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인지한 순간 그녀는 슬금슬금 상체를 일으켰다. 열린 문만 삐걱거릴 뿐, 인기척이 들리진 않았다. 천천히 이불을 옆으로 치우고 아예 자리에서 일어선 유정이 신발장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쿵-!
그때였다. 누군가 거칠게 안으로 들어왔다.
유정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지만, 침입자의 팔에 목이 압박당하며 그대로 등이 바닥과 맞닿았다.
유정은 악 소리도 못 내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체격이 태경과 엇비슷한 괴한은 아무 감정 없는 표정으로 유정을 관찰하더니 그녀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눴다.
시릴 만큼 차가운 감촉에 유정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발렌틴을 아나?”
동굴 속으로 파고들어 갈 것 같은 낮은 음성에 유정이 곧장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괴한은 유정이 대답하기 쉽도록 그녀의 목을 압박하고 있던 팔에 힘을 조금 풀었다.
“모, 몰라요. 누구세요!”
“모르는 척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끼기긱-. 트리거를 꽉 쥐자, 장갑과 트리거의 마찰 소리가 바로 귀 위로 들렸다.
“저, 정말 몰라요!”
공포에 휩싸인 유정이 한 번 더 강조하자, 총은 거둬졌으나 목을 조이는 압박감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괴한의 뒤에서 다른 음성이 들렸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순간 목을 압박하던 손이 거짓말처럼 떨어져 나갔다.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유정이 괴한의 어깨 너머를 확인했다. 태경이었다. 새파란 달빛을 등진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유정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잔뜩 경직되었던 몸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갔다. 어느샌가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
그의 이름이라도 부르고 싶어서 입술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히끅, 히끅. 이상한 딸꾹질이나 해 대며 유정은 흐트러진 멱살을 추슬렀다.
그 순간, 그녀의 몸 위를 포박했던 괴한의 목이 뒤로 휙 꺾였다. 그악스러운 힘에 큰 덩치의 괴한조차 딸려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섬뜩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괴한의 몸은 이미 집 밖으로 날아갔다.
“무슨 짓이야!”
주태경은 바닥을 구르던 괴한이 짜증스럽게 항의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위험스럽게 차분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유정이 눈물을 슥슥 훔쳤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득, 태경이 그녀를 돌아봤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주태경은 움직이지 않는 입꼬리를 간신히 비틀어 올렸다. 안심시키려고 웃었는데 낯짝에 무슨 마취제라도 맞은 것처럼 감각이 없었다.
서유정이 더러운 가랑이 밑에 깔려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 구겨진 옷,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적시는 눈물.
잠깐 자리 좀 비웠다고 당장 일이 벌어졌잖아. 이러니까 이 쥐구멍처럼 좁아터진 집구석에 며칠이고 틀어박혀 나올 엄두가 안 났던 거다. 몸속에서 빠르게 피가 돌았다.
주태경은 제가 지을 수 있는 한 가장 근사한 표정을 지어 주고, 그녀의 시선이 더는 닿지 못하게 문을 쾅 닫았다.
그새 일어난 괴한은 걷어차인 복부를 털어 냈다.
“주태경. 미친 새끼……. 너 뭐야. 여긴 왜 왔어?”
인간들은 종종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명을 재촉한다니까. 태경은 검지로 귓구멍을 후볐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그가 권태롭게 중얼거리며 단숨에 권총을 꺼내 겨눴다. 총구는 이마 정중앙을 노리고 있었다.
“적당히 해라. 주태경.”
그쯤 되자 괴한도 얼굴이 굳어졌다. 태경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만졌어요?”
“뭐?”
“만졌으면 손도 날리려고.”
태경은 괴한이 그녀를 만졌다는 가정만으로도 이미 방아쇠를 감싼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정신 차려. 나 네 상관이다.”
“내가 붙어먹는 여자 건드리는 상관은 뒈져야지.”
말은 그렇게 해도 의심이 거두어졌는지 태경이 팔로 총구를 내렸다.
괴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괴한. 아니, 이광현은 태경의 상관이자 ‘블랙스완’ 팀을 구축한 팀장이었다. 능력만으로 평가받는 블랙스완 팀은 보수적인 군조직에선 드물게 수평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긴 했다. 하지만 지금 주태경의 행동은 도를 넘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환경에 주태경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기도 하고, 뒤처리를 위해 심문은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진 몰라도 다른 요원들을 보내기엔 꺼림칙해 직접 움직였다.
그걸 팀 내 에이스 주태경이 모를 리 없었다. 워낙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해 비위 맞추기 어려운 놈이라지만, 이 정도로 공사 구분 못 하고 날뛰는 놈은 아니었는데.
“지금 상황, 머리 안 돌아가?”
알면서도 주태경은 막무가내였다.
“네 문제가 아니면 공감하기 힘들고, 네 문제여야 개인적으로 움직인다는 새끼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
무슨 생각인지 모를 잠잠한 눈으로 광현을 보고 있던 태경이 입을 달싹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고, 내 일이니까 거슬리게 하지 마요.”
그러니까, 방 안에 있는 여자가 자기 일에 포함된다는 거였다. 그러니 FM대로 하는 것조차 잘못됐다는 거고.
“한 번만 더 건들면 사령부 머리통부터 갈겨 줄 거니까.”
“……저 여자가 너한테 그런 존재라고?”
광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묻자, 겨누던 총을 내린 태경은 뒤를 돌았다.
“너 혹시 납치라도 당했던 거야?”
광현이 아는 한, 그는 남 때문에 감정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할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관계자일지도 모를 여자 때문에 사령부까지 운운하며 협박을 한다고?
