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23)화 (23/83)

23화.

“재밌어요?”

태경이었다. 유정은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정리할 새도 없이 돌아봤다. 그가 선베드에 걸터앉아서 쳐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라서 재밌어요. 볼일은 끝났어요?”

“내일 정도면 정리될 거 같아요.”

유정은 재빨리 바닥에 걸터앉았다. 옷이 곧장 물을 먹고 몸에 달라붙었다. 태경의 눈매가 가늘게 허물어졌다. 그녀는 지금 제 모습이 어떤지 모르는지 방긋 웃었다.

그때였다. 분명히 닫고 들어온 발코니 문이 벌컥 열리며 불청객이 침입했다.

“역시 오자마자 여기 계셨네요, 선배님.”

옆구리에 노트북을 끼고 준우가 들어왔다. 그 뒤에는 에이든도 있었다. 태경의 얼굴이 얼핏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나가.”

그 한 마디에 두 사람이 처음부터 없던 사람들처럼 재빨리 등 돌려 나갔다. 그에게 다가가려던 유정의 다리도 갈피를 잃었다. 태경은 닫힌 문을 살벌한 눈빛으로 응시하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목마르진 않아요?”

그가 테이블 위에 놔뒀던 에이드를 내밀었다.

“아, 고마워요.”

유정은 건네받은 에이드를 곧바로 한 모금 마셨다. 이것도 운동이라고 갈증이 났다.

태경은 그녀의 꺾인 목에서 흐른 물방울이 옷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걸 가만히 쳐다봤다.

반쯤 마신 에이드를 내려놓은 유정은 다리를 흔들어 물장구를 쳤다. 발가락 사이로 물이 감기는 게 좋았다. 아이처럼 물장구치는 모습을 태경은 말없이 지켜봤다.

금세 지친 유정이 다리를 위로 빼려다가 몸을 굳혔다. 겨드랑이 사이로 팔이 들어와 몸이 쑥 건져졌다. 저를 안아 올린 태경의 슈트가 물에 흠뻑 젖어 버렸다.

“옷 다 젖어요!”

태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타월을 그녀의 몸에 빈틈없이 둘렀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가요.”

행여 타월이 벌어지기라도 할까 봐 그가 어깨를 꽉 감쌌다. 그러고는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준우와 에이든이 곧장 눈을 피했지만, 태경은 서슬 퍼런 눈을 그들에게 박아 넣으며 응접실을 지나갔다.

* * *

잠깐 저녁을 먹었을 뿐인데, 방이 바뀌었다. 구조는 아까와 비슷했지만 크기는 조금 작았다. 노트북과 전선을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풍경이었다. 둘이 쓰기엔 너무 넓었다. 방도 두 개였다. 고심하던 유정은 상대적으로 작은 방을 선택했다.

“제가 이쪽 방 쓸게요.”

타이를 끌어내리던 그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몸속이 좁아터진 그녀는 선호하는 방 취향도 단칸방인 모양이었다. 하긴, 태경도 좁은 공간이 싫지 않았다. 욕심껏 달라붙고 싶은 건 그녀보다는 제 쪽이었으니까. 이윽고 그가 눈매 끝을 조이며 대답했다.

“그래요.”

유정이 방 안으로 쏙 사라졌다. 끝까지 쳐다보던 태경은 타이를 마저 풀어 의자에 걸었다. 그러고는 거리낌 없이 드레스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짙게 그늘진 눈을 내리떴다.

“저기, 태경 씨.”

유정이 방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없었다. 의자에 슈트가 반듯하게 걸려 있었다. 그녀는 확, 하고 얼굴을 붉히며 자라처럼 목을 넣었다.

핸드폰 충전기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유정은 뒤통수를 긁으면서 옷장 앞에 섰다. 일단 잘 개켜진 가운을 꺼내 입고 허리끈을 조였다. 그런데 불쑥, 태경이 들어왔다. 근육으로 세세하게 갈라진 몸을 드러낸 채로 서슴없이 거리를 좁혀 왔다. 씻고 바로 왔는지 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태경 씨?”

유정은 놀란 나머지 가운 끈을 놓쳐 버렸다.

다가온 태경이 무심히 대답했다.

“네.”

“다른 방 쓰는 거 아니었어요?”

유정이 묻자, 오히려 그가 이해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왜요?”

“그야…… 저는 방이 두 개라 따로 자는 줄 알았거든요.”

“방은 몇 개든 상관없어요.”

방이 아니라 집이 몇 채가 된다 해도 태경은 그녀와 같은 곳을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방이 두 개라 따로 잔다고? 그는 헛웃음을 뱉었다. 역시 마카오의 그 집이 좁은 게 저에게는 더 좋았다.

그런데 유정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뗐다.

“아깐 알겠다고 했잖아요.”

“그건 유정 씨가 여기 쓴다고 하니까.”

아.

유정은 그제야 뜻을 알아먹고 귓불을 붉혔다.

굳이 한 침대를 쓰겠다는 그가 유정의 가운 끈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잡았다.

긴장감에 아랫입술을 깨문 유정이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맨살에 그의 손끝이 닿는데,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그가 시선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눈, 코, 입, 순서대로 얼굴 위를 배회하던 눈동자가 밑으로 다시 내려갔다. 이대로 가운을 젖혀 침대 위로 눕혀 버리고 싶은 욕구가 다리 사이에서부터 들끓는데, 그 뜨거운 기운을 억지로 삼켰다.

밤은 길었다. 저와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조금 들떠 보이는 그녀를, 아직은 그렇게 두고 싶었다.

힘줄이 곧게 돋아난 손으로 가운을 여미고 끈까지 꽉 묶어 준 태경이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앙다문 유정의 목덜미가 붉었다.

