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17)화 (17/83)

17화.

유정이 외식이랍시고 가봤던 곳은 지난번 태경과 갔던 식당이 고작이었다. 지난번에는 제법 시끌벅적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늦은 저녁인 데다 평일이라서 손님이 적고 조용했다.

위생 관념이 개판이긴 해도 유정과 피아노가 한 프레임에 담기는 게, 태경은 썩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좀 들떠 보였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여잘 다정하게 챙기면서 안 지는 2년 정도 됐고,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주선해 주며 절친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 아르바이트라는 건 총과 폭탄이 날아드는 성당에서의 목숨을 건 서빙을 말하는 모양이고. 우습지도 않지.

안타깝지만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이 여자는 무상으로 일자리를 소개해 준 게 아니라 소정의 소개비를 받아 챙겼을 테고. 서로 좋은 일인 셈이지.

하지만 주태경은 그런 말을 하는 대신 조잘조잘 떠드는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유쾌하고, 성격 좋은 언니예요. 타국에서 유일하게 마음 터놓고 만날 수 있던 사이고요.”

태경은 지아에 대해 뒷조사를 하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제 발로 찾아오기 전에 붙어 있는 먼지 하나까지 알아냈어야 했는데. 무릇 타국에서는 동향 사람을 가장 조심해야 하는 법이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뒤로 무슨 수작을 부릴지 어떻게 알아. 어디서 굴러먹었는진 몰라도 서유정 하나쯤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닐 거고.

“그런데,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소개?”

그때, 지아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잠시 멈칫한 유정이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솜털이 쭈뼛 설 만큼 뇌리에 깊게 박힌 일이어서 그런지, 말을 꺼내는 입술이 조금 떨렸다.

“결혼식 서버 일 했을 때 처음 만났어.”

“그래?”

성당 결혼식 때라……. 지아가 내심 의심의 눈초리로 태경을 흘겨보며 보드카를 주문했다.

“술 잘 마셔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난 잘 마시는데. 주량 좀 파악해 봐도 돼요?”

지아가 테이블에 온 보드카가 든 유리잔을 밀듯이 넘기는데, 태경은 원래 놓였던 맥주를 마셨다.

“안 맞춰 주네.”

그녀가 재미없다는 듯 보드카를 홀짝이자, 유정이 대신 입을 열었다.

“태경 씨는 술 안 좋아해.”

“음? 진짜?”

“응. 마셔도 안 취해. 그래서 안 좋아하는 거야.”

유정이 하는 말이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진짜였다.

뱉은 말을 수습할 수도 없고. 지아는 태경이 말을 바꿀까,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태경은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듯 줄곧 가게 중앙에 놓인 피아노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눈을 못 떼던 그가 유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그거 다시 연주해 줄 수 있어요?”

“네?”

“월광 소나타.”

유정이 조금 놀라며 눈을 크게 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부탁하는 법은 좀처럼 없었고, 게다가 피아노 연주라면 그나마 할 수 있는 것 중 제일 자신 있는 거였다.

“똑같은 거로요?”

“네.”

간결한 대답을 듣고 나서 유정은 바지에 손을 슥슥 닦으며 피아노 앞으로 갔다.

3악장이었나. 실수한 것도 많았는데.

오랜만이라 만족스러워하긴 했지만, 어쨌든 실력으로만 따지면 그랬다.

유정은 피아노 의자에 앉으며 건반 위에 손가락을 가지런히 안착했다. 당연히 콩쿠르보다, 심지어 저번보다도 더 떨렸다. 그에게 칭찬받고 나서 두 번째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잘해야 하는데. 페달 과잉되지 않게. 지난번처럼 달리지 말자. 여유 있게…….

마음속으로 잊지 않아야 할 것들을 다짐하며 손을 한번 말아 쥔 후 연주를 시작했다.

곧이어 빠르다가 쉬어 가듯 느려지는 곡조가 들려왔다. 건반 위 하얀 손가락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격정적으로 몰아치는 순간에도 마치 눈을 감은 듯 보이는 유정의 얼굴은 온화했다.

미소 지으며 그녀를 보던 지아가 뿌듯한 마음에 칭찬하려 태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도 않고 유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우아하게 춤추는 손가락, 조명 비춘 하얀 얼굴을 그리듯 담아냈다. 다른 소음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집중하는 그 모습은 곡이 절정에 다다를수록 묘한 광경이라 지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가게 사장이 유정을 따로 불렀다. 또 별거 아닌 말을 할 게 뻔하지만, 유정은 예의상 잠시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옆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입에 문 지아가 담뱃갑을 위로 툭툭 쳐서 나온 한 개비를 태경에게 내밀었다.

“유정이 되게 착한 애예요. 이미 알겠지만.”

말하는 입술 사이로 연기가 뿜어 나왔다.

그녀가 내민 담배를 가만히 쳐다보던 태경이 받아서 입에 물었다. 익숙하게 불을 붙여 준 후 지아는 말을 이었다.

“둘 사이, 진지했으면 해요. 이래 봬도 저희 굉장히 친하거든요? 예전부터 걱정이 많았어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남자를 만날지.”

남자 얘기만 나오면 영 숙맥인 유정이었다. 돈 버느라 바빠 연애할 시간도 없었다니. 참 각박한 인생이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남녀 사이에 일어날 별의별 일들을 미리 알려 줘서 다행인 건가?

야한 얘기를 할 때마다 공감 못 하며 애매하게 웃던 유정을 떠올린 지아는 태경을 힐긋 쳐다봤다.