인질로 있으면서 강제로 약에 취한 것은 아닌가 진심으로 의심될 정도였다.
태경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것처럼 광현을 위아래로 훑더니,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일 다시 봐, 넌.”
광현이 노려보며 하는 말을 끝으로 문이 쿵, 닫혔다.
안으로 들어간 태경은 우선 불부터 켰다. 놀랐는지 유정은 구석에 붙어서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었다. 뺨에는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주태경의 눈매 끝이 가늘게 좁혀졌다.
서유정은 길바닥에 쓰러진 저를 일단 주워서 숨을 붙여 놓긴 했지만,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는 못했었다. 범죄에 연루된 건 아닌지 의심하던 눈초리였다. 기껏 그 경계를 허물었더니, 저 커다란 눈이 다시 두려움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제가 뭘 하는 놈인지 미주알고주알 알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인데.
역시 돌아가자마자 팀원들 다리를 부러뜨려 서유정 근처엔 얼씬도 못 하게 했어야 했다.
일순간 표정이 잔혹하게 가라앉았지만, 그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그녀의 앞에 서슴없이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그동안 서유정이 환장하던 다정한 목소리를 꺼냈다.
“내가 좀 늦었죠.”
“…….”
“제 상사였어요. 오해가 있었나 봐요. 미안해요.”
유정이 놀란 기색을 삼키며 눈을 깜빡였다.
“……그래요?”
그녀는 안심하는 얼굴이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철석같이 믿을 여자였다.
“아무래도 무방비하게 있었던 곳이니 수색하려 했나 봐요.”
태경은 유정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며 그녀를 천천히 살폈다.
“다친 덴 없어요?”
“네. 그냥 좀 놀라서…….”
그렇게 대답하던 유정이 되려 그를 살폈다. 병간호로 실컷 고생시킨 놈의 직장 상사가 찾아와 집을 들쑤셔 놓고 갔는데, 원망은커녕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주태경은 순하고 꼼꼼한 시선이 제 몸 이곳저곳을 기어 다니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실컷 보라고 맨살을 들이밀고 싶었으나, 대신 싱크대로 가 물을 끓여 따듯한 물을 유정에게 건넸다.
따듯한 기운에 조금 진정된 유정은 뒤늦게 다행이라고 여겼다. 자신을 해할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동료였다니.
“다시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복무 안 해도 돼요?”
“네. 안 해도 돼요.”
마지막 인사라도 하러 온 걸까 했지만, 평소와 같이 있겠다는 뉘앙스였다.
“안 오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유리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시선을 내렸다.
“올 명분도 없었으니까.”
잔잔한 목소리를 귀담아듣던 태경의 눈썹이 휘어졌다. 마치 기대도 안 했다는 듯한 말투가 거슬렸다.
왜 명분이 없어. 그동안 붙어먹은 시간은 뭔데, 그럼.
슬그머니 들고일어나는 삐딱한 심보를 가볍게 누르며, 태경이 웃었다.
“여기에 유정 씨가 있잖아요.”
태경은 고개 숙인 유정의 얼굴을 위로 들어 올렸다. 제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맑은 유정의 눈망울을 보니 머릿속이 간지러웠다.
아깐 그녀도 눈에 보이지 않고 그저 광현을 죽일 생각뿐이었지만 역시나 생각을 달리하길 잘했다.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 그딴 짓을 벌일 순 없지.
그는 기다랗게 뻗은 손가락으로 조그맣고 하얀 유정의 턱을 매만졌다.
“저기, 혹시나 오시면 할 말이 있었는데.”
그녀가 조그맣게 말을 꺼냈다.
“네.”
그가 빤히 쳐다보며 대답하자, 이내 귓불이 붉어진 유정이 말을 거두었다.
“아니에요. 나중에 말할게요.”
태경은 달싹이는 유정의 입술을 내려다봤다. 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거리감이 들었다.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작은 머리를 가득 채웠던 게 원인이겠지.
그는 탐탁지 않은 마음을 표출하는 대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유정은 눈에 띄게 긴장하며 몸을 굳혔다.
태경은 목구멍에서 터진 웃음을 짓누르며 그녀의 귓불을 씹어 물었다.
“혹시 그동안 내가 귀찮았어요?”
“네?”
“알아서 떨어져 나간 진드기가 다시 붙은 기분인가?”
“무슨…….”
이해가 안 되는지 웅얼거리던 유정은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사색이 되었다.
“나 다시 갈까요?”
유정은 그 말에는 거의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몸을 들썩거렸다.
“아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냥 돌아오신 게 믿기지 않아서요. 제가 태경 씨를 많이 그리워했나 봐요. 자려고 누웠는데 허, 허전하고……. 아까도 위험했는데 태경 씨를 보니까…….”
무서움도 까맣게 잊은 채 그저 반가웠다. 미친 것 같았다. 그때의 감정을 두서없이 쏟아 내던 유정은 이내 말을 뚝 멈추고 고개를 떨궜다.
올 줄 몰랐다고 덤덤할 땐 언제고. 그녀는 뭔가 기대를 했다가 실망의 후폭풍을 겪는 게 두려운 나머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척하는 게 습관인 모양이었다.
알면서도 기어이 원하던 반응을 얻어 낸 주태경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고개 들어 볼래요? 보고 싶었는데.”
유정이 천천히 목을 세웠다. 그는 녹은 떡처럼 말랑말랑한 뺨을 손으로 으깨듯이 쥐었다. 그것 좀 만졌다고 벌써 숨이 가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