가운을 풀어헤친 것도 아니고, 도리어 덮어 줬는데.

순간 동공이 조금 확장됐다가 줄어든 태경이 그녀의 어깨를 둥글게 매만지며 뜨거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솜털 보송한 살점을 혀로 핥아 올리며 허기진 욕구를 채웠다. 달게 씹고 싶은 욕구마저 삼키고 가볍게 핥으며 가느다란 허리를 감쌌다.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더 꽉 깨문 유정은 제 목덜미에서 멀어진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와인 좋아해요?”

그가 묻자, 멀거니 보던 유정이 혹시 그가 좋아해서 물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태경 씨는 좋아해요?”

“술은 다 똑같아요.”

잘 취하지 않으니 먹는 의미가 없다는 그로선 모든 술이 다 똑같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유정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지금은 마시고 싶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니 유리창 너머로 번쩍번쩍한 야경이 보였다.

태경의 생각대로 유정은 그와 여행 온 느낌을 다분히 받고 있었다. 일만 아니면 며칠이고 있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였으나,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흘렀다.

하루 묵는 것도 좋은 초호화 호텔이어도, 오늘 내내 실내에만 있었다. 유정은 그게 못내 아쉬웠다.

동경의 눈빛으로 바깥 풍경을 보는 유정을 지켜보던 태경이 손을 뻗었다.

그는 저가 직접 묶어 주었던 가운 끈을 잡아당겨 단숨에 풀었다.

깜짝 놀란 유정이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자, 그가 상체를 숙여 유정의 옷을 꺼내 들었다.

“옷 입어요.”

“네?”

“나가요. 아직 잘 시간 아니잖아.”

태경은 시간을 확인하며 머리와 상체의 물기를 대충 털어 냈다.

얼떨결에 나갈 준비를 하게 된 유정은 그의 손을 잡고 프레지던트 룸으로 올라갔다.

응접실 깊숙이 들어가, 테이블 위에 놓인 차 키 여러 개 중 하나를 집은 태경이 몸을 돌리자,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던 광현이 그와 유정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어디가?”

그러다 유정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광현은 태경만 알아들을 수 있게 일 얘기를 했다.

“새벽에 현장 가야 하는 거 알지. 제시간에 들어와.”

광현의 말에 반응한 건 유정이었다. 새벽에다 현장이라고 하면 밖일 텐데, 지난번 성당 결혼식장 같은 위험한 일인 건 아닌지 불쑥 걱정됐다.

“저기, 혹시…… 위험한 일인가요?”

광현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태경을 쳐다보자, 유정은 확신했다.

그가 남다른 체력인 건 알지만, 거기에는 본인의 인내심도 한몫했을 터였다. 얼마큼 다쳤었는지 직장에서도 말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태경을 대신해 말을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느꼈다.

“태경 씨, 아주 크게 다쳤거든요. 피도 많이 나고.”

태경은 피식 웃었다. 뭐가 됐건 그녀가 여기 있는 누구와 말을 섞는 상황에 짜증이 치밀던 참이었는데. 조심스럽고 단호한 얼굴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아, 바지 속이 간질간질했다. 그렇게 봐 놓고도 그녀는 아직도 주태경을 모른다.

“너 어디 다쳤어?”

마카오에서의 임무는 그저 감시 역할이어서 몸을 쓸 상황도 없었다. 그래서 더 유정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한 광현이 무신경하게 묻자, 유정이 다급히 말을 덧붙여 설득했다.

“저희 집에 계속 있었던 것도 부상이 너무 심해서 그런 거였거든요.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지금 괜찮아 보여도 그때 일이 오래된 것도 아니고, 위험한 일은…… 무리지 않을까요?”

컴퓨터랑 노트북이 줄 이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서류로 얼굴을 가리고 선잠에 빠졌던 준우가 고개를 휙 내렸다. 그 바람에 글자가 빼곡한 용지들이 펄럭이며 바닥에 후드득 떨어지는데,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정을 쳐다보는 준우의 표정이 이상했다.

광현도 마찬가지였다. 주태경이 칼 좀 맞았다고 몸져누울 인간이 아닌 걸 아는 이들의 반응이었다.

손아귀로 얼굴 반절을 가리며 입매를 억누르고 있던 태경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네. 나 부상잔데.”

유정이 안쓰러운 눈길로 태경을 바라봤다.

“꼴을 보니 한가해 보이는데 강준우 보내요.”

비뚜름하게 웃은 태경은 유정의 손을 잡고 프레지던트 룸을 나섰다.

* * *

태경이 운전하는 새까맣고 날렵한 차를 탄 채 호텔 반대편에 도착한 유정은 호텔에서 보던 풍경과는 또 다른 느낌에 감탄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장식한 펍 사이를 거닐며 길거리 음식을 먹기도 하고, 밍밍한 맥주도 마시며 여행 기분을 제대로 낸 그녀는 고층 빌딩과 그 빌딩의 반짝임을 담고 있는 바다를 배경으로 난간에 기댔다.

이윽고 태경이 사다 준 진저에일을 마시며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한국을 떠난 지 꽤 됐지만 이렇게 여행을 목적으로 즐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온 타국에서 마음 놓고 놀 생각은 못 했던 것 같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은 그녀의 어릴 적 꿈은 세계 여행이었다. 그러다 피아노를 배우고 나서는 유럽 여행을 꿈꾸게 되었다. 독일 콩쿠르, 이탈리아의 성당, 프랑스의 박물관……. 막막한 현실에 여러 바람들은 좌절됐지만, 그나마 가능성 있는 것들은 여전히 놓지 않았다.

“고마워요. 계속 마카오에 있었으면서도 이제야 진짜 해외에 놀러 온 기분이네요.”

유정이 웃으며 말하자, 태경이 그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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