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여행이 꿈이었거든요. 그래서 언젠간 꼭 유럽에도 갈 거예요.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모나리자 그림 실물 영접 한번 해야죠.”
“모나리자?”
“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품이잖아요. 기대돼요.”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대에 찬 목소리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화실 벽에 고정해,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던 작품이잖아요. 자화상 혹은 연인……. 모델이 무엇이든 무척 아끼는 사람일 거예요.”
태경은 달싹이는 유정의 입술을 지그시 쳐다봤다.
언젠가 베토벤에 대해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겹쳐 들렸다. 그녀다운 낭만적인 사고였다.
그는 정장 바지에 손을 넣고 넘실대는 물결을 무심히 쳐다봤다.
“별거 없어요.”
단조로운 투에 유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경 씨는 봤어요?”
“네. 잘 안 보여요. 크기도 유정 씨 생각보다 작을 거예요.”
프랑스에 있던 때, 그와 함께 있고 싶어 하던 에스텔의 고집으로 맡게 된 경호 임무 때문에 갔다. 그림은 사람이 벌레처럼 득실거려 가까이 갈 수도 없었기에 손톱만 한 크기로 보였다.
게다가 어떤 사람은 그림으로도 경이로운 느낌을 받는다지만, 오래된 것일수록 감흥이 떨어지는 그로선 예술 작품 역시 매한가지였다. 정작 그곳에 가길 원했던 에스텔도 그림은커녕 그에게만 시선을 고정했었다.
“액자 위에 방탄유리를 끼워서 반사광 때문에 더 안 보여요.”
유정이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가를 찌푸렸다.
“그렇구나……. 직접 본 사람 후기는 처음 들어 보네요. 근데 너무 기대치 떨어뜨리는 거 아니에요?”
“직접 보면 실망하니까 미리 아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유정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반박도 나오지 않았다.
“언제 갈지도 모르는걸요.”
“가고 싶을 때 가면 돼요.”
태경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 그녀에게로 상체를 숙였다.
“언제가 좋아요?”
나직이 묻는 말과 함께 그녀의 목에 목걸이가 걸렸다.
낯설고 차가운 촉감에 손을 먼저 올린 유정은 검지와 중지 끝에 만져지는 펜던트에 놀라며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데이지 모양의 작은 다이아몬드 밑에 물방울 모양의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툭 떨어진 듯 보이는 펜던트였다.
“……태경 씨?”
유정이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자, 태경이 펜던트 옆 툭 튀어나온 앙증맞은 뼈를 문지르며 시선을 맞췄다.
“빼놓지 말고 계속 하고 있어요.”
“…너무…… 예뻐요.”
유정이 목걸이를 매만지며 떨리는 입술로 말하자, 태경이 똑같이 답했다.
“그래요. 예뻐요.”
그는 유정을 지그시 쳐다봤다.
유정은 다시 고개를 숙여 목걸이를 확인했다. 얇은 체인이 주는 차가운 감촉이 아직도 낯설었다. 역시나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남자에게서 사랑을 느꼈다. 참 이상하고도 설레는 감격이었다.
“……고마워요. 항상 어디든 하고 다닐게요.”
수줍게 눈을 접어 웃은 유정이 뒤꿈치를 살짝 들어,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사춘기 풋내기처럼 어설픈 입맞춤에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박혔다.
유정은 분홍빛으로 물든 얼굴을 정면으로 돌리며 아름다운 야경을 바라봤다.
“모든 게 아름다워요.”
꿈을 꾸는 표정으로, 유정은 목걸이를 매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경의 시야에서 그녀를 제외한 주변 환경 모두가 사라졌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남자를 주워 와, 먹이고 보살핀 그녀의 사랑은 역시나 남들과 같았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는데도 모든 게 아름답다며 자애로운 듯이 굴지.
그런데.
그런데도 왜 서유정의 사랑은 불쾌하지 않지.
심지어 그녀는 사랑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에게 들러붙은 인간들은 누구나 그 이해 못 할 감정을 강요했는데.
태경은 줄곧 아무 말 없이 미소 짓는 유정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머리에 총구가 붙은 것도 아닌데 고작 그녀의 미소에 심장이 이상해졌다. 저가 준 것 말고는 전부 낡고 허름한 여자가 여기에서 제일 눈부셨다.
그는 맥없이 들고 있던 진저에일을 마셨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잡아끄는 유정을 응시했다. 빌딩의 인위적인 빛이 아닌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더 환하게 비추었다.
그녀의 월광 소나타가 귓가에 흐르는 밤이라고, 태경은 생각했다.
엉망으로 두들겨 맞은 남자가 대리석 계단으로 굴러떨어졌다.
한참을 굴러 바닥에 부딪힌 남자가 힘겹게 몸을 뒤집어 숨을 내쉬었다.
멀쩡히 숨 쉬는 걸 계단 위에서 확인한 발렌틴은 남자를 걷어찬 구두에 흠집이 났는지 살펴보며 실내로 터벅터벅 들어갔다.
그는 원목 수납장 위, 화병에 꽂힌 꽃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뒤돌았다.
“이딴 것 좀 다 치워.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니까.”
고용인들이 소리 없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집 안에 있는 생화는 다 치우기 시작했다.
발렌틴은 창백하고 너저분한 눈동자를 감으며 머리칼을 두 손으로 쓸어 넘겼다.
요즘 매분 매초가 아니꼬워서 몸이 근질거렸다.
