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난 임무가 있어서 새벽에 먼저 나가 봐야 해요.”
그가 없다고 하니 내심 불안해진 유정은 그 불안함을 꾹 눌러 삼켰다.
“여길 떠나서 며칠이나 있어야 해요?”
“얼마 안 걸릴 거예요. 금방 찾을 거라.”
별거 아니라는 반응에 유정은 점차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위험에 빠뜨리게 한 사람이 다시 그를 다치게 할 수 있는 상황만 아니면 다행이었다.
“그럼 일단 일하는 곳에 먼저 말할게요.”
그런데도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 박동이 불안을 알렸지만, 기우라고 여겼다.
* *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그는 없었다.
기척도 없이 나간 그를 신기하게 여기며 몸을 일으킨 유정은 문 앞에서 반복적으로 들리는 발소리에 현관을 나섰다.
그러자 제자리에 서성이고 있던 준우가 손을 휙 내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깨우지 말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아 새벽부터 무작정 기다리던 준우는 그녀가 오전에 나와 다행이라고 여겼다.
“네. 안녕하세요. 지금 가는 건가요?”
유정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하며 묻자, 투박한 레진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준우가 여유 있게 답했다.
“아니요. 준비되셨을 때 출발하면 됩니다.”
“그럼 캐리어만 가지고 나올게요.”
짐은 미리 저녁에 챙겨 뒀었다. 별거 없어서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유정은 다시 집 안에 들어가 간단히 씻고,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유정에게서 캐리어를 가져온 준우가 먼저 대문 밖을 나가, 대기하고 있던 SUV 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운전기사에게 고개로 꾸벅 인사한 유정이 자리에 올라탔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전, 투박한 손이 불쑥 튀어나와 문을 틀어잡더니 다시 활짝 열었다.
차 안을 둘러보던 광현이 유정을 내려다봤다.
“이렇게 모시게 돼서 죄송합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약속합니다.”
찰나에 껄끄러운 표정이었던 광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풀었다.
“아, 네. 감사해요.”
유정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하자, 차 문이 쿵, 닫혔다.
서서히 움직이는 차 옆에 서 있던 광현에게 준우가 다가갔다.
“팀장님?”
서서히 멀어지는 차 안에는 그도 올라탔어야 했다. 그런데 멋대로 차를 출발시킨 광현이 준우의 어깨를 쥐어 잡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나랑 같이 간다.”
이것도 임무라면 임무고, 이번 임무는 준우만 왔어야 하는 거였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따라나선 광현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준우가 한쪽 눈썹을 휘며 저 멀리 사라진 차 뒤꽁무니를 쳐다봤다.
운전기사와 유정, 단 둘뿐인 차는 유유히 앞을 나아갔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차 시트에 머리를 기댄 유정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잔잔하게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마음이 왜 이렇게 이상할까.
그는 임무를 끝내고 바로 돌아온다고 했고, 저도 그의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건데 지난번 그가 집을 비웠을 때가 생각이 나 이상했다.
아무래도 새벽에 떠나는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유정이 흔들리는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를 실은 차는 어느 한적한 시골 도로에 진입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사방에서 새카만 차가 붙기 시작했다.
처음엔 우연이겠거니 했지만, 네 대의 새카만 차들은 마치 유정이 탄 차를 호송하듯 따라붙었다.
사고라도 낼 듯 바짝 붙은 차들 때문에 창가 시야가 막힌 유정이 불안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당연히 앞에도 마찬가지였다.
천장에 달린 손잡이를 움켜쥔 유정이 운전기사를 부르려는 순간, 뒤에서 쿵! 소리와 함께 차가 약하게 들이받혔다.
헉, 하고 숨을 급하게 내쉰 유정이 조수석에 놓인 무전기를 확인하고 운전기사를 쳐다봤다.
“어떡해요! 도움 요청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끼이익-.
결국 듣기 싫은 브레이크 소음과 함께 도로 한복판에 우뚝 멈춰 섰다.
반동으로 인해 핸들에 머리를 박은 운전기사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리어 뷰 미러로 유정과 눈이 마주친 표정에서 미안함이 묻어났다.
운전기사는 운전석에서 내려 두 손을 들고 섰다. 포위하던 차 안에서 금발의 남성들이 우르르 내렸다.
족히 열 명은 넘어 보이는 그들은 운전기사를 폭행하며 갓길로 치워 버리고는 운전석 문을 젖혔다. 부들부들 떨리는 눈동자로 그 광경을 목격하던 유정이 입을 틀어막았다.
쑥 들어온 기다란 손이 도어락을 해제시키자마자 뒷좌석 문이 거칠게 열리고 유정은 밖으로 끌려 나갔다.
“꺄악……!”
배려 없는 손길에 휘청이던 그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까끌까끌한 천에 의해 입이랑 코가 막혀 버렸다. 화하고 불쾌한 향이 훅 밀려 들어왔다. 쓴맛이 혀에 감돌았지만 뱉을 수 없었다.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로 입이 단단히 틀어막혔으나 무자비할 정도로 거센 힘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우으읍……!”
끊임없이 발버둥 치고 팔을 버둥거리던 유정은 새카만 차 안으로 옮겨졌다.
