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16)화 (16/83)

16화.

“오던 중 접촉 사고가 발생해서 좀 늦는다고 합니다.”

듣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운 얼굴의 발렌틴이 무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수행원은 그 자리에서 커터로 시가의 캡 부분을 잘라 내고 토치 라이터로 불을 붙여 발렌틴의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발렌틴이 두꺼운 필터를 입에 물고 한 모금 빨아 마시는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간이 배 밖에 나온 침입자는 다름 아닌 주태경이었다.

발렌틴은 연기를 내뱉으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수행원들이 곧장 경계 태세를 갖추려 하자, 대강 손을 휘저으며 웃었다. 입가는 호선을 그렸으나 눈매는 접히지 않았다.

“만나기로는 했는데…… 그게 오늘이었던가?”

주태경은 전봇대처럼 버티고 선 수행원들을 어깨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의사도 묻지 않은 채 맞은편에 앉았다. 회색 눈이 반 박자 늦게 그에게 꽂혔다.

“생각보다 멀쩡하네.”

발렌틴이 다리를 꼬며 한쪽 팔도 등받이에 둘렀다. 시가에서는 연기가 풀풀 났다.

“찌른 놈이 영 형편없어서 급소는 다 피해 갔거든.”

주태경이 여차하면 제압할 기세인 수행원들을 쳐다봤다가 다시 발렌틴을 응시하며 말했다.

손으로 입가를 훔치며 발렌틴이 웃었다. 좁힌 눈매 끝이 파르르 떨렸다.

“다행이네.”

“…….”

“거기 있는 놈들이라곤 용병들한테 제압당해 쩔쩔매던 놈들만 봐 와서. 실전 경험이 없잖아. 무늬만 군인이고. 총 들고 다니는 샌님 새끼들인 줄 알았지.”

기실 그랬다. 상임 이사국의 승인이 없으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데다가 현장에 투입되는 횟수도 일 년에 한 번이면 많은 거였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부대 이야기고.

태경은 명백한 조롱에도 타격감 없는 얼굴로 빤히 쳐다봤다.

하여간에 마음에 안 드는 새끼라니까. 이를 바득 갈면서도 발렌틴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원한 산 게 얼마나 많으면 그랬을까? 나도 놀랐지 뭐야.”

정말이지,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태경은 본인과 무관하다고 발뺌하는 발렌틴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의심하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는지, 발렌틴은 눈에 띄게 호의적인 태도로 수행원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와인병을 들고 수행원이 다가왔다.

곧 태경의 와인 잔에 피처럼 검붉은 포도주가 졸졸졸, 떨어졌다.

“내가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와인이야.”

발렌틴은 와인 잔을 들고 한 바퀴 휘이, 돌리더니 한 모금 마셨다. 입술에 스민 것마저 핥아 마시며 시가를 든 손을 들썩였다. 이번에는 수행원이 시가 캡을 잘라서 태경에게 건넸다. 그가 쳐다만 보자, 발렌틴은 친히 토치 라이터를 밀어 주었다.

“그거, 향미가 환상이야. 바디감도 끝내주고. 아, 혹시 비흡연자야?”

이 사이에 시가를 끼우고 발렌틴이 물었다. 태경은 대답 대신 토치 라이터로 시가에 불을 붙였다. 불꽃을 머금고 뻐끔뻐끔 줄어드는 모양을 들여다보며 그가 물었다.

“집에 갈 생각은 없나?”

태경이 시가를 입에 물었다. 입술 사이로 연기가 훅, 흘러나왔다.

“내가 다치는 바람에 널 데려가는 임무는 종료됐거든. 이번엔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데려가려고 했는데.”

그가 시가를 끼운 손끝으로 볼을 긁었다.

“아쉽게 됐지.”

주태경의 눈에서 서늘한 불꽃이 일렁였다.

발렌틴은 입 안쪽 살을 짓씹었다. 놈이 대하기 까다로운 놈인 건 진즉 알았지만,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너희들은 상임 이사국 입김대로 움직이잖아. 게다가 세르게이랑도 이미 끝난 얘기를 간섭받긴 싫은걸.”

발렌틴은 어깨를 들썩이며 테이블 위에 양 팔꿈치를 댔다.

“나는 태생적으로 참지 못하는 성미야.”

“…….”

“참, 한국인은 성질이 급하다며?”

발렌틴이 깍지 낀 손에 턱을 괴며 스산한 눈으로 쳐다봤다.

“러시아인만 할까?”

잿빛 눈동자가 음산하게 빛났다. 하긴, 방탄조끼 광고를 한답시고 제 심복에게 입혀 총알을 갈겼다던 사이코가 웬만할까. 하지만 그조차 세르게이를 등에 업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우물 안 애새끼. 태경이 권태롭게 내리뜨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우리가 그런 임무를 받았다는 건, 세르게이의 사고뭉치 아들이 국제 평화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라는 건데.”

갑갑할 정도로 융통성이라곤 없는 엄중한 어조였다. 단순히 그와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 웬만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던 발렌틴조차 목이 졸리는 느낌을 받았다. 불쾌감과 위기감으로 귀가 뜨거울 지경이었다.

“군사 무기 사업에 비살상 무기는 모조리 다 처분했다며?”

주태경은 해킹으로 국가 기밀도 빼내는 병적인 집요함의 소유자였다. 뒷조사를 통해 이미 그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던 발렌틴은 마른 목구멍을 침을 삼켜 닦았다.

“세르게이도 그간 많이 해 먹었지. 이제 다시 필요에 따라 받는 시대가 온 거야.”