어째 머리가 커질수록 어릴 때보다 더 제약이 걸리는 게 많았다.
세르게이는 집구석에 들어와 정치계 뒷구멍이나 빨라는데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돈만 불리며 하고 싶은 대로 살면 안 되나? 굳이 왜 남의 뒷구멍 빨며 살아야 돼. 용의 머리가 안 되면 뱀의 머리가 되면 되지.
발렌틴은 갈수록 연약한 듯 구는 세르게이가 불쾌하고, 거치적거렸다. 어렸을 땐 남 무서워할 필요 없는 그가 멋있었는데, 지금 하는 꼴을 보면 그냥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힘을 가졌는데 왜 빌빌 기어야 해? 협박을 하고 목을 졸라서라도 기면 안 되지.
“하…….”
레몬색의 기다란 속눈썹이 천천히 들리며 영혼 없는 회안이 드러났다. 복도 끝에서 수행원이 오는 게 보였다. 시건방진 평화 유지군 한 마리 뒤를 캐 오라 했더니 이제야 가져온 모양이었다.
발렌틴은 바로 앞에 다가선 수행원을 사선으로 쳐다봤다.
“뭐 알아 왔어?”
“네. 한국 나이로 29세.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으로 복무 중일 땐 ‘J’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당연히 발렌틴은 몰랐던 사실이지만, 그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하지만 수행원은 알아 봤자 쓸모없는 내용만 줄줄 읊더니 그마저도 충분치 않을 때 입을 다물었다.
가족이고 뭐고 중요한 기록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발렌틴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거친 숨을 흘렸다.
“그러니까…… 그놈은 내 모든 걸 알고 있는데, 나는 그 새끼를 낳은 부모조차 모른다는 거 아니야.”
“평화 유지군 내 그가 속한 부대의 기록 자체는 시스템 방어벽이 높아…….”
“다 필요 없으니까, 뭐든 약점을 가져오라고! 그 새끼가 벌벌 떠는 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행원이 멈칫하며 고개를 작게 숙였다.
핏줄 선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발렌틴은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쳐다봤다.
“……세르게이 쪽 사람 한 번만 더 찾아오면 그냥 죽여서 묻어.”
혼잣말처럼 나온 말을 끝으로 돌아선 발렌틴은 양쪽으로 열린 방 문틈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렇게 조명도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 잠식되듯 사라졌다.
* * *
주태경은 제 품에서 잠든 여자의 이마를 쓸어 만졌다.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고인 얼굴은 무슨 꿈을 꾸는지 콧잔등에 주름이 팼다. 그녀는 제게 밤새 얽매여서 자세 한 번 마음 편히 고치지 못했다. 몇 번 탈출을 시도하길래 일부러 더 꽉 잡아챘다. 그랬더니 잠을 깨운 줄 알았는지 허둥지둥하는 꼴이라니. 그녀는 끝내 몸을 숨길 곳이 없자 그의 턱 밑에 얼굴을 파묻는 선택을 했다.
고사리손은 얌전히 앞으로 모은 채로. 포기하니 마음이 편했는지 금세 숙면에 들었다.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들릴 때쯤, 태경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상황에 잠 같은 게 올 리가 없지. 원래도 잠귀가 더럽게 밝아 수면 시간이 길지도 않았다. 그런다고 수면의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태경은 제 가슴팍에 가지런히 모인 고사리손에다 닥치는 대로 입을 맞췄다. 객실의 훈기는 모조리 먹어 치웠는지 뜨뜻하고 말랑한 촉감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반응이 돌아오지도 않는데 손바닥에 코를 비비며 나른한 숨을 토했다.
좀 비비고 문댔다고 하반신에 열기가 고였다. 유정은 아무것도 모르고 평온히 잠들어 있는데. 기도 안 찼다. 무슨 병신 같은 짓인지. 그런데도 그는 집요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답삭 포개어지는 뜨끈한 허벅지에다 밑을 비비며 신음했다. 깨우고 싶다는 격렬한 열망으로 호흡이 거칠어졌다.
무아지경이던 그의 얼굴이 일순간 사납게 굳어졌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태경은 선연한 경계심이 서린 눈으로 문짝을 쏘아봤다.
불청객인 광현은 불시에 열린 문 사이로 포악한 눈동자를 대면해야 했다. 감각이 동물 같은 놈인 줄은 알았지만, 마중까지 나올 줄이야.
“꺼져요.”
태경이 겨우 어린애 하나 정도 통과할 정도의 틈을 두고 말했다. 그제야 과민함의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됐다.
“나와. 끌어내기 전에.”
“바빠요.”
광현이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그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문을 닫으려고 했다. 광현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재빨리 막지 않았다면 아마 닫혔을 터였다.
대체 이게 무슨 체면 상하는 일인지. 안 그래도 골치 아픈 놈이었다. 그런데 현장 한번 잘못 보냈다가 더 미친놈이 돼서 돌아왔으니, 광현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내가 들어가?”
태경의 눈이 단숨에 날카롭게 갈렸다. 웬만하면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 이 정도로 대치한다는 건, 방금 뱉은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다고 순순히 방에 들일 생각도 없지만. 그때, 안에서 잠투정인지 칭얼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태경의 고개가 곧장 반응했다. 다행히 잠이 깬 건 아닌 듯했다. 오싹하게 가라앉은 눈을 다시 광현에게 박아 넣으며 그가 말했다.
“기다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