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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잡하고 다정하게 (18)화 (18/83)

18화.

주태경이라는 남자를 하나 주워다가 치료해 줬을 뿐인데, 그 이후로 유정의 집을 찾는 손님이 부쩍 늘었다. 옛날, 까치가 은혜를 갚으려고 먹이를 물어다 줬던 것처럼. 무료하기 그지없던 타국 생활에 활력이 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유정은 조심스러운 노크를 하고 문 앞에서 인사를 건네는 장정 둘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저녁 밥상을 차릴 무렵에 찾아온 손님이 익숙하지 않은 유정이 둥그런 눈만 깜빡였다. 그래도 한 사람은 아는 얼굴이었다. 첫 만남이 위협적인 침입이었던 탓에 유쾌하진 않았지만. 유정은 그날 밤 준엄했던 이광현을 응시했다.

태경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 두렵진 않았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녀가 의심받을 만한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고, 연락 두절 상태였다는 태경을 데리고 있던 것도 맞았으니. 그는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다. 유정이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처럼.

침묵하는 유정에게 강준우가 붙임성 좋게 다시 한번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아, 네…….”

이광현은 그녀의 다소 미적지근한 반응이 저 때문이라고 판단했는지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과 어울리지 않는 모범생 같은 얼굴에 그늘이 지자, 유정은 더욱더 안심했다.

역시 원래 무례한 사람은 아니었던 거다. 게다가 그 옆에 선 강준우의 강아지처럼 귀엽고 풋풋한 외모도 두려움을 걷어 내는 데 한몫했다. 그 역시 다부진 체격에다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매를 가졌지만, 제법 동글동글한 인상이었다. 머리가 짧은 리젠트 커트를 해 놓으니 영락없이 진돗개 같았다.

유정이 뭐라도 한 마디 붙이려는데, 갑자기 시야에 허름한 현관문이 끼어들었다. 이내 쾅, 하고 문이 닫혔다.

당황한 유정의 시선이 허공을 헤매는데, 귓속으로 엄격한 목소리가 들어찼다.

“유정 씨. 아무한테나 문 열어 주면 안 돼요.”

마치 어린아이를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 하지만……. 머뭇머뭇 반박하려다 말고 유정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을 제외한 다른 감정이 비치지 않았다.

동료와 사이가 좋지 못한 걸까. 하긴, 느닷없이 침입한 남자에게 그는 화가 많이 난 걸로 보였었다. 직장 일에 괜히 참견해서 미움을 자처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문밖에서 들리는 이광현의 퉁명스러운 말에 곧바로 무너졌다.

“우리가 ‘아무나’는 아니잖아?”

“도, 동료분들이신 거 같은데. 일단 안으로 모셔요. 네?”

태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인사라도 하면 그의 세상에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유정은 사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두 사람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감사합니다. 저번 일에 대해 사과하러 왔거든요. 지난번 일은 죄송했습니다.”

목격자나 연루자 입막음은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다. 엄밀히 따지면 서유정에게 사과가 아닌 경고를 하는 게 맞았다.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자칫 표적이 될 수가 있었다. 그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그런데 사과라니. 그것도 저렇게 선량한 얼굴을 하고서.

“무슨…….”

태경은 거칠게 입을 열었지만, 끝내 말을 다 완성하지 못했다. 마지못해 입을 다문 그의 턱이 꽉 맞물리며 부풀어 올랐다. 없는 줄 알았던 그의 인내심이 발동됐다는 사실에 강준우는 적잖이 놀랐지만, 낌새도 못 차린 유정이 볼을 긁으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네. 그때는 조금…… 놀랐어요. 누추하지만, 일단 들어오셔서 얘기 나누시겠어요?”

유정이 방 안으로 팔을 뻗으며 웃었다. 안 그래도 다리가 저리던 참이라 준우는 냉큼 대꾸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장정 셋을 들이자 곧장 방이 꽉 찼다. 집이 작은 걸까, 저들이 큰 걸까. 둘 다겠지. 유정이 혀를 내두르는 사이 남자 둘의 시선은 저녁 상차림을 향했다.

“저녁 먹으려던 차였는데. 같이 드실래요?”

그녀의 호의는 고마웠지만, 사냥개처럼 붙어서 엄호하는 주태경 때문에 글렀다. 같이 밥까지 먹었다간 물어뜯을 기세였다.

“괜찮습니다. 저흰 먹고 왔어요.”

대신 준우가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거요. 별 건 아니지만.”

“아, 고마워요.”

하지만 그녀가 받아 들기도 전에 과일 바구니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빼앗듯이 덥석, 받아 든 태경이 성큼성큼 걸어가 싱크대 위에 던지듯 내려놨다. 그러고는 다시 유정의 옆자리를 사수했다. 그녀는 무안한 손을 바지에 슥슥 닦았다.

“커피 타 드릴게요.”

