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지아가 껍질 벗긴 오렌지를 주며 물었다. 태경이 거론되자마자 유정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 고민이 드러났다. 지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주일에 몇 번 봐?”
남자란 너무 자주 보면 소홀해지고, 안 보면 마음이 멀어지는 단순한 생명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남자와 연애를 하려면 어느 정도 머리를 써 가며 만나야 한다는 거지. 염려하는 지아의 속내도 모르고 이 숙맥은 눈을 댕그랗게 뜨고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매일 보는데.”
지아는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같이 살아?”
유정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을 내리뜨자, 지아는 기가 막혔다.
“잤어?”
질문이 노골적이었다. 사실 만난 지 오래되지도 않은 남자와 밤을 보냈다고 해도 웬만하면 감추기 마련이다. 일종의 이미지 관리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남자 경험도 없는 주제에 유정은 담담한 표정으로 달아오른 볼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긍정이었다.
순진한 애를 아주 다 털어먹었구만. 지아는 한 마디 쏴붙이려다 참았다. 하긴, 그때 본 남자는 유정에게 미쳐 있는 수준이었다. 징글징글하다 싶을 정도로 서유정에게 고정돼 있던 시선. 그건 의식해서 빚어진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둘이 완전히 서로에게 미친 모양이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앉는다더니. 이러다 결혼도 불쑥해 버리는 거 아니야? 나 놀라서 기절하기 전에 알려 줘야 해.”
거리낄 것 없이 사랑에 몸을 던져 봤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수준인 지아는 좀 부럽기도 했다.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런데 유정의 대답은 싱겁기만 했다.
끝까지 간 관계가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 지아의 콧잔등에 주름이 깊게 팼다.
“그럼 무슨 사인데?”
“모르겠어.”
유정이 오렌지 주스에 꽂힌 빨대를 씹어 물었다.
“설마 그 새끼 잠수 탔어?”
지아의 말투가 확 거칠어졌다. 남자의 목적은 하나같이 똑같으니 뭐,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서유정처럼 순진한 애를 그렇게 취급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날뛸 것 같은 지아를 보며 유정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나 그 사람 사랑하는 거 같아.”
보아하니 잠은 자 놓고 그 이상 발전이 없는 거 같은데. 그건 또 그것대로 이상했다. 남자가 유정을 보는 눈은 거의 맛이 가 있었는데. 지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서?”
“근데 그 사람은 아니래.”
“뭐어?!”
지아는 펄쩍 뛰었다.
“이거 봐. 잘생긴 놈은 얼굴값 한다니까? 너 바보야? 같이 살긴 왜 같이 살아? 와, 이 새끼. 너한테 푹 빠진 줄 알았는데 나까지 깜빡 속았네?”
유정은 빨대를 열심히 휘저었다.
‘아니요.’
태경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차분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물에 던져진 것처럼 잠깐 숨이 안 쉬어지는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을 하는 그는 못 참겠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으며, 손길은 뜨겁고 조심스러웠다.
“날 좋아한다고 했어.”
좋아하는 것과 사랑은 조금 다른 거지만 결은 같으니까. 유정은 태경을 믿기로 했다.
그는 그녀를 소중히 대했다. 그가 왜 그렇게 확신에 찬 얼굴로 부정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 내려선 안 될 것 같았다. 형용할 수 없는 생각이 가슴에 들어찼다.
“그런데 사랑은 아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널 갖고 노는 거지.”
“안 사랑한다기보단…….”
말하던 중간에 초인종이 울렸다. 워낙에 경계심이 많은 유정이 말을 멈추고 힐긋, 돌아봤다. 그러자 지아가 손을 내저으며 안심시켰다.
“아아, 룸서비스 시켜 놨거든.”
유정은 객실 문을 열어 주러 가는 지아를 따라갔다. 그런데 문 앞에는 예상과 전혀 다른 인물이 서 있었다. 지아의 얼굴이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졌지만, 유정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태경 씨.”
지아는 어떻게 알고 왔냐, 왜 묻지도 않고 왔냐, 뭐 그런 질문도 없이 반기고 드는 유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애가 이 지경이 됐어. 지아가 팔짱을 끼고 남자를 흘겨봤지만, 애석하게도 태경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데리러 왔어요. 시간이 늦어서. 좀 더 있고 싶어요?”
태경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을 찌르고 있는 머리카락 한 올을 걷어 내며 물었다. 유정은 냉큼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이제 가아죠. 언니, 나갈게.”
밥은 먹고 가지, 하고 붙잡으려던 지아는 이내 생각을 고쳤다. 좀 더 있겠느냐고 묻긴 했지만 남자는 더 두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고, 가고 싶은 건 유정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래. 조심해서 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일부러 들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둘 다 그걸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유정이 가방을 챙겨 나왔다. 그와 함께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가면서 괜히 두근거렸다. 호화로운 호텔이 태경과 잘 어울렸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쪽지 봤어요.”
지아가 유정에게 준 쪽지가 협탁 위에 놓인 걸 봤다.