러시아의 수장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던 세르게이의 아성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이번 선거에서 당선된 젊은 대통령은 일을 제대로 할 모양이었다. 세르게이의 막강한 권력을 축소하는 작업부터 최우선으로 진행 중이었다.

입지가 위험해진 세르게이에게 발렌틴의 철모르는 모든 행위는 눈엣가시일 테고. 핏줄이라고 두둔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러시아인은 성질이 그렇게 급한데. 그냥 하던 거 다 접고 세르게이 등 뒤에 얌전히 기대 있는 게 어때?”

지금은 미쳐 날뛰는 망아지도 최대한 몸을 낮춰야 할 때니. 천천히 일어선 태경의 거대한 그림자가 발렌틴을 뒤덮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시가를 한 모금 빨아 마시고는, 채 비우지 않은 발렌틴의 와인 잔에 피던 시가를 툭 던져 넣었다.

불꽃이 치지직, 꺼지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가를 포도주에 적시는 행위는 시가의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흙빛으로 변한 수행원들의 얼굴이 볼만했다.

“애새끼면 집에서 떠먹여 주는 것만 받아먹으면서 곱게 처박혀 있어.”

줄곧 영어로 말하던 주태경은 러시아어도 수준급이었다. 그 훌륭한 발음으로 발렌틴의 자존심을 짓뭉갰다. 그러고는 유유히 룸을 나갔다.

굳은 얼굴로 있던 발렌틴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팔자 주름을 만들며 벌어진 잇새로 경박한 소리를 냈다. 이마에도 주름이 가득했다. 시가가 시체처럼 둥둥 떠 있는 와인 잔을 들며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수행원들도 어색하게 따라 웃는 순간, 그가 와인 잔을 유리창에다 집어 던졌다. 충격을 못 이긴 와인 잔이 챙, 소리를 내며 깨졌다. 피가 튀듯 포도주가 얼굴이며 셔츠에 흩뿌려졌다. 구두 밑으로도 붉은 액체가 스며들었다. 포악한 정적 속에서 발렌틴은 혀로 입꼬리를 적셨다.

* * *

유정이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골목길로 들어섰다. 방금 퇴근한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요즘 부쩍 몸이 피곤했다.

그때, 집 앞에서 수상한 기척이 들렸다. 최근 별의별 일을 다 겪은 유정은 경계 어린 눈으로 주시했다.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설마, 하는 얼굴로 보는데 실루엣이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유정아!”

지아였다. 그동안 몇 번이나 집에 찾아가도 코빼기도 보지 못한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유정은 말도 안 나올 정도로 놀랐다. 반면에 지아는 반가웠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끌어안았다.

“핸드폰 잃어버려서 연락 못 했는데. 살아 있었구나! 무사했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내가 너 얼마나 걱정했는데……!”

두서없이 쏟아 내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유정이 그녀를 휙 떼어 내며 야단치듯 외쳤다.

“나야말로 언니를 걱정했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위험에 노출시킨 사람을 걱정했다니. 지아는 울컥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신랑 측 친구가 내가 사귀던 남자였어. 근데 알고 보니 질 안 좋은 새끼였던 거야. 무슨 일을 하는진 몰라도 매번 지시를 받는 것 같았는데, 결혼식도 그럴 줄 몰랐어! 알았으면 널 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난 정말… 정말이지…….”

횡설수설하던 지아가 면목 없다는 듯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걸 발견한 유정은 다 괜찮다는 듯 껴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은 거야? 언니 위험한 거 아니지?”

“경찰이 집에도 쳐들어오길래 무서워서 홍콩에 가 있었어. 좀 잠잠해져서 돌아온 거야. 너 무사한지 확인하려고. 며칠 뒤에 다시 가야 해. 여긴 좀 불안해서.”

“난 괜찮아. 거기서 다친 사람은 전부 테러범들이랬어.”

“정말 다행이야. 그놈들 아주 무서운 놈들인데, 어떻게 그렇게 싹 정리됐을까?”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유정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봤다. 다행히 태경이 서 있었다. 그는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저 눈과 마주칠 때면 유정은 안심이 된다. 당장에 얼굴이 웃음기가 돌았다.

“아, 왔어요? 여긴 저랑 가장 친한 언니예요.”

태경이 지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묘한 시선에 지아는 눈만 끔뻑끔뻑했다.

그때, 그가 불시에 지아의 손을 낚아채 손마디 사이로 깍지를 끼웠다. 돌발 행동에 유정이 고개를 꺾어 올려다봤다. 다행히 금방 놔주긴 했지만, 이미 당황스러웠다.

지아의 뛰어난 미모에 남자들이 정신 못 차린다는 건 알았는데. 태경의 행동은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황한 건 지아도 마찬가지였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작 태경은 덤덤한 말투로 되물었다.

“여자?”

평소 지아를 잘 아는 지인들은 그녀를 여자보다 더 여자 같다는 평을 했다.

보통 눈썰미가 아니면 알아차리기 힘든 사실을 태경이 눈치챈 듯하자, 당황한 건 유정이었다.

“……네, 언니라고 했잖아요.”

그의 눈썰미에 놀라 잠깐 굳었던 지아는 어깨를 으쓱이는 거로 반응했다. 그녀는 이내 태경과 유정을 번갈아 쳐다보며 유정에게 속삭였다.

“애인?”

“…….”

“데이트하기로 했어?”

귓속말이라지만 앞에 선 태경에게까지 들릴 만한 목소리였다.

연달아 당황하던 유정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대뜸 화제를 바꿨다.

“그…… 배고픈데 밥이나 같이 먹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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