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11)화 (11/83)

11화.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 사이로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빗소리에 눈을 뜬 유정은 옆에서 잠든 태경을 보며 정신을 차렸다.

콘돔이 왜 여러 개였는지 몸소 보여 줄 만큼 무지막지했던 남자가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은 어색했다.

유정은 그의 몸으로 내려가는 시선을 애써 올렸다. 기절하듯 잠들어 버리기 전까지 보던 몸이지만 금세 귓불이 달아올랐다.

“아…….”

몸을 뒤척이는데 다리 사이가 굳은 것처럼 뻐근했다. 몇 시간을 계속 그의 몸에 맞춰 벌리고 있었으니 굳었을 만도 했다.

어쩐지 배 속도 불편한 느낌이 들어 따듯한 손으로 배를 문지르던 유정은 퉁퉁 부은 입술을 비비적거렸다.

아프면 발로 차라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는지 정말 통증이 컸는데, 생리통을 심하게 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가 주는 건 통증만이 아니었다. 어루만져 주는 손길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인해 몸에 힘을 푼 순간, 상상하지도 못했던 감각을 깨달았다.

한순간도 다른 곳을 보지 않는 눈. 참을 수 없다는 그 시선과 마주했던 순간부터는 형용할 수 없는 짜릿함이 몸과 머리를 지배했다.

‘하. 아프면 발로 차라고 했는데.’

그는 억지로 참는지 주기적으로 확인했다.

‘응? 조곤조곤 말하면 내가 안 들을 거 같거든요.’

쿵쿵 찧어 올리는 통에 벌린 입에선 탄성밖에 나오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힘겹게 흔드는 순간, 그가 눈을 휘었다.

‘다행이네.’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뜨겁네. 여기 밑에 질질 흘리고 난리 났어요.’

손가락을 두 개씩 쑤셔 넣으며 말하는 그의 눈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져 있었다. 그 후론 아프냐고 묻지 않았다. 기력이 빠져 힘들어하자, 졸리면 자라는 허무맹랑한 배려를 보였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잠들어도 멈추지 않았다.

유정은 부끄러운 마음에 눈을 살포시 내리깔았다가 다시 잠든 그를 바라봤다.

휩쓸리듯 넘어간 것 같아도 자신이 원해서 했다.

남녀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는데…… 둬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솔직히, 좋았다. 처음인데 이런 느낌이라니.

유정은 얼굴의 모든 선이 곧은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난, 이 남자를…….

선뜻 닿지 못하고 뻗은 손을 내린 그녀는 눈을 느리게 끔뻑끔뻑하다가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 후 잠에서 완전히 깼을 때는 그가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자 버린 유정이 조금 놀라며 입을 뗐다.

“언제 일어났어요?”

그녀는 반쯤 내려간 이불을 후다닥 들어 올리며 몸을 가렸다.

“배고프죠?”

“아니요.”

가슴을 다 드러내고 잤다는 생각에 머릿속에 있는 말을 아무거나 끄집어내는데, 그가 가볍게 대답하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줬다.

“잘 잤어요?”

이번엔 태경이 물었다.

언제나처럼 차분한 말투였지만 조금은 다정히 느껴져 유정의 마음이 잔잔히 울렸다.

그녀가 이불을 쥔 상태로 천천히 상체를 세우자, 그가 어깨를 감싸 일으키며 도왔다.

그러고 나서 옷을 입은 태경은 유정의 앞에 앉아 탁상에 있는 핸드폰을 힐긋 눈짓했다.

“핸드폰 좀 써도 될까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 그인지라 유정은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뒷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쓰다듬은 태경이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더니 삼십 분쯤 지나서 다시 들어왔다. 식당에 다녀왔는지 손에는 포장된 음식이 들려 있었다.

태경은 익숙하게 상을 차리고, 유정이 있는 이부자리 위로 상을 옮겼다.

밤새 그에게 붙들려 있던 탓인지 허기가 진 유정은 그가 사 온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배고프지 않다는 말이 참인 듯 그는 수저를 들지 않고 유정이 먹는 모습만 지켜봤다.

“잠깐 어디 좀 다녀와야 할 거 같아요.”

그녀가 거의 다 먹어 가자 그가 말했다.

유정은 음식이 목에 턱 걸리는 것 같아 물을 마셨다.

“어디요?”

“동료들이 저를 찾는 거 같아요.”

“그러겠네요.”

잠시 아무 말 없던 유정은 당연하듯 말했다.

군인인데 다쳐서 이런 곳에 있으니, 그를 찾는 사람이 없을 수 없었다.

“이틀 정도면 되는데 괜찮죠?”

유정은 그의 물음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사실, 허락을 구할 뭣도 아니지 않나.

그녀는 그에게서 시선을 잠시 뗐다.

상처도 다 나았는데 왜 돌아와요?

그가 어제 헤집어 놨던 입 안에 말이 차올랐지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경은 조금 전보다 더 낮고 명확한 말투로 요구했다.

“이제 앞집 애들 올 리 없겠지만, 잘 때 문 꼭 잠그고 자요.”

유정은 걷어차면 열릴 것 같은 문을 차갑게 쳐다보는 그를 보며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 * *

그는 유정이 출근하는 걸 보고 나서 집을 떠났다.

유정은 한 칸짜리 방에 우두커니 서서 두리번거렸다.

퇴근하고 나서 아주 오랜만에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은 처음인 것처럼 어색했다.

그래도 첫날은 그뿐이었다.

이튿날이 되니 가슴이 시릴 정도로 허전함을 느꼈다.

싱크대에 그대로 있는 설거짓거리, 이틀 새 쌓인 빨래,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는 바닥.

그가 집에서 해 주던 일이 꽤 많았다는 걸 새삼 알 수 있었다.