허공을 보며 담배를 한 모금 빨던 그가 거무튀튀한 연기를 후, 불며 읊조렸다.

“맛없어.”

읊조린 말을 끝으로 담배를 드럼통 안에 툭 버렸다.

“필 줄은 아는데 좋아하는 건 아니다?”

지아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술도 취하지 않고. 대단한 남자네요, 여러모로.”

술이든 담배든 그 맛을 알면 중독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위험하다고도 하지 않나?

지아는 그 어느 것에도 흥미를 못 느끼는 남자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유정의 연주를 듣던 그의 기묘한 모습이 생각났다.

“그런 남자도 여자한테는 빠질 수가 있구나.”

속으로 생각하던 것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는데, 태경이 지아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바는 그가 생각하는 것과도 같았다. 음식, 사물, 여자. 어떤 유혹에도 무감각하더니 돌아올 곳으로 특정한 게 장소도 아니고, 서유정 그 자체였다. 비를 맞다 보니 어느새 젖어 있을 뿐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함께임이 자연스럽다는 건 손아귀에 쥐고 안 놔주고 있는 저 때문이다. 시간, 장소, 느낌,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모든 게 흡족해서.

지아를 뚫어져라 보던 태경은 고개를 한번 푹 숙였다가 들었다.

“그러게.”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말을 끝으로 한숨같이 작은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기울인 남자의 얼굴이 근사하게 웃자, 그 모습에 넋이 나간 지아는 이제 막 가게에서 나온 유정을 발견하고는 앞으로 달려갔다.

“잠깐, 유정아.”

유정을 질질 끌고 태경한테서 떨어진 지아가 급하게 물었다.

“진지하게 만나는 관계야?”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유정이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얼떨결에 답했다.

“모르겠어.”

“뭐?”

지아가 황당하단 반응과 함께 짐짓 진지한 얼굴을 했다.

“저 남자, 나쁜 일 하고 그런 건 아니지?”

“응.”

“후. 나 살면서 저렇게 아름다운 남자는 처음 봐. 잘생겼다 수준이 아니라고.”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긴 지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근데 그런 남자가 아까 너 연주 중일 때 집어삼키는 줄 알았다. 너밖에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것처럼 굴더라니까. 아주 무서울 정도로.”

이번엔 집중하느라 몰랐던 유정이 조금 놀라자, 지아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처음엔 바람둥이로 의심했는데, 아닌 거 같아. 너만 진심이면 끝이야.”

“아…….”

“누가 그러는데 여자 마음이 갈대가 아니라 남자 마음이 갈대라더라. 누가 채 가기 전에 네가 잡아 버려.”

지아는 가방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유정에게 쥐여 줬다.

“나 여기 있는 동안 있을 호텔이니까 언제든 찾아와.”

그녀는 유정에게 찡긋 윙크하며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이제 방해 안 하고 간다. 좋은 시간 보내.”

유정은 멀리 사라지는 지아에게 뒤늦게 손을 흔들며 태경에게로 걸음을 뗐다. 기다리고 있던 그는 유정이 옆에 서자 당연하다는 듯 집 가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왠지 귀가 붉어진 유정은 지아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귓불을 매만졌다.

그가 자신의 연주를, 그 곡을 마음에 들어 해서 기뻤다. 상 탔을 때보다 더.

이번엔 맨정신이라 그런지 떨림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입술이 오밀조밀 움직였다.

“제가 친 그 곡은요. 베토벤이 좋아하던 여인, 줄리에타에게 헌정한 곡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클래식에서 잘 느낄 수 없는, 작곡가의 극단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곡이라고 생각해요.”

유정은 태경의 시선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베토벤이 죽고 나서 서랍 속에 편지가 발견됐는데 내용이 연정으로 가득했대요. 자신의 불멸의 연인을 향한 러브 메시지였죠.”

사후 그의 연애편지에서 나온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줄곧 해 왔기 때문에.

유정은 고개를 살포시 숙이며 건반을 두드렸던 손가락들을 깍지꼈다.

“베토벤의 마음속 진정한 연인이 누구든, 이 곡을 헌정받은 줄리에타는 행복할 거예요.”

말을 꺼내면서 심장이 조급하게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며 고개를 들었다.

유정은 바랐다. 줄리에타가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기를.

“내 연주로 태경 씨 기분이 좋아졌을까요?”

당신은 행복한가요?

커다란 눈망울이 호수처럼 그를 담았다. 유정은 걸음을 멈추고선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선 입 안에 고여 있던 말을 꺼냈다.

“제가…….”

내내 정의할 수 없던 마음이었다.

“태경 씨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걸음을 멈춘 태경이 그녀를 돌아봤다.

“태경 씨는 저를…….”

너만 진심이면 끝이야. 유정은 지아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용기를 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저를…… 좋아하나요?”

마침내 문장을 완성했다.

지켜보고 있던 태경이 팔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제게 곡을 쳐 준 손가락을 들어 올린 그는 하나하나 입을 맞추며 시선을 내렸다.

“네.”

나지막한 대답에 유정은 기다란 눈매 속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의 입술이 닿아 있는 손가락 지문이 녹아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곧, 눈물이 날 것처럼 눈이 시큰거렸다.

기뻐서도 눈물이 맺힐 수 있구나. 이것마저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유정으로선 많은 것을 얻고 깨달은 밤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달리 그는 뭐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모호한 일상은 그대로 이어졌다. 달짝지근하면서도 무언가가 비어 있는 채로.

똑같은 감정을 나눴는데, 달랐다. 이상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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