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15)화 (15/83)

15화.

“왔어요?”

다정한 언사에 귀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녹아내렸다. 퇴근하면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 그가 떠난 후로 다시 없을 따뜻함인 줄 알았는데, 온기를 되찾았다.

“네.”

유정은 신발 벗는 것조차 잊은 채 바라보다가, 용기 내서 마루로 올라섰다.

“뭐예요, 그거?”

슬쩍 넘겨다 보니 고기 찜과 해산물 찜이었다.

“사 왔어요. 저녁 먹어요.”

그가 눈매를 접어 웃었다. 사람 홀리는 눈웃음이었다. 유정의 얼굴이 이마까지 붉어졌다.

“소, 손만 씻고 올게요.”

욕실에 들어갔다가 나오자 그가 고기를 집은 젓가락부터 내밀었다. 부끄러울 새도 없이 받아먹은 유정의 눈이 커졌다.

“와, 정말 맛있어요!”

정말이지, 입에서 살살 녹았다. 휴가 중인 동료의 빈자리 때문에 고된 하루를 보낸 터라 주린 배가 요동쳤다. 유정은 숟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탐식했다.

태경은 그녀의 밥공기에 부지런히 반찬을 실어 날랐다. 배가 어느 정도 불러 오자, 유정은 그제야 반찬이 본인의 재정 사정에 비해 과분하다는 걸 깨달았다. 비쌀 거 같은데 어떻게 사 왔을까. 주는 돈으론 부족했을 법한 음식인데.

그녀가 생각에 잠긴 동안 그가 입을 뗐다.

“일은 안 힘들어요?”

“네. 수월한 편이에요.”

“…….”

“이거 다 어디서 샀어요? 너무 맛있는데. 돈 안 모자랐어요?”

“네.”

그는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거짓말도 해 본 사람이 더 잘한다고, 눈썹 한 올 깜짝하지 않았다. 덕분에 유정은 의심을 지우고 끝까지 식사를 마쳤다.

태경은 그녀가 밥알 하나까지 싹 비운 것을 확인하고는 때맞춰 따라 둔 물도 건넸다. 제가 주는 걸 군말 없이 받아먹고 배를 불린 여자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서유정에게 먹일 음식을 사는 데 그녀가 준 돈을 쓸 리가 있나. 미치지 않고서야.

이참에 생활비도 전에 시계를 팔아 준 금액의 배로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을 게 뻔해 깔끔히 포기했다.

태경은 조심조심 샤워하러 들어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어차피 다 벗고 뒹군 사인데, 그녀는 아직도 내외하는 건지 갈아입을 옷까지 들고 들어가는 철저함을 보였다. 하긴, 밥 먹느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새빨갛고 축축한 살덩이를 보자마자 앞섶이 반쯤 일어섰으니 경계할 만도 하지.

불룩한 앞섶을 내려다보며 쯧, 하고 혀를 찬 태경이 탁상 앞으로 다가갔다. 퇴근하면 다 내팽개치고 쉬고 싶을 텐데 그녀는 항상 가방 속 물건을 꺼내 정리하고 들어갔다. 기특하기도 하지. 그는 한창 꾸미기 좋아할 나이인데도 그럴싸한 화장품이라곤 없는 소박한 소지품을 훑어봤다.

서유정의 것이면 팬티의 문양 하나까지도 꿰고 있는 그가 낯선 물건을 발견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벨벳 선물 케이스를 집어 들고 허락도 없이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이제 막 욕실에서 나온 유정에게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이건 못 보던 건데.”

원래도 유달리 낮은 목소리가 더 낮았다.

유정은 함부로 만지지 말라는 경고 대신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아, 그거. 재이 씨가 선물로 줬어요. 저번에 집 앞에서 봤던 고용주 아드님이요.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사면서 고맙게도 제 것까지 샀대요.”

지인에게 줄 선물이라면서. 머릿속에 서유정을 떠올릴 공간이 있었다고. 주태경이 흐응, 하고 늘어진 숨을 뱉었다.

“금인 것 같은데 선물이 너무 커요. 받을 땐 좋았는데, 제가 염치가 좀 없나 봐요.”

유정이 옆으로 와서는 머쓱하다는 듯 볼을 긁었다. 그녀의 시선이 목걸이에 닿는 걸 차단하듯이 태경이 뚜껑을 탁, 하고 닫았다.

그래 봤자 14k고, 큐빅이다. 서유정은 다이아몬드가 어울리는데. 이렇게 구질구질한 걸 선물이랍시고 던져 줬다고. 하찮은 선물 따위 그냥 무시하면 될걸 태경은 위장이 살살 꼬였다.

“보석 좋아해요?”

그가 물었다. 넌지시 묻는 목소리는 엄숙하기까지 했다.

“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잘 모르겠어요.”

유정은 뒤늦게 골몰했다. 보석을 안 좋아할 사람이 없으려나? 그것도 재산인데. 여차하면 팔아서 급전 마련하기도 좋고. 그런 생각에 잠긴 채로 태경을 흘끔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다시금 목걸이에 꽂혀 있었다. 유정은 가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을 알 수는 없지만, 육체는 그를 다 알고 있다는 듯 움찔거렸다. 당황스러웠다.

