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보상 건은 나중에 따로 말하죠.”
대신 받아 챙겨 그녀에게 쥐여 주면 그만이었다. 제각각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은 준우는 이 어색하고 이상한 분위기를 탈피하려 입을 열었다.
“그, 아무튼 유정 씨 덕분에 선배님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준우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저는 정말 큰일 난 줄 알았거든요. 보통은 시일 내로 돌아오는 분인데.”
“태경 씨가 일을 굉장히 잘하나 봐요.”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귀신 같은 솜씨지. 강준우는 오싹함을 감추고 사람 좋게 웃었다.
“몸도 잘 쓰고 머리도 좋으셔서.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예. 비록 인정 없으시고, 품행이 거칠어서 감정이 결여된 건 아닌가 생각해 본 적도 있…… 윽.”
광현의 주먹이 준우의 무릎을 또 한 번 가격했다. 이번에는 왜 이렇게 눈치를 못 챙기냐는 비난의 눈초리도 뒤따랐다. 준우는 아픈 무릎을 쓱쓱 문지르며 수긍했다. 찌르면 얼음물 나올 것 같은 인간이 모처럼 연애를 해 보겠다는데 적극 협조해야지. 안 그랬다간 무슨 후환이 기다릴 줄 알고.
“태경 씨는 되게 배려심 깊고 친절하고, 따듯하신 분이세요. 아무래도 직업상, 일할 땐 조금 거친 면이 나오나 봐요.”
유정의 말에 준우는 귀를 의심했다. 따듯? 따드읏?
주태경의 귀신 같은 해킹 솜씨에 꽁꽁 감춰 둔 비밀을 다 털린 이들이나 반정부 단체의 계획을 실토하라며 심문당한 놈들이 듣는다면 단체로 들고일어날 평가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콩깍지였다.
준우는 순진한 처자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놈의 콩깍지를 확 벗겨 줘야겠다는 의무감에 불탔다. 하지만, 유정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태경을 목격하고는 그대로 전의를 상실했다.
텅 빈 눈이 빛을 찾을 때는 살기를 머금었을 때뿐인데, 그게 없어도 지금 그의 눈동자는 빛이 났다. 저런 생기를 본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저희 때문에 식사를 못 하고 계시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광현이 발길질로 준우를 단숨에 일으켜 세웠다.
태경은 따라 나가려는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안심할 수 있게 웃어 보였다.
“먹고 있어요. 배웅하고 올게요.”
문을 닫고 나선 태경은 집에서 좀 떨어진 거리에 발을 멈춰 세웠다.
“무슨 개수작이죠?”
음산하고 눅눅한 목소리에 광현과 준우가 뒤를 돌았다.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든 태경의 표정이 곱지 않았다.
유정이 있을 때와는 판이한 그의 거침없는 언행에 준우는 어이가 없었다. 얼빠진 준우를 두고 광현이 답했다.
“네 말대로 민간인 머리에 총을 겨눴는데 그냥 넘어갈 순 없지. 나중에 어떻게 될 줄 알고. 넌 믿어도 민간인은 안 믿으니까. 그리고 네 행동도 영 비정상적이야. 오죽하면 네 꼴 보려고 얘까지 따라왔을까.”
광현이 준우에게 힐긋 눈짓을 주자, 준우는 딴청을 피웠다.
“난민들 노동 착취하고 팔아먹는 놈들 배 타고 들어올 거다. 마카오니까, 네가 감시해. 자세한 건 내일 오전 되면 알 거야.”
말을 마친 광현이 등을 돌리자, 준우도 태경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또 뵙겠습니다. 선배님.”
당연히 돌아오는 인사는 없었다. 익숙한 듯 광현을 따라나선 준우가 조금 전까지 있던 오래된 다세대 주택을 올려다봤다.
보통 남자보다 키도 크고 체격이 좋은 주태경은 창이 확 트이고 천장이 높은 거주지를 선호했다. 한곳에 오래 머무는 성향이 아니어도 옮길 때마다 그 점만큼은 일치했고, 어쩔 수 없이 룸을 같이 써야 할 때면 방 서너 개를 혼자 독차지했을 정도였다. 그러니 머리가 닿을 듯 낮은 천장에, 남자 셋 들어갔다고 미어터지는 집에 그가 머무는 건 신기할 노릇이었다.
“근데, 집이 더 의왼데요. 같이 살아도 고층 저택 사들여서 지내실 줄 알았는데, 이런 깡촌에.”
“싫으면 명령을 해도 거부할 놈이 그럼 억지로 있는 거겠어?”
준우와 별다른 바 없는 소감인 광현이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이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 마음에 든다는 거겠지.”
근처 병원 건물에 다다른 그들은 낡은 계단을 오르고 올라, 옥상에 도착했다.
투두두두두-.
옥상 문을 열기도 전에 헬기 소리가 건물 전체를 울렸다.
광현이 문을 발로 쾅 열자, 진녹색의 커다란 헬기가 맞이하고 있었다. 옷이 바람에 펄럭일 정도로 거센 바람이 일었지만, 그들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다가섰다.
* * *
방해꾼들을 보내고 집 안으로 들어선 태경은 상 앞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는 유정과 시선을 마주했다.
“왜 밥 안 먹고.”
“같이 먹으려고요.”