괜히 울적해지는 기분에 서둘러 몸을 바삐 움직였지만, 뭐든 그 남자만큼 깔끔하게 되지 않아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고작 이틀인데, 이상하지. 남자가 남긴 흔적은 참 고약하게도 가슴속 깊이 박혔다.

그게 강하게 받아들여지는 순간, 그가 오기로 한 날짜는 무던히도 지나갔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밤.

그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 * *

홍콩의 중심가에 랜드마크라도 되는 양 우뚝 솟은 초고층 호텔은 유동 인구가 많았다. 들어가고 나가는 외제 차의 향연, 고급스러움으로 점철된 현지인과 여행객. 거기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주니 운무 낀 산등성이처럼 기이한 웅장함이 더해졌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로비를 출입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회전문 너머 한 남자를 힐끔거렸다. 얇은 빗금처럼 내리는 빗속을,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워낙에 빠른 걸음이라 길게 뻗은 다리가 바닥을 박찰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날 법도 한데 신기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소리를 죽이는 게 몸에 밴 사람처럼.

남들은 차를 타고 오는 곳을 걸어서 들어온 남자는 머리카락에 안개처럼 앉은 물기를 손으로 대강 툭툭 털어 냈다. 대리석 바닥과 눈부신 샹들리에 중간에 낀 주제에 혼자 더 화려했다. 심지어 대체로 후줄근하다고 표현하는 옷을 걸치고도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서식지가 바뀐 짐승이 지형을 탐색하는 것 같은 눈으로 주변을 훑어본 남자는 곧장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걸어갔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주춤했다. 그저 옆에 선 것뿐인데 부담스러운 존재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로비 층에 도착하기 직전에 남자의 발이 먼저 나갔다. 덕분에 문이 열리자마자 제집 안방처럼 내부를 차지했다.

눈앞에서 문이 닫히기까지는 고작 3초 남짓이었다. 남자는 사람들이 미적거리는 것에 대해 못마땅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손끝이 가차 없이 닫힘 버튼을 눌렀으니까.

객실 앞에 도착한 남자는 노크랍시고 주먹으로 쾅, 하고 문을 두드렸다. 벼락이라도 내리꽂힌 듯 안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누군지 묻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그를 맞이한 건 귀신이라도 본 듯 얼떨떨한 얼굴의 에이든이었다. 붉은 기 섞인 금발과 대조되는 녹안은 놀라움으로 한계까지 팽창되었다.

임무 수행 중에는 수시로 임시 거주지가 바뀐다. 보안이 생명인 만큼 엄연히 정해 둔 암호가 있었지만, 본능대로 움직이는 한 사람에게만큼은 암호를 정해 줘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다시 듣게 될 줄이야. 동료들끼리는 우스갯소리로 저승에서도 살아 돌아올 위인이라고 떠들어 댔었는데, 그게 현실로 일어난 듯했다.

주태경은 문과 에이든 사이를 어깨로 비집고 들어섰다. 커튼으로 외부의 빛까지 차단한 프레지던트 객실 내부는 캄캄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노트북 불빛에 기대 겨우 움직이는 수준이었다.

“거리가 꽤 있던데, 엄청 빨리 왔네요?”

태경은 곧장 노트북 쪽으로 갔다. 에이든이 앉았던 의자가 걸리적거리자, 발로 밀치고는 선 채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길게 뻗은 손가락 놀림이 죽다 살아난 사람 같지 않게 포악했다.

모니터 화면에는 위치 추적기가 발동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낌새를 들었는지 방 안에서 대학생처럼 앳된 외모의 강준우가 튀어나왔다.

“선배님!”

몇 년 만에 보는 주인을 반기는 개처럼 다가온 강준우는 이내 흠칫하며 거리를 벌렸다. 모니터 불빛을 머금고 번들거리는 주태경의 눈은 잊었던 공포를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언제 봐도 그는 단순 평화 유지군과는 좀 이질적이었다. 저 성질머리에는 그나마 블랙스완 소속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각국의 이권에 휘말리는 일을 방지하고, 여차하면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최정예 요원으로 구성된 블랙스완은 확실한 중립이었다.

기구 안에서 비리 적발 시 즉결 심판이라니. 그만큼 주태경에게 어울리는 일은 없었다. 그는 유사시 현장에 출동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좀 멋대로 굴긴 해도 이제까지 단 한 건의 실패도 없었다. 용병 출신인 팀장 광현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점을 염려해 의도적으로 그를 임무에서 배제하기도 했지만, 그래 봤자 결국에는 해결사로 투입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팀장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다는 게 증명됐다. 임무 수행 중 부상당한 정황이 포착된 주태경이 감쪽같이 사라졌으니까.

“소말리아에서도 하루 만에 호출하셨던 분이 이번엔 깜깜무소식이라 최소 빈사 상태인 줄 알았잖아요.”

소말리아 테러 단체의 간부 기지에서 무기고를 털고 폭파까지 깔끔히 마친 후 멀쩡히 살아 돌아왔던 그였다.

“에이든이 사망 처리까지 했다가 팀장님이 수습하셨다고요!”

그런 그악한 인간의 죽음을 처음엔 아무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연락 두절 상태가 길어지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둥, 기습에는 그 자식도 맥 못 추는 게 정상이라는 둥 대다수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팀장, 광현만 빼고.

“FM대로 처리한 것 아시죠? 정말 이렇게 멀쩡할 줄은 몰랐습니다.”

묻지도 않은 말을 강준우가 줄줄 나열하자, 태경은 귓구멍을 후비며 경고를 담아 쓱, 하고 쳐다봤다. 시꺼먼 눈이 제게 꽂히자 강준우는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발렌틴 위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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