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유정은 출근하기 전, 그에게 용돈을 쥐여 줬다.
태경은 손안에 놓인 지폐를 보며, 가난하고 가슴 아릿한 느낌을 만끽했다. 이 느낌이 좋았다. 그녀가 주는 모든 처음 겪는 감정과 행동들이 마음에 들었다.
억만 달러도 이만큼의 만족감은 아닐 게 분명했다. 평소 돈을 아껴 쓰지도 않고, 귀하게 여기지도 않지만, 그는 유정의 손때 묻은 돈은 좋았다.
편지라도 받은 듯 곱게 접어 탁상 서랍에 넣은 태경은 시간을 확인하며 밖으로 나갔다.
저녁 무렵의 완차이는 사람들로 붐볐다. 리퉁 애비뉴의 산책로를 따라 줄줄이 소시지처럼 늘어진 상점과 카페, 부티크 덕분에 인파의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
그중 제일 눈에 띌 정도로 반짝거리고 호화로운 카페에 시커먼 남자, 이광현이 홀로 있었다. 소유한 것 중 가장 무난한 검정 티셔츠와 청바지, 심플한 운동화. 하지만 현장에서 뛰고 구르며 얻은 우락부락한 근육과 벨벳 소재의 분홍색 소파는 처참할 정도로 따로 놀았다.
유명한 쇼핑 거리마다 각국의 여행객들이 점령하는 게 일상인데도 그의 분위기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광현의 민망한 기색 없는 늠름한 태도가 상황을 더 부추기는 꼴이었지만, 사실 모든 것은 계획된 일이었다. 어디 후미진 뒷골목에서 몰래 접선하는 게 더 수상하니까.
기척도 없이 맞은편에 털썩, 앉는 주태경도 지금 같은 상황이 익숙했다. 광현은 밀크셰이크를 무슨 물처럼 벌컥벌컥 마시는 그를 아니꼽다는 듯 쳐다봤다. 얼굴만 마주했을 뿐인데 어제 맞은 뱃가죽이 욱신거렸다. 죽일 기세의 발길질이었으니 그럴 만하지.
오랜 분쟁으로 인해 사막화가 진행 중이래도 믿을 쑥대밭에서 조우했을 때도 그 정도로 천지 분간을 못 하진 않았었다. 감정을 거세당한 놈처럼 절제가 생활인 놈이었다. 그런 놈이 아무리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신세를 졌다고는 해도, 그 좁아터진 단칸방에 자발적으로 남아 있었다고. 게다가 다시 돌아가기까지 해?
하던 대로 입을 막을 의도조차 아니었다. 도대체가 그게, 말이 되나? 뭔가를 가늠하듯 눈매를 좁히며 광현이 입을 열었다.
“세르게이도 골치 아픈 노릇이지. 아들놈 하나 간수 못 해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이번 건은 조용히 넘어갈 모양이야. 우리도 마찬가지고.”
주태경은 듣는 둥 마는 둥 유럽식 건물에 다닥다닥 붙은 홍등을 여상히 바라봤다.
“조만간 발렌틴과 자리 마련할 테니 사과받아.”
발렌틴. 그 이름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이만하면 있던 분란도 없어질 거라 믿을 만도 한데 광현은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자존심에 제 놈하고는 무관한 일이라고 잡아뗄 확률이 높지만, 적당히 넘어가. 이건 부탁이 아니다. 피차 좋을 게 없으니 피해 가잔 거지.”
팀장씩이나 되어서 팀원에게 사정하듯이 설득하고 있는 이 상황에 자괴감이 들었는지 광현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남이야 속이 쓰리건 말건, 태경은 가지고 놀던 빨대가 질렸는지 컵에 툭 던져 넣었다. 광현은 커피 한 잔을 더 주문하고는, 줄곧 참아 온 질문을 했다.
“그 여자랑 무슨 관계지?”
주태경이 일순간 더 시꺼멓게 변한 눈을 위로 치떴다. 하여간에 봐도 봐도 징그러운 눈깔이었다.
이광현은 질색하듯 쯧, 하고 혀를 찼다.
“도대체 뭔데 눈 돌아가서 나한테 총까지 겨눠?”