유정은 순간 블랙홀 속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였다. 극심한 멀미가 나는 것 같으면서도 눈앞이 흐렸다.
의식이 오래된 네온사인처럼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식의 저편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 말이 거칠게 들려오는 것을 끝으로, 완전히 어둠에 잠식되고 만 그녀가 몸을 축 늘어트렸다.
* * *
“콜록, 콜록……!”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유정은 기침을 하며 무거운 눈을 떴다. 시야가 바로잡히지 않아 무서웠지만, 등 뒤가 푹신했다. 은은하게 맡아지는 바닐라 향이 생소해 고개를 뒤흔든 그녀는 눈을 깜빡깜빡하며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서서히 눈에 초점이 잡히자, 새하얀 캐노피가 먼저 보였다. 앤티크한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미풍에 깃털 장식의 캐노피가 우아하게 하늘거렸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미끈해, 바닥을 더듬으니 실크 재질의 침대 시트가 결대로 구겨졌다.
어쩐지 평온한 그 광경에 소름이 끼쳤다. 기절하기 전 마지막 기억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유정은 따끔한 목을 부여잡고 얼굴을 찌푸렸다.
여긴 어디지?
온몸의 감각이, 낯선 장소라는 걸 깨닫게 했다. 불안정한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상체를 천천히 일으키자, 누군가 말을 걸었다.
“좋은 꿈 꿨어?”
바닐라 향과 진득하게 어울리는 낯선 목소리. 독특한 억양의 영어 발음이었다.
유정은 침대 발치, 굽은 의자에 앉은 남자를 이제야 발견했다.
붉은 벨벳 의자에 편히 다리를 벌리고 앉은 남자의 옅은 금발과 불투명한 회색 눈이 눈길을 끌었다. 저를 경계하는 유정의 눈빛에도 자상하게 웃는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께름칙했다.
입술 끝에 쏙 패인 볼을 물끄러미 보던 유정이 시선을 들었다.
온몸의 감각이 다시 곤두섰다. 위험한 냄새가 풍겼다.
아무리 기억을 곱씹어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혹시 이 남자가……?
유정은 긴장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굳은 입을 뗐다.
“…누구세요……?”
“친근하게 ‘발렌틴’으로 불러 줘.”
천천히 나오는 말을 느긋하게 들어 주던 남자가 입매를 매만지며 말했다.
“네가 J의 그녀지?”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다리를 꼰 발렌틴이 물었다. 허벅지 위에 얹은 핏기 하나 없는 손등 위로 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작은 손은 아닌데. 체격도 마찬가지였다. 골격은 큰데 전체적으로 말랐다.
남자의 시선은 흥분감이나 불안감이 없는데도 초점이 흔들렸다. 오싹했다. 손바닥에 바짝 소름이 섰다. 그 원인 모를 두려움을 유정은 버릇처럼 뒤로 제쳐 놨다. 대신 공포심으로 점철된 두뇌를 덜그럭, 굴렸다.
“……태경 씨를 찾는 건가요?”
발렌틴의 홍채가 확, 수축했다. 이상하다. 비명을 지르거나 살려 달라고 호들갑을 떨 줄 알았는데 말이지. 건방지고 거침이 없던 주태경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래. J.”
그러면서 발렌틴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단순한 몸짓인데도 고상함과 우아함이 묻어났다. 납치극을 일삼는 천박한 행위와는 완벽하게 모순적이었다. 그런데도 유정은 경계하느라 목을 자라처럼 집어넣었다.
발렌틴은 겉옷을 살짝 제치고,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서 하품하듯 말했다.
“너 자는 모습 구경하느라 점심도 걸렀어. 같이 밥 먹자. 너도 배고프잖아.”
그는 그녀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도 되는 양 다짜고짜 친근하게 굴었다.
“일어나.”
무례하진 않지만, 대부분의 대화가 주로 명령어다. 묘하게 거역할 수 없는 권위가 느껴졌다. 유정은 그간 길이 잘 들은 생존 본능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가 태경과 적대 관계라는 건 눈 감고 봐도 알만했다. 게으른 태도를 보아 군인은 절대 아니고. 비교적 마른 체격으로 봐선 깡패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태경을 다치게 한 주범이 틀림없었다.
그럼 여긴 함정이고, 저는 인질인 셈인데.
유정은 주변을 빠르게 살펴봤다. 천장 높이며 면적이 까마득했다. 그에 비해 가구는 몇 개 없었지만, 전부 값비싸 보이는 윤기가 흘렀다. 옆에는 정성을 들여 꾸민 호수와 정원수가 바로 보였다.
내부와 외부를 구분 짓는 창문도 하나 없어, 내키면 호수에 발도 담글 수 있었다. 홍콩에서 고급 빌리지라면 질리게 봐 왔는데. 여긴 그간의 경험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그를 따라간 주방은 더 호화로웠다. 길이가 긴 식탁, 불을 불인 양초, 갖가지 가니쉬를 곁들인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 어디로 보나, 인질에게 베풀기에는 친절이 과했다.
“앉아.”
유정은 순순히 앉았다. 속셈을 파악하기 위해 가늘게 치뜬 눈으로는 반대편 끝에 앉은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