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20)화 (20/83)

20화.

배에 두고 내린 그림은 터미널 센터에 연락해 곧장 전달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편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 상황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던 재이는 집에 도착해, 일하는 유정을 보며 더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오빠는 위험했다. 그게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한국에 있다가 갑자기 마카오에 온 이유가 뭘까.

유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재이는 퇴근한 유정을 뒤늦게 따라가, 선물을 줬다.

“그림이에요. 여행 갔다가 샀어요. 집에서 주려고 했는데, 깜빡해서.”

“아…… 정말 감사드려요.”

이렇게 받기만 해서 난감하다는 듯 유정이 당황하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그림을 살펴보던 그녀는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예뻐요. 저는 재이 씨한테 뭐 드릴 게 없어서……, 혹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 도와드릴게요.”

순진무구한 웃음을 바라보며 재이는 더욱 걱정스러워졌다.

“……집 가는 거죠? 데려다드릴게요. 산책도 할 겸.”

유정은 잠시 멈칫했으나, 재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림이 마음에 드는지 좀처럼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심 뿌듯해진 재이는 집에 다다르자, 담벼락 너머를 힐긋 눈짓했다.

“오빠는 아직 집에 계세요?”

유정은 당황했다. 그를 친오빠라고 거짓말한 게 이제야 떠올랐다. 어쩌면 이대로 알게 두는 게 나을 수도 있지만, 정정하고 싶었다. 게다가 그는 거짓말을 영 싫어하는 모양이니.

“재이 씨. 그때 본 사람, 사실은 오빠 아니에요.”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유정은 그저 자신이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표했다. 고백을 한 뒤라 그런지 남에게 말하는 건 무척이나 쉬웠다.

크게 충격 받은 재이는 아연실색했다. 재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속인 것에 대해 미안해진 유정이 설명하려 입을 뗀 순간, 문득 건너편에서 시선이 갔다.

태경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표정하게 서 있던 그가 이윽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가 당연히 집에 있는 줄 알았던 유정은 재이를 살펴봤다.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

“그럼 이만 들어가 볼게요.”

재이는 몸을 돌리는 유정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태경의 시선이 따라 내려갔다. 저를 발견하자 그녀의 눈에 서리던 반가움, 기쁨 같은 것들을 포착해서 기분이 좋은 참이었다. 고용주의 아들이라는 놈이 쓸데없는 친절을 베푸는 것쯤이야 참아 줄 수 있었다. 그 기분은 유정이 놈에게 손목을 잡히면서 바닥에 처박혔지만.

그럼 그렇지.

그저 호의일 뿐이라면 병신같이 집 앞을 서성일 리 없다. 집으로 들여보내며 아쉬운 얼굴을 하지도 않을 거고. 한 번쯤은 예상을 피해 가면 좋을 텐데, 언제나 들어맞아서 시시하기까지 했다.

“잠깐만요.”

다급한 목소리에 유정이 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재이가 손목을 놓아줬지만, 태경은 재이의 손을 끊어 먹을 듯 쳐다봤다.

아직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유정이 태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하다 들어갈게요. 먼저 가요.”

꺼져 줘야 하는 인물이 명확한데 그녀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미간을 설핏 좁힌 태경이 유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해요. 얘기.”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자기 앞에서 하란 거였다. 별 반응 없이 집에 들어갈 줄 알았던 그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자, 유정은 조금 놀랐다.

그런데 그 순간, 무슨 뜻인지 모를 재이의 질문이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쪽, 뭐 하는 사람이에요?”

너무 광활한 질문이었다.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린 태경이 입을 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는 유정의 동그란 어깨를 끌어당겨,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유정 씨. 거절은 확실히 해야죠. 어설프게 하면 말귀 못 알아먹는 척 주제도 모르고 들러붙는 거예요.”

기다란 눈매 속 눈동자가 재이의 굳은 얼굴에 닿았다.

도르르 내려간 재이의 시선 끝에, 놀란 기색이 역력한 유정이 걸렸다.

“……갈게요.”

재이는 숨을 길게 내쉬며 눈을 질끈 감고 뒤를 돌았다.

하지도 않은 고백에 거절이라도 당할까 서둘러 가는 모습에 태경이 유정에게서 몸을 뗐다.

그의 곧은 턱선을 올려다보던 유정이 천천히 입을 뗐다.

“오해예요. 재이 씨랑 저는 아무 감정 없어요.”

재이가 저를 좋아했었나 문득 생각은 들었지만, 태경의 반응이 더 크게 와닿았다. 그에게서 순간 생소한 감정이 느껴졌다.

“유정 씨는 착하니까 경계 없는 건 알겠는데, 방금 그걸 구경만 하는 건 내가…….”

차분한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는 직설적이고 조금은 난잡한 표현을 삼키며 아무 말 없이 웃었다.

유정이 잠시 넋을 놓고 쳐다보다가 묘한 느낌을 받고 정신을 차렸다.

아름다운 미소인데, 뭐랄까.

되게 나빠 보인다.

