 그 순간 제지할 수 있었던 거고. 만일 서유정이 그때 다쳤다면 그것만큼 꼭지가 도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위치 추적기를 투시라도 해서 보는 양 뚫어지게 응시하던 태경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뭐야, 이거.”

현재 서유정의 위치는 그의 계산에는 없던 곳이었다. 그는 곧바로 무선 이어폰을 꺼내 한쪽 귀에 우악스럽게 쑤셔 넣고, 버튼을 눌렀다.

치직, 치직. 들릴 듯 말 듯 소리가 어그러졌다. 먼 거리 탓에 잡음이 심하게 섞였다.

척추를 굳힌 그가 욕설을 씹어뱉으며 벌떡 일어났다. 두어 걸음 만에 조종석 앞에 도달해, 문짝을 뜯듯이 열어젖히고, 조종사의 헤드셋을 잡아 확 빼냈다.

“방향 틀어.”

뱉어 낸 목소리가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그 공격적인 언사에 조종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 *

블랙스완 팀은 구조 작업이라면 이골이 나 있었지만,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화재를 진압하고 시커멓게 타 버린 전용기 문짝을 뜯어냈다.

광현은 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전용기 수색 작업을 지켜봤다. 상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팀원들이 차량에서 끄집어낸 건 시체가 아니라 더미였다. 팀원들의 손에서 더미가 마치 조롱하듯 우수수 쏟아졌다.

광현은 그야말로 잿더미를 무감하게 내려다봤다.

결국 시체는 단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다. 발렌틴이 벌인 쇼였다. 서유정은 애당초 차에서 나오지 않았던 거다.

광현의 목울대가 들썩였다. 예상대로의 상황에 분노가 치미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발렌틴의 농간에 완전히 놀아난 데다, 결국 서유정을 지나친 위험에 노출하고 말았다는 자괴감까지 들었다.

차량에 추적자를 붙여 놓긴 했지만, 항구에서 배로 옮겨 탔다는 소식을 접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광현은 머리 위에서 나타난 헬기를 올려다봤다. 착륙을 위해 맴을 돌고 있었다. 헬기가 바닥과 가까워질수록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광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래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헬기 착륙과 동시에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는 이를 갈며 말했다.

“물 위로 다니는 건 샅샅이 다 뒤져.”

* * *

발렌틴이 온더록스 잔을 쥐고 창문 턱에 걸터앉았다. 속에서 서서히 발화하는 피니시를 즐기며 신음 같은 숨을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CCTV에 고정했다. 각진 화면 속에서 서유정이 저택 내부를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고.

이윽고 마땅히 도망칠 구멍을 찾지 못했는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담벼락 너머를 하염없이 보면서.

발렌틴은 대강 가운을 걸치고 나갔다. 달빛을 머금어 좀 희석되긴 했어도 유정의 얼굴에는 낙담으로 가득했다.

“뭐해?”

발렌틴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돌아보면서 등을 벽에 철썩, 붙이기까지 했다. 피하려는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무슨 일이죠.”

유정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그는 서슴없이 거리를 좁혔다.

“토끼몰이 중이었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그녀가 노려봤다. 발렌틴은 호탕하게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 시간까지 집 구경을 하는 거야?”

그러고는 굽어보며 눈썹을 팔자로 휘었다.

“얼굴이 그새 못쓰게 됐네.”

유정은 잠 한숨 못 잤는지 눈 밑이 검었다. 피부는 푸석하고. 수면을 포기한 채 몽유병 환자처럼 쏘다니니 이 꼴이지.

“여긴 절벽 위에 지어졌어.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사방이 바다야.”

“…….”

“심해에 몸을 던지는 건 자살행위고.”

어쩐지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라니. 유정은 입술을 사리물었다.

“도대체 주태경 씨한테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발렌틴이 손에 든 온더록스 잔을 입술에 붙였다. 곧 호박색 액체가 출렁이며 그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입술에 스민 것까지 혀로 핥아 먹으며 그가 말했다.

“내 앞에서 설설 기지 않아서.”

“……고작 그런 이유로 태경 씨를 괴롭히는 거라고요?”

유정은 허탈했다. 그리고 남자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 화가 났다. 동시에 태경의 얼굴이 떠오르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선량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악귀 같은 남자의 표적이 되어 시달려 왔을 걸 생각하니 가슴 속에서 열기가 빠듯하게 차올랐다. 저 때문에 결국 휘말려 들게 되리라는 예측에 유정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응. 그런 이유로.”

발렌틴의 회색 눈동자에 달빛이 고여 예리하게 빛났다. 사는 동안 누군가에게 제지를 받거나 욕설을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부친도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체벌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태경은 서슴없이 대들었다. 경고성으로 뱃가죽을 좀 쑤셔 줬는데도 오히려 기세등등했다. 발렌틴은 형언할 수 없이 기뻤다.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극한의 분노랄까. 그 감정을 다시 떠올린 발렌틴의 육신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유정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절박함으로 가득한 습윤한 눈동자로 발렌틴을 응시했다.

“착각하신 거예요.”

발렌틴이 회색 눈을 비스듬히 내렸다.

“뭘?”

“난 주태경 씨의 여자가 아니에요.”

그런 눈을 하고 잘도 거짓말을 하지. 유정을 물끄러미 보던 발렌틴은 싱겁게 웃었다.

“저기요. 주태경 씨한테 난 딱히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유정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믿지 않는 눈치였다. 경청하고 있는 이유는 단지 이 상황이 흥미로운 것뿐인 듯했다. 어쩐지 바보가 된 기분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나 혼자 좋아해서 매달린 거예요. 그분이 너무 착해서…… 그래서 절 내치지 않은 거고.”

어찌 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태경은 그녀의 고백을 거절한 거나 마찬가지고, 저가 더 좋아하는 입장이니까.

발렌틴은 흐음, 하고 숨을 내어 쉬고는 말했다.

“내기할래?”

유정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감정을 가지고 도박이나 하자는 그가 정말이지, 싫었다. 남자는 뭐든 진지한 구석이 없는 모양이었다.

“네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그런 제안을 하는 발렌틴은 이미 승리자의 얼굴이었다. 유정은 차갑게 외면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상대해 봤자 입만 아프지.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발렌틴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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