태경과 있을 때면 시도 때도 없이 이런 상태가 찾아왔다. 가끔 그녀는 제가 짐승처럼 느껴졌다. 그가 알면 얼마나 어이없을까. 민망한지 유정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저러니까 아픈 사람처럼 입술이 다 부르트지. 태경이 케이스를 던지듯 내려놨다.

“왜 그렇게 보지.”

입술은 왜 깨물고.

은근히 다그치는 언사에 유정이 뭐라도 대답하려 했지만 가로막혔다. 그의 입술에 집어삼켜졌다. 아랫입술을 괴롭힌 윗니에 벌을 주듯이 혀로 짓쳐 눌렀다. 그 순간 유정은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뭔가 씹는 데만 주력하던 이도 건들면 자지러지는 곳이었다.

태경은 뒤로 꺾이는 목을 받치며 혀를 더 길게 집어넣고 잇몸을 긁고, 따라붙는 혀를 얽어서 빨아 댔다. 혀뿌리가 뽑힐 듯한 쾌감에 유정은 숨만 씨근덕거렸다. 호흡 곤란 직전에서야 태경은 그녀를 놓아줬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유정은 급하게 숨을 골랐다.

“제가…… 후우. 제가, 어떻게 봤는데요?”

태경은 고개를 삐딱하게 젖히며 입꼬리를 올렸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데 참을게요.”

맛있게 쳐다봤다, 라고 말했다간 저 얼굴이 볼만할 텐데. 좀 아쉽긴 하지만 그런 상스러운 말은 되도록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태경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에 촉, 하고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살과 살이 접촉했다가 떨어지는 소리보다 작은 유정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이런 거 전부 태경 씨가 알려 준 거예요.”

“…….”

“충동적인 건가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지만, 바닥까지 추락하는 마음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며 유정이 올려다봤다.

주태경은 연약하게 흔들리는 동공을 보며 결국 아래가 완전하게 섰다. 비난하는 눈빛이라든가, 갖고 놀 생각이라면 꺼지라든가. 뭐 그런 최소한의 자기방어도 없었다.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눈이었다.

“내가 이러고 싶은 건, 살면서 유정 씨가 처음이에요.”

고맙다는 듯 유정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태경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별것도 아닌 손짓 한 번에 반응하는 모습에 그녀는 안도감과 함께 희열마저 느꼈다.

태경은 소심하게 옷자락을 붙잡는 손을 보며 난잡하게 물고 빨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포악한 성질머리에 비하면 상냥할 정도로 가볍게 그녀의 목덜미를 물고, 음미하듯 머리를 흔들었다.

* * *

불야성의 도심에서도 눈에 띌 만큼 고풍스러운 레스토랑 앞에 리무진이 정차했다. 리무진의 앞뒤를 엄호하던 세단에서는 수행원 같은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내렸다. 목과 옷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문신한 남자가 리무진의 뒷좌석 문을 열고는 묵례로 예를 갖췄다.

이윽고 광택이 도는 남성 구두가 아스팔트 바닥을 박차며 나왔다. 리무진의 높이를 훌쩍 넘어서긴 해도 키가 크다는 인상은 덜한 남자였다.

윤기 있는 금발을 아무렇게나 넘긴 헤어스타일과 대조되는 건조한 피부, 마른 듯한 체격. 목 끝까지 여미지 않은 셔츠와 몸에 달라붙지 않는 새틴 소재의 슈트. 뭐 하나 위협적인 구석이 없는데도 수행원들은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고개도 들지 않았다.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데도 금발의 남자는 빛바랜 회색 눈동자를 굴리며 사위를 훑어봤다. 몸에 밴 습관 같은 거였다. 특유의 느릿한, 나태한 걸음걸이로 레스토랑 계단을 오르자 그 뒤를 수행원들이 우르르 따랐다.

삼 년 연속 미슐랭가이드 최고점을 받아 한 달 전 문의를 해도 예약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소문난 레스토랑이었다. 어찌어찌 예약된다고 해도 막상 와 보면 만석에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서버들의 불친절에 기분만 상하고 가기 일쑤라던. 그런 곳이 싹 비어 있었다.

음악 취향이 까다롭다는 남자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내부는 지하 통로처럼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를 룸으로 안내하는 중요한 임무를 떠맡은 매니저는 문을 열어 주면서 미약하게 몸을 떨었다.

남자는 웬만한 분쟁 지역보다도 더 살얼음판 같은 러시아에서 수십 년간 실세로 군림한 킹 메이커, 세르게이의 외동아들 발렌틴이었다.

러시아 방위 산업체의 자리만 차지한 대표. 그것도 아버지가 씌워 준 감투였다. 세르게이조차 반쯤 포기했다는 소문이 돌 만큼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성미로 유명했다. 말하자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또라이.

레스토랑이 손해를 감수하고 하루 영업을 접은 건 꼭 귀빈이어서가 아니었다. 어떤 돌발 사태가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어서다.

발렌틴은 요즘 본인의 영향력을 키우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오늘 홍콩의 경제 중심부로 통하는 마카오 소재 호텔 대표와의 접선 자리를 적극적으로 만든 것도 자의였다. 카지노 사업으로 재미 좀 봤다는 마피아를 롤 모델로 뒀다는 소문이 사실로 밝혀진 셈이었다.

발렌틴은 원형 테이블을 앞에 두고 소파에 앉아 몸을 늘어뜨렸다. 그가 한눈에 봐도 무게가 묵직한 손목시계를 일별하자, 수행원이 곧장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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