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9)화 (9/83)

9화.

식당에는 흥겨운 팝송이 흐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본 테라스 자리는 이미 만석이었다. 다행히 내부 공간도 문이 밖을 향해 죄다 열려 있어서 답답하지 않았다.

태경은 마치 제집인 양 들어가더니, 의자를 빼고 앉았다. 주체할 수 없이 긴 다리가 테이블 밖으로 삐져나왔다. 드러난 복사뼈조차 조각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메뉴판을 뒤적거리며 메뉴를 확인했다. 맞은 편에 유정이 앉자, 아까부터 그들을 주시하던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사장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유정, 네가 웬일이야. 손님으로 다 오고.”

말은 그녀에게 걸면서, 눈은 태경을 곁눈질했다. 지아의 소개로 일용직 서버 일을 하루 했었는데, 당시 어떻게든 일당을 깎으려고 안달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근방에서는 구두쇠로 유명한 양반이라고 했다.

게다가 입은 또 어찌나 가볍던지. 일당 안 깎아 준 걸 소문내고 다녀 한동안 서버 아르바이트도 뚝 끊겼었다. 이번엔 또 무슨 소문을 내려고? 태경까지 괜히 엮이지 않도록 유정은 짐짓 냉정하게 대꾸했다.

“식당에 밥 먹으러 왔죠.”

“그래? 근데 같이 온 잘생긴 남자는 누구야?”

태경은 사장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왜인지 얼굴은 굳어 있고. 낯선 사람이 불편해서 그랬으리라 해석한 유정은 마음이 급해졌다.

“제가 가이드하는 여행객이에요! 주, 주문할게요.”

그녀는 메뉴판 상단의 인기 메뉴 몇 개의 가리키며 주문하고는, 얼른 사장을 쫓아 버렸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댄 태경이 턱을 괴고 쳐다봤다. 어쩐지 눈빛이 차가웠다.

“오늘은 여행객이라고 거짓말하네요.”

“아…….”

“내가 쪽팔려요?”

“네? 설마요. 절대 아니에요.”

길을 지나다닐 때마다 모두 다 한 번씩 그를 쳐다보았고, 식당 안에서도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군인이라고 했잖은가. 창피할 리가 없었다. 어디 소속인지는 몰라도 누군갈 지키는 존경스러운 일인데.

“그게 아니라, 여기 사장님은 전에도 헛소문으로 절 곤란하게 한 적이 있어요. 괜히 저 때문에 태경 씨까지 피해를 볼까 봐서요.”

“날 위해 그랬단 거군요.”

조금도 참작할 이유가 못 된다는 듯 그가 말했다.

“네.”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태경은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우린 같이 사는데. 같이 먹고, 자고.”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좋은 말을 그는 서슴없이 내뱉었다. 아주 진지한 얼굴로.

“저기, 태경 씨.”

“거짓말은 싫어요, 유정 씨.”

“……그래요.”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뭐라고 그를 소개해야 하지? 같이 사는 남자?

유정이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태경이 말했다.

“좋아요. 믿을게요.”

그는 쓸데없이 예쁘게 웃었다. 신뢰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유정은 생각을 잠시 멈추고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실랑이 같지 않은 실랑이가 끝날 무렵 음식이 세팅됐다. 한국인 여행객도 간간이 보일 정도니, 주문한 음식은 대중적인 맛이었다. 그간 학교 급식보다 못한 식사로 생활했던 유정에게는 거의 환상적이었지만.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물 날 정도로 맛있었다. 허겁지겁 먹느라 뒤늦게 알았지만, 그는 별로 음식 맛에 감동을 느끼지 않는 눈치였다. 포크로 고깃덩어리를 짓누른 채, 나이프로 사정없이 도려내서는 그걸 모두 그녀에게 주었다.

사실 고기가 더럽게 질겼다. 대체 고기를 써는 건지 고무를 썰고 있는 건지 이렇게 구분이 안 돼서야. 게다가 나이프조차 제대로 길이 안 들어 있었다. 평소 육식이 부족한 유정이 아니었더라면 이깟 걸 먹겠다고 용쓸 일은 추호도 없었다. 마지막 한 점까지 도려내는 데 성공한 태경은 연장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물을 마셨다.

그의 접시가 빈 접시나 다름없는 걸 발견한 유정이 음식을 다급하게 삼켰다. 게다가 그의 시선 끝에는 4인 가족이 식사 중인 테이블이 있었다.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 같았다. 괜히 가족에 대해 물어서는…….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저기, 아깐 정말 미안해요.”

그의 눈길이 슥, 하고 유정에게 꽂혔다. 그녀는 죄인인 양 침울한 얼굴이었다.

“가족 얘기 말이에요. 제가 괜한 걸 말한 것 같아요…….”

태경은 대답 대신 냅킨을 든 손을 뻗었다. 입가에 소스가 묻어 있었는지 그걸 말끔히 닦아 줬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괜찮아요. 유정 씨가 가족 비슷하게 나랑 있어 주잖아요.”

하필이면 가난한 저한테 구해져서, 그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던 유정은 그의 말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제게도 그가 그런 존재 같아서.

* * *

식당 화장실에서는 하수구 냄새가 났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관리가 소홀한 게 여기서 드러나는 법이지. 인중에 콧수염이 듬성듬성 난 사장 낯짝을 그대로 닮았다.

근방에선 그나마 고급스러운 퓨전 레스토랑이었지만, 세계 일류 레스토랑은 죄다 접해 본 그에게 이깟 눈속임이 먹힐 리 없었다.