“계속 기다렸어요. 할 말이 있어서.”
친구와 보내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까지였다. 그는 인내심이 없으므로.
“뭔데요?”
“내일 잠깐 홍콩 가야 하거든요. 하루 일정이니까 같이 가요.”
유정은 멈칫했다. 지난번처럼 집을 잠깐 비운다는 말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함께였다.
“같이요?”
“혼자 두기 싫어요.”
태경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유정은 담담하게 생각해 봤다. 그의 불안함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오해 때문이긴 하지만 그의 동료가 집에 찾아와 큰일 날 뻔했으니.
“그래요. 그럼.”
유정은 별다른 내색 없이 수긍했다.
태경이 그녀의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큰 덩치가 간지럽게 얼굴을 비벼 오자, 유정은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온통 빨개진 얼굴로.
* * *
유정은 처음으로 병가를 냈다.
정작 진짜 아플 때는 이를 악물고 출근했었는데. 그런 성실함이 오늘 같은 날 도움이 되었다. 아파서 하루 쉬고 싶다는 말에 고용주가 걱정까지 했으니. 조금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태경은 그녀를 호텔에 두고 어디론가 갔다. 마치 먹이를 구하러 가는 동안 위험하지 않도록 안전한 곳에 새끼를 옮겨 두는 어미 새처럼.
유정은 굉장히 넓은 프레지던트 객실을 쭉 둘러봤다. 지아의 호텔도 넓고 좋았는데, 여긴 말도 못 하게 고급스러웠다. 물론 객실 풍경이 휴식을 취하는 용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쓰임새를 알 수 없는 노트북이 나뒹굴었고, 바닥에는 어디에 연결된 건지 찾을 수가 없는 전선이 지뢰처럼 분포해 있었다. 행여 밟기라도 할까 봐 유정은 조심조심 움직였다.
발코니 밖의 풍경은 정말 감탄만 나왔다. 한낮인데도 조명 덕분에 물이 푸른빛으로 일렁였다. 아래에서 보면 높아 보이던 고층 빌딩도 여기선 작게만 보였다.
대체 얼마나 높은 걸까. 지아가 묵는 호텔 높이보다 훨씬 높았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봤다 현기증을 느낀 유정은 얼른 발을 물렸다.
그 모습이 응접실에서 다 보였다. 탄산수 뚜껑을 돌려 따던 에이든이 터무니없이 작고 가냘픈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무슨 사이길래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
“선배님 여자친구.”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답한 준우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대체 어쩌자고 여기에 데려다 놨는지. 팀장이 알면 한 소리 들을 텐데. 그런데 막상 혼자 있는 걸 보니 좀 안쓰럽기도 했다. 준우는 허벅지에 놓았던 노트북을 옆으로 치우고 일어났다.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고 있는데도 그녀는 기척조차 못 느끼는 눈치였다.
여자를 보고 있자면, 주태경과는 아주 당혹스러운 조합이었다. 주먹만 한 얼굴은 군데군데 실핏줄이 비칠 정도로 하얬다. 커다란 눈동자는 감수성이 풍부할 것으로 추정되고. 비교적 마른 몸 중에서도 손목과 발목은 잘못 건드렸다간 부러질 것처럼 연약했다.
전체적으로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유형인데. 그게 절묘하게 주태경에게는 안 먹히는 부분이었다. 그는 특별히 여자 취향을 정해 두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누굴 보호한다는 개념이란 게 없었다. 작전상 구출 외에는.
그러니 외모에서 뻑이 간 건 아니란 소린데.
대체 여자의 어떤 부분이 그를 사로잡은 걸까. 현재로선 미지수였다.
“수영 잘하세요?”
발끝으로 물을 툭툭 건드리는 모습을 보며 준우가 물었다. 유정은 화들짝 놀라며 돌아봤다.
“네? 아, 할 줄 알긴 한데…….”
“다행이다. 여기 꽤 깊거든요. 여분 옷 있으세요? 수영복 대여할까요?”
“아니에요. 구경만 해도 좋아요.”
“선배님은 편히 놀고 계시라고 하셨던 거 같은데.”
준우는 난처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불편하게 계시면 오히려 저희가 깨지거든요.”
주태경은 나가면서도 경고의 눈초리를 보냈다. 대체 누가 이 여잘 건드린다고. 그렇게 걱정되면 데려나 오지 말든가. 진귀한 보석이라도 떠맡게 된 기분이었다.
유정은 해맑게 말하는 준우의 안색에 근심이 스치는 걸 발견했다. 그 바람에 얼떨결에 여분 옷이 있다고 말해 버렸다. 사실 수영이 꼭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 잘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수영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중학생 때 보름간 배운 게 전부였으니, 몸이 그걸 기억할 리 없었다. 그래도 한가롭게 노닥거리는 일이 오랜만이어서, 유정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물속에서 파닥거리며 잠영을 하다가 숨을 쉬기 위해 물 밖으로 튀어 올랐다. 헉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허리를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