무슨 소리냐는 듯 그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하나? 서유정, 그 여자 사랑해?”
태경은 소파에 몸을 늘어뜨렸다. 깍지 낀 손은 허벅지에 내려놨다. 심상한 표정이었다.
사랑이라.
그건 대체 어떻게 된 마약이기에 인간들이 죄다 제 앞가림도 못 하고 인생을 조질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이제껏 사랑한다고 지껄이던 놈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많았다. 자식이나 마찬가지라며 물고 빨다가도 수틀리면 죽일 듯이 쥐어패던 보육원 원장, 저가 꼬셔 놓고 소아 성애로 의심받자 협박당했다고 말을 바꾸던 여자, 같이 살자며 집에서 훔쳐 온 돈으로 구걸하더니 거절당한 후 자살하겠다며 협박하던 동급생, 그 외 기타 등등. 죽도록 갈망한다던 것들이 얼마 못 가 어떻게 됐나.
하나같이 따분하고 귀찮았다. 그까짓 일시적인 감정에 휘둘려 시간을 낭비하기엔 재밌는 게 많았다. 배신자나 사기꾼을 색출한다거나 고문으로 죄를 낱낱이 실토하게 만드는 것, 숨어 있는 기지나 훔친 무기를 쌓아 둔 창고를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리는 것. 그런 것만 하고 살아도 두피까지 절절 끓는 극한의 쾌락을 만끽할 수 있다.
누굴 사랑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그 간교한 것들을.
그의 인간 분류는 간단했다. 마음에 들거나 안 들거나.
명쾌하잖아.
반면 그치들에게 사랑이 뭔지 설명하라면 등신 천치들처럼 버벅댄다. 사랑이 뭔데. 저들도 정의를 못 하면서. 웃기지도 않지.
태경은 가볍게 목덜미를 쓸었다.
“서유정 뒷조사할 생각이라면 관둬.”
그때 다가온 직원이 테이블에 커피를 놨다. 직원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광현이 집요하게 물었다.
“대답은?”
“…….”
태경이 펄펄 끓는 커피에 각설탕 세 개를 투두둑, 뜯어 넣었다.
“왜. 내가 좋아하면 안 되나?”
가벼운 되물음이었지만, 싸늘한 어조였다.
광현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에스텔이 죽는다고 고백해도 눈 하나 꿈쩍 안 한 인간이.”
프랑스 외인부대에 속했을 당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대통령 딸의 경호를 맡은 적이 있었다. 주태경을 가까이서 본 그녀는 당연하게도 사랑에 빠졌다.
부담스러우면 연애는 생략하고 결혼하자며 난리도 아니었지.
어디 그뿐인가. 남자고 여자고 그저 엮였다 하면 주태경에게 애걸복걸을 해 댔다. 하긴, 놈의 알맹이가 얼마나 냉정하고 잔인하건 껍데기만큼은 홀릴 정도로 근사했다. 저 얼굴로 피가 낭자한 현장을 쑤시고 다닐 때면 거대한 위화감에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진짜 죽은 것도 아닌데.”
그는 마치 진짜 죽기라도 했다면 감동이라도 했을 거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기가 막혀서. 광현은 순간, 시골 처녀처럼 무해한 서유정이 떠올랐다. 특출난 미인도 아니고, 대단한 집안의 자제도 아닌 그녀가 어떻게 주태경의 호감을 얻어 낸 건지 따위는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다.
저 징그럽게 잔혹한 놈의 지대한 관심을 독차지하게 된 게 과연, 그 여자에게 마냥 호사이기만 할까? 재앙으로 번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광현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 * *
고용주의 집은 정말이지, 호화로웠다. 유정은 청소기를 돌리며 발코니 너머 풀에서 한가롭게 배영 중인 차재이를 쳐다봤다. 사모님의 시름이 나날이 깊어만 가는 원인. 대학 휴학을 밥 먹듯이 해 대는 통에 얼굴 보는 게 그리 오랜만은 아니었다. 유정은 요즘 애들은 도무지 속을 모르겠다며 한탄하던 사모님을 떠올려 보다가, 이내 재이의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차재이는 좀 대책 없이 방랑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여타 재력가의 자제들처럼 여자를 바꿔 가며 문란하게 놀지도 않고 술이나 담배, 마약 같은 것도 손대지 않는 눈치였다.