마뜩잖은 얼굴로 세면대에서 손을 씻은 태경이 발로 문을 밀고 나왔다. 아까보다 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그 가운데서 태경은 그녀와 앉았던 자리를 대번에 찾아냈지만, 거기엔 유정이 없었다.

인상을 굳히며 인파를 뚫고 나오던 태경의 흰자위에 문득 익숙한 실루엣이 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현지인 연주자가 앉아 있던 피아노 앞에 유정이 있었다. 유독 환한 조명을 받은 그녀는 비현실적으로 빛이 났다.

이내 작게 호흡을 가다듬은 유정이 차분하게 눈을 감고 건반에 손을 올렸다. 곧 그녀가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기막힐 정도로 근사한 선율이 흘렀다.

곡조가 느려질 무렵 문득 눈을 떴을 때, 태경과 눈이 마주쳤다. 사람들 틈에 서 있는 그는 나사가 하나 풀린 표정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동공만큼은 뚜렷했다. 시선의 방향은 지독할 정도로 유정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정성스럽게 손가락을 굴렸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직장과 집만 오가던 저를 여기로 데려와 준 그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비록 피아노가 낡은 데다, 긴장해서 몇 번 삐끗하긴 했지만 만족스러운 연주였다. 연주를 마치고 내려올 때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태경은 곧장 제게 오는 그녀를 주시했다.

“엉망이죠? 사장님이 부탁해서 한 곡 하긴 했는데, 안 할걸 그랬어요.”

“유정 씨, 천재였죠.”

“네?”

“겸손할 필요 없어요. 내 귀로 들었으니까.”

극단적인 칭찬이었다. 피아노 연주 덕분인지 사람들의 이목이 더더욱 둘의 테이블로 쏟아졌다. 현지인들이 다가와 엄지를 치켜세우며 칭찬하기도 했다.

급기야 젊은 남자가 건배하자고 잔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자 태경이 제 잔을 가져다 잔을 맞대 주고는, 남자가 항의하기도 전에 훅 마셔 버렸다. 남자는 기분이 상했는지 휙 가 버렸다.

“봐요. 별게 다 꼬이잖아요.”

사위를 훑어보는 태경이 번거롭다는 듯 말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유정은 그의 앞에 놓인 빈 맥주잔을 눈짓했다.

“술 좋아하세요?”

“아니요.”

“그런데 그렇게 마셔도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안 취해서 안 좋아하는 거라.”

안 취한다고? 그게 가능한 걸까? 유정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태경은 그녀의 잔까지 다 비웠다.

“이제 갈까요.”

아무래도 그는 술이 센 모양이었다. 새로운 정보를 습득한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직후부터는 술기운이 급속도로 올라왔다. 그와 나란히 걷는데 간헐적으로 어깨가 부딪치고 있었다.

하지만 주취자들이 대개 그렇듯, 그녀는 본인이 취했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구름에 붕 뜬 기분을 즐겼다.

태경의 칭찬을 곱씹을수록,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만 갔다. 그녀의 피아노 연주에 대해 가족들은 칭찬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든 상만 타 오길 바랐지.

갈지자로 걷던 유정은 앞뒤로 흔들리는 그의 손을 애틋하게 응시했다.

잡고 싶었다. 따뜻했는데. 웃기게도 가족보다 안 지 며칠 안 된 그에게 더 의지가 됐다. 그에게도 제가 줄곧 그런 존재였으면 했다.

“혹시 형제는 있나요?”

유정의 물음에 그는 전방만을 주시했다.

“몰라요. 없을 수도 있고.”

“…….”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요.”

아무 감정 없는 건조한 말투였지만 유정은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단순히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판단한 제 자신이 한심했다.

마음이나 몸이나 가족과 동떨어진 제 처지를 생각하던 유정은 마음 같아선 잡고 싶은 그의 손등을 괜히 손끝으로 쓸어내리기만 했다.

그러자 그가 제 자리에 우뚝 섰다. 덩달아 그녀가 걸음을 멈춘 순간, 어둠 속에서도 존재감이 뚜렷한 그의 검은자위가 그녀의 얼굴로 내려왔다.

“동정하는 거예요?”

“아니요. 그냥,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웃기죠.”

“…….”

“미안해요. 멋대로 손잡아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전히 그의 손등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 움직임을 보면서 태경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에게서 호응이 없자, 싫은 거라고 생각한 유정이 얼른 손을 거두고 집으로 들어갔다.

술은 쓸데없는 용기를 준다. 그러니 앞으로 단단히 경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만 해도 그랬다.

괜히 그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먼저 씻었던 그를 슬금슬금 피하며 피곤한 척 이부자리로 들어가려는데, 불쑥 불덩이 같은 것이 손을 뒤덮었다.

놀라서 일단 뿌리치려는데, 안 떨어져 나갔다.

유정이 당혹감 가득한 눈으로 제 손을 꽉 잡은 태경의 손을 내려다봤다.

“유정 씨. 손잡는 건 이렇게 해야 하는 거예요.”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의 뜨거운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오더니, 사슬처럼 꽉 잡았다. 태경은 그대로 힘을 가했다. 속수무책으로 이부자리로 눕혀진 유정은 술기운인지 뭔지 새빨개진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얼굴 옆에서 잡힌 손이 더 빈틈없이 꽉 붙들렸다.

“나한테 뭐가 그렇게 미안할까.”

그의 다른 손이 거침없이 티셔츠를 젖히고 허리께로 들어왔다.

두드러기처럼 솜털이 바짝 일어났다.

“지금 나도 사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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