번거롭게 뭐하러. 만류하려다 말고 태경은 이내 입을 닫았다. 손님 대접을 제대로 안 하고 보냈다간 내내 마음에 두고 있을 여자였다. 결국 그는 팔짱을 끼고 앉아 이광현과 강준우를 주시했다. 많은 게 읽히는 눈이었다. 대부분이 입에 담지도 못할 험악한 욕설이었지만.

이윽고 유정이 커피를 들고 돌아왔다. 강준우는 애써 태경의 눈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주태경 선배님의 후임, 강준우라고 합니다. 이쪽은 저희 팀 이광현 팀장님이십니다.”

그의 이름 뒤에는 따로 직함이 없었다. 그에 비해 이광현은 팀장이라는 직급이고. 그럼 지금까지 태경이 상사에게 버릇없이 굴었다는 거다. 유정의 안색이 일순간 파랗게 질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저는 서유정이에요. 반가워요.”

“네. 선배님의 여자 친……!”

눈치 없는 입을 제멋대로 움직이던 준우의 얼굴에서 갑자기 핏기가 싹 가셨다. 광현의 주먹에 무릎이 강타당한 탓이었다. 다행히 온통 태경의 하극상에 생각이 쏠린 유정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군인 분들이신데 직함이 평범하네요.”

“아. 저희는. 독립적인 그룹이라서, 네. 군인은 맞습니다.”

고통으로 강준우의 말이 스타카토로 끊겨서 나왔지만, 능숙한 미소로 가렸다.

“평화 유지군 들어 보셨을까요? 여러 나라에서 파견된 연합군 부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확히는 평화 유지군 내 국정원 역할이지만. 아무리 애인이어도 주태경이 블랙스완 소속임을 밝혔을 리 없었다. 적당한 선에서 끊어 줘야 했다.

“정말요? 군인이라고만 들었는데…… 태경 씨, 정말 훌륭한 일 하는 사람이었구나.”

유정이 감탄과 경이가 섞인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정말 기본적인 정보마저도 알려 주지 않았단 거다. 저러고 어떻게 연애를 하지. 하지만 개인사를 공유하지 않는 애인을 향한 서유정의 눈은 여전히 애정과 친근감으로 가득했다. 저 정도는 돼야 주태경을 만나는구나, 싶었다.

태경은 그녀가 강준우의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경청하는 듯하자, 결국 직접 수저를 쥐여 줬다. 반찬도 가깝게 밀어 주고.

“먹으면서 들어요.”

새틴처럼 부드러운 음성에 준우는 순간 돌처럼 굳었다. 저 인간은 남 입에 들어가는 밥걱정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차라리 내장이 터지도록 음식을 쑤셔 넣는 고문을 하는 거면 모를까. 준우가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게 주태경이 맞는지 묻는 표정으로 광현을 쳐다봤다. 경험자인 광현은 빨리 적응하라는 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동료가 위험에 처한 줄 알고 실수를 범했습니다.”

광현이 특유의 정중한 태도로 말하자, 유정은 민망해졌다.

“괜찮아요. 충분히 오해하셨을 만한 상황이었잖아요. 더는 사과 안 하셔도 돼요.”

“민간인 머리에 총을 겨눴는데, 보상이 고작 저거라면 큰 실수지.”

태경이 덩그러니 놓인 과일 바구니를 눈짓하며 빈정거렸다. 저만 하면 악마 같은 주둥아리치고는 약과였다. 광현은 무시하는 선택으로 성숙하게 대처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사고입니다. 원하시는 금액을 말씀해 주시면 보상을 하겠습니다.”

“삼천.”

여섯 쌍의 눈이 태경을 향했다. 그는 태연하게 시선을 감당했다. 이참에 그녀에게 원 없이 돈을 안길 생각을 하자 늑골이 뻐근했다. 제 돈을 생활비에 보태 달라고 하면 씨알도 안 먹힐 테지만, 보상금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이 붙은 돈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건 정당한 대가를 받는 거니까.

좁아터진 방이나 부실한 매 끼니 식사 같은 게 불편하거나 싫은 것은 아니었다. 서유정이 힘든 게 탐탁지 않을 뿐.

그의 속셈을 꿰뚫은 광현은 기가 찼다. 특수 폭행도 벌금이 천만 원인 걸 생각하면 그가 제시한 금액은 터무니없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순 날강도가 따로 없지. 하지만 돈이 아쉬운 건 아니니, 눈감아 줄 순 있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 마당에, 죽다 살아온 놈 소원 정도야, 뭐.

“……그 정도면 됩니까?”

유정은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저는 보상이 필요가…….”

그의 직장 동료에게 금전을 뜯어내서 껄끄러워지기 싫었다. 잘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태경은 그 빌미를 싹둑 잘라 냈다.

“필요하죠.”

유정이 항의를 담아 그를 쳐다봤지만, 태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이체해 주면 좋겠는데. 유정 씨, 계좌번호 알려 줘요.”

“저기…… 저는 저거면 충분하거든요.”

그녀가 과일 바구니를 눈짓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오늘 내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태경은 유정을 향해 있던 눈을 옮겨 광현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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