태경이 그녀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으며 맞은편에 앉는데, 분명 다 식었을 국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잠깐 나간 사이 유정이 데워 온 국을 떠먹은 태경은 입 안에서부터 목구멍까지 뜨뜻해졌다.
‘태경 씨는 되게 배려심 깊고 친절하고, 따듯하신 분이세요.’
이광현과 강준우의 얼빠진 표정도 보이지 않는지, 그녀가 의연하게 꺼냈던 말이 같이 삼켜졌다. 그녀는 강준우가 지껄이는 말 같은 건 조금도 믿지 않았다.
따듯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올 거 같아 수저를 놓고 입을 잠깐 틀어막았다.
입 안에 설탕이 고인 듯 달게 느껴졌다.
저야말로 그런 사람이면서. 나는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인데.
그 우스운 평가를 한 서유정의 믿음이 기껍다.
“그런데…… 왜 직업에 대해 자세히 안 알려 줬어요?”
유정이 머뭇거리며 입을 떼더니 혼잣말을 덧붙였다.
“너무 존경스럽고, 멋있는 일인데.”
듣는 상황의 그로선 허무한 소리를 내놨다. 조곤조곤 얘기하는 입술로 눈을 내린 그가 입을 달싹였다.
“그냥 군인일 뿐이에요.”
이윽고 유정의 어깨로 뻗으려던 손을 내려 빈 물컵에 물을 따라 줬다.
* * *
파도가 넘실거리는 항구.
빨간색의 햇빛 가리개로 뒤덮인 선착장에 심천(深圳)에서 출발한 배가 정박했다. 정박한 배에서는 꽤 많은 사람이 내렸다. 메신저 백을 앞으로 돌려 짐을 확인하던 재이도 육지에 발을 디뎠다.
점차 사업을 넓히는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방문하는 중이던 재이는 이번엔 유정에게 줄 기념품을 준비했다. 그림촌에서 산 어떤 젊은 화가의 그림이었다. 솜사탕처럼 만개한 복사꽃이 유정의 이미지와 어울렸다.
지난번 목걸이 선물은 부담스러울까 봐 거짓말을 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유정이 부담스럽지 않을 선으로 다시 준비했는데, 도통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메신저 백을 한참 뒤적이던 재이는 결국 걸음을 돌려, 다시 정박한 배로 향했다. 사람들은 모두 터미널로 들어가서 아무도 없었다. 앞에서 직원을 기다려도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재이는 배에 올라탔다. 바람은 멎었는데 이상하게도 배가 좌우로 두둥실 움직이는 듯 보였다.
“안 돼……! 아악……!”
어떤 남자가 우악스러운 힘에 의해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새카만 헬멧을 착용하고 특수복을 입은 다른 남성이 그의 등을 깔고 제압했다. 험악스러운 분위기에 저절로 좌석 뒤로 몸을 숨긴 재이가 다시 배에서 내려가려고 할 때, 스니커즈와 미끄러운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다.
쇠창살처럼 서 있는 새카만 남자들의 시선이 단숨에 재이가 있는 쪽으로 꽂혔다.
“우린 아무 잘못도 없어! 놔줘!”
그때, 또 다른 남자가 이미 엎어져 있는 이의 옆에 눕혀졌다.
도대체 뭐지? 재이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좌석 사이로 보이는 작은 틈새로 상황을 지켜봤다. 곧이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스카프로 얼굴을 꽁꽁 싸맨 여자가 화장실에서 튀어나와 옆 통로 계단으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여자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통로에서 커다란 체구의 남자가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누군지 확인한 재이는 당황했다.
저 사람은…… 유정 씨 오빤데.
잘못 봤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착각할 수도 없는 얼굴이었다.
기품 있으면서도 거센 기운으로 걸어 나온 태경은 얼음처럼 굳어 있는 여자를 내리깐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여자가 주춤, 뒤로 도망치려고 할 때 손을 뻗어 여자의 팔을 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여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팔을 내저었지만,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제압당해 엎드려 있던 남자가 그런 모습을 눈에 담으며 태경의 발밑으로 기어갔다.
“제발 여자는 놔줘! 제발……! 차라리 나를 데려가!”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비굴하고도 애절하게 빌었다. 남자가 빌수록 여자의 눈물도 더 짙어졌다.
지켜보던 재이가 가슴이 아플 정도였으나, 태경의 반응은 고요했다.
어쩐지 그의 차분함이 잔악하게 느껴진 재이는 그가 여자를 다른 이에게 휙 넘기는 걸 보고 놀랐다. 조금의 배려도 없는 동작이었다. 여자는 엉엉 울며 두 손을 결박당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태경은 눈을 더 내리깔아, 제 바지 자락을 움켜잡은 남자를 쳐다봤다. 혐오스러움을 내비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날아다니는 날파리, 길거리에 들러붙은 껌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건 안 데려가나?”
발끝으로 남자의 머리통을 차며 제 몸에서 손을 떼게 한 그가 눈매를 좁혔다.
뭘 어떻게 해도 상황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남자는 반항을 포기하고 끌려갔다.
여자고 남자고 엉엉 우는 소리가 배 안을 울렸다. 태경은 초소형 카메라를 들어 그 절망적인 상황을 촬영했다.
어지러운 상황을 틈타 다급히 배에서 내려온 재이는 왠지 속이 울렁거려 입을 틀어막았다.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멀미가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