유정은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재이 씨가 날 좋아하는 줄 알고 질투했던 걸까?

속이 간지러워 잔기침이 나왔다.

“……저녁 먹고 잠깐 밖에 나갈래요? 군것질도 떨어졌고, 내일 먹을 장도 봐요.”

쑥스러워 말을 돌리는 그녀를 지켜보던 그가 유정의 하얀 볼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그래요.”

* * *

유정이 재이에게 받은 그림은 저녁 준비를 돕던 태경이 실수로 물을 엎질러,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가 좋아하지도 않는 거 같아서, 유정은 별말 하지 않았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가선 언제나처럼 다음 날 먹을 음식을 위해 장을 보고, 눈 감고도 걸어갈 길을 따라 집으로 향했다.

짐을 잔뜩 들고 있는 태경에 비해 그가 고른 레몬 맛 사탕 봉지만 들고 있던 유정은 어둑한 저녁 하늘을 올려다봤다.

동네 어귀에서 풍기는 밥 짓는 냄새, 물웅덩이에서 퍼지는 흙 향. 모든 게 어제와 같고, 그제와 같았다. 이런 익숙함에서 오는 떨림까지도.

유정은 태경을 힐긋 쳐다봤다. 절친인 지아를 소개해 주고, 그의 동료들도 소개받은 후로 전보다 연결 고리가 더 짙어진 느낌이었다.

미세하게 한 치 떨어진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손등에 조금씩 부딪히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한 번씩 그의 커다란 손아귀에 잡힐 때면, 힘을 주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조여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씻은 유정은 냉장고를 열어 태경이 정리해 놓은 것들을 확인했다. 좁은 수납공간을 알차게 채운 그의 깔끔함에 또 놀라며 냉장고 문을 닫자,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도 멎었다.

그의 샤워가 끝난 걸 알게 된 유정은 잘 준비를 위해 이부자리를 깔고 문단속을 했다.

그런데 문이 꽉 닫히지 않고 자꾸만 틈새가 벌어졌다. 문고리를 두 손으로 잡고, 있는 힘껏 당긴 유정은 반동으로 인해 머리를 꿍 부딪혔다.

“아!”

외마디 비명에 욕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바지만 입은 태경이 쿵쿵 걸어왔다.

유정에게 가까이 다가선 그가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어 당겼다. 그녀를 살펴보는 기다란 눈매가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왜요.”

“문이 잘 안 닫혀서요. 머리를 찧었어요.”

안 그래도 허술한 문인데 광현이 억지로 연 후부터 고장 난 듯했다.

태경은 반쯤 열린 문을 보며 문고리를 잡았다. 유정이 두 손으로 해도 꽉 안 닫히던 문이 그가 한 손으로 잡아당기자 쾅, 닫혔다.

처음부터 이 집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 하나가 바로 현관문이었다. 수리할 생각 말고 그냥 부술까, 생각하며 문을 쳐다보는데, 유정은 그가 걱정하는 줄로만 알고 서둘러 문고리를 잠갔다.

“태경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부술 듯 문을 쳐다보던 그가 유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는 괜찮아요?”

유정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싼 그가 정수리를 확인했다.

민망한 유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살짝 부딪혔을 뿐이에요. 멀쩡해요.”

허둥지둥하다가 이제야 정신이 똑바로 돌아온 그녀의 시야에 군더더기 없이 떡 벌어진 상체가 들어왔다. 왠지 훔쳐보는 거 같아, 눈을 올리자 그의 목에 걸쳐 있는 수건이 보였다.

아무래도 머리 말리다가 나온 듯한데, 진짜 그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던지라 더 민망해졌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어도 그는 조금도 허무해하지 않고 그녀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한번 덮으며, 이부자리로 갈 뿐이었다.

태경이 목에 걸친 수건을 베개 위로 내려놓으며 눕자, 유정도 조심스레 그의 옆에 누웠다.

가슴이 뭉글뭉글해져서 좀처럼 설렘을 다잡을 수 없었다.

진짜 별거 아닌 것도 살펴 주는구나. 정작 나는 다친 적도 없는데. 언제 이렇게 됐을까.

어떻게 이렇게, 애틋할 수가 있지.

낮은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던 유정이 몸을 뒤척이며 그를 향해 모로 누웠다.

그러자 팔을 접어 눈을 가리고 있던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유정을 쳐다봤다.

역시나 조금의 기척에도 반응했다.

유정은 자는 척 피하지 않고, 달빛에 비춘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리고 저를 찬찬히 훑는 검은 눈동자에 답했다.

“벽보고 자지 말라면서요.”

“…….”

“……그래서 이제 보고 싶은 쪽으로 자려고요.”

태경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곧이어 그가 유정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그녀 위로 몸을 기울였다. 까만 머리칼이 그녀의 이마를 간질이는 동시에 입이 맞춰졌다.

시원한 민트 향이 훅 밀려왔다. 유정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촘촘한 속눈썹 아래 동공이 몽롱해졌다. 왜 그에게서 나는 숨결이 더 깨끗하고 상쾌하게 느껴질까.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이 아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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