대신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국가로 훌쩍 여행 떠나기를 즐겼다. 인문학이나 철학책을 읽으며 심오한 상념에도 곧잘 빠졌고, 기타나 베이스 같은 악기도 잘 다루는 데다 구기 종목 같은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다. 잘 배우고 자란 사람의 전형이었다.
유정은 벽에 붙은 세계 각국의 엽서들을 부러운 듯 바라봤다.
“딱 한 군데만 갈 수 있다면, 어딜 가 보고 싶어요?”
불현듯이 차재이의 소년처럼 청량한 목소리가 귀로 들어왔다. 유정은 놀라서 펄쩍 뛰었다.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새가 큰 소리에 놀라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꽤 민망했는지 유정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네? 아, 전 여행 같은 거 안 다녀 봐서요.”
“스위스가 어울려요. 닮았어. 꼭 가 봐요. 눌러살면 더 좋고.”
젖은 몸 위에 입었는지 재이의 옷이 축축했다. 걸음을 옮기자 물이 뚝뚝 떨어지기도 했다. 방금 청소했는데. 유정이 물기 어린 바닥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쳐다봤다. 본인의 만행을 알 리 없는 재이는 책상 서랍을 열고 뭔갈 꺼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비비적거리며 팔을 뻗었다.
유정은 손바닥만 한 사각형 케이스를 내민 손을 멀뚱멀뚱 응시했다.
“이게 뭐예요?”
쑥스러운 듯 제 목덜미를 더듬으며 차재이가 말했다.
“스위스에서 산 목걸이예요. 가까운 사람들한테 선물하려고 산 건데, 유정 씨 몫으로 남겨 뒀던 거예요.”
스위스의 매장에서 이걸 보자마자 서유정이 떠올랐고, 고민도 없이 구매했다. 부담스럽다고 거절할까 봐 치밀하게 지인 핑계까지 댔다. 성적표를 감출 때도 이만큼만 거짓말을 했더라면 완전 범죄로 남았을 텐데.
재이는 동그란 눈으로 보고만 있는 유정이 행여 거절할까 봐 팔을 더 뻗었다.
“팔 떨어지겠어요.”
머뭇거리던 유정이 겨우 말을 꺼냈다.
“제가 받아도 될까요?”
순간 차재이는 가슴이 빠듯해졌다. 갑작스럽거나 놀랄 만한 일이 생겨도 그녀는 언제나 침착했다. 그렇지만 남이 상처 받을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세심한 성격이었다. 거짓말 좀 보태서 얼굴의 반절 정도는 차지하는 것 같은 큰 눈망울을 난처한 듯 굴리는 것마저 심장을 찌릿하게 만들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이상형이었다. 먼지만 한 크기로 시작된 호감은 점점 몸집을 키워 갔다. 이제는 그녀의 퇴근 시간이 야속할 정도로.
“안 받으면 서랍에서 영영 썩을걸요.”
“그럼, 감사합니다.”
유정은 고개까지 꾸벅 숙였다. 고용주도 그렇고 차재이도 그렇고, 원래부터 인심이 후한 편이었다. 첫인상은 차가운 편이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상대가 부담스럽지 않은 호의를 베풀고는 했다.
깨닫고 나니 유정도 불편하지 않았다. 먹거나 쓰고 남는 걸 준다거나 동정하는 게 아닌 이상 불쾌할 이유도 없었다. 평소 그녀는 제 돈 주고 액세서리를 사 본 적이 없으니 실용적인 선물이기도 했다.
퇴근을 위해 옷을 갈아입으면서 목걸이를 확인한 유정은 어색하게 웃었다. 귀걸이나 목걸이를 하면 몇 배 더 예뻐 보인다던데. 태경에게 조금 더 예뻐 보일 수도 있겠다는 작은 기대로 진작부터 마음이 들떴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라졌다. 열린 대문으로 들어가 모퉁이를 돌면서부터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현관문 안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 머뭇거리며 문을 열자, 저녁상을 차리고 있던 태경의 시선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