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8)화 (8/83)

8화.

대문 밖 계단을 뛰어 내려오던 유정이 뒤에 선 파주댁을 돌아보며 인사했다.

고용인의 외동아들이 한국에서 돌아오는 날이라 집 안팎을 꾸미는 바람에 퇴근이 조금 늦어졌다. 집에 빨리 가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던 유정은 어느 순간 속도를 늦추고 입술을 매만졌다.

손끝에 걸리는 입술이 살짝 부어 있었다. 키스 한 번에 이럴 줄 몰랐던 그녀는 아침부터 거울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정작 물어보고 싶은 건 묻지도 못하고.

유정은 부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볼을 붉혔다.

그는 키스가 끝난 후 씻는다며 욕실로 들어가 버리고는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 안 그랬음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걸 들켜 버렸을 테니까.

어제의 첫 키스는 언젠가 지아에게 들었던 경험담과는 차원이 달랐다. 머릿속에 종이 울리고 꽃잎이 흩날리는, 풋풋하고 싱그러운 행위라더니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격이다.

머릿속에 종이 울리기는커녕 그의 흥분에 통째로 삼켜질 것 같은 느낌으로 발끝이 오므라들고 솜털이 쭈뼛 섰다.

숨이 가빠 매달릴 수밖에 없는데, 그게 이상하게 애달파졌다.

키스를 주도하는 건 그인데, 더 원하는 건 저였다.

“집에 가는 길이에요?”

머릿속에 가득한 태경으로 인해 잠깐 정신이 멍해졌을 때,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며 과일 바구니를 안겼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든 유정의 앞에 그녀가 일하는 집의 아들, 재이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사업에 뛰어들기 전, 잠깐 쉬고 싶다며 한국으로 갔던 그는 한 달 만에 돌아왔다.

“아, 네. 재이 씨도 집에 가세요?”

유정이 반갑게 묻자, 어두운 밤색 머리칼에 어울리는 맑은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네. 그건 친구가 준 건데 집에 가져가서 드세요.”

유정의 품에 안겨 있는 과일 바구니를 힐긋 쳐다보던 재이가 다시 제 손으로 옮겼다.

“참, 이거 무거운데 제가 들어 드릴게요.”

“감사히 잘 먹을게요.”

“집은 근처예요?”

“여기서 걸어서 20분 정도예요. 반대 방향인데 저 때문에 돌아가시지 말고 집에 가세요.”

유정이 예의를 지키며 걱정하자, 재이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시다시피 제가 좀 늦었거든요. 여기 친구들이 적당히 반겨 주질 않아서. 집에 가면 잔소리나 들을 텐데 조금 늦게 갈 수 있게 도와줘요. 이거 꽤 무거워요.”

재이는 과일 바구니를 들어 보이며 걸음을 옮겼다. 더는 거절할 수 없던 유정은 그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가는 길 내내 한국에서 있었던 시답지 않은 일들을 얘기해 주던 재이는 유정에게 그간 어떻게 지냈냐고 묻기도 했다. 그 질문에 덜컥 떠오른 게 있던 유정은 제 일상에 자리 잡은 남자의 존재감을 느끼며 집에 도착했다.

그녀는 다세대 주택 건물을 올려다보는 재이에게로 몸을 돌렸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농땡이 칠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마워요.”

시선을 마주한 재이가 유정에게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품에 안긴 과일 바구니 위로 턱을 들어 올린 유정이 눈인사를 하며 공용 대문으로 발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안에서 나오는 사람과 어깨가 부딪쳤다.

“어……?”

시선을 한참 위로 옮긴 유정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경을 보고는 눈을 둥글게 떴다.

그와 유정을 번갈아 쳐다보던 재이가 유정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태경의 눈길이 재이의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뭐라고 설명할지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진 유정이 다급히 입을 뗐다.

“오빠예요. 친오빠…….”

그러자 태경의 시선이 다시 유정에게로 느리게 굴러왔다.

“아… 한국에 계신다던……. 놀러 오셨나 보네요.”

재이가 신기한 듯 묘한 눈빛으로 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유정에게만 꽂혀 있었다.

이 상황이 뭔가 불편한 유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과일은 잘 먹을게요. 조심히 가세요.”

인사를 마치며 태경의 옷 소매를 슬쩍 잡아당기자, 다행히도 끌려와 주었다.

그는 유정이 힘겹게 안고 있는 과일 바구니를 훌쩍 가져가서는 모퉁이를 돌아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 손으로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바닥에 성의 없이 툭 내려놓자, 안에 들어 있던 망고가 데굴데굴 굴러가 유정의 발끝에 멈췄다.

그녀가 신발을 벗고 망고를 주우며 상체를 일으키는 순간, 팔이 앞으로 잡아당겨졌다.

손쉽게 유정을 앞에 세운 태경은 그대로 얼굴을 기울여 입을 맞췄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조그만 혀를 간지럽히고 입 안을 뜨겁게 달궜다.

키 차이 때문에 고개가 바짝 추켜진 유정의 가느다란 허리를 꽉 옭아매고 위로 들어 올리자 발뒤꿈치가 들렸다.

“흣……!”

그녀의 부푼 가슴이 딱딱하고 넓은 몸에 뭉개지듯 닿으며 키스가 더 진해졌다.

태경은 앵두처럼 부은 유정의 아랫입술을 핥으며 천천히 얼굴을 뗐다. 가늘게 뜬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로 내려갔다.

“유정 씨. 친오빠랑은 이런 거 안 해요.”

유정이 눈을 깜빡이며 어버버하는데 태경이 연이어 말했다.

“아까, 남자 친구예요?”

“……아니요. 제가 일하는 곳 고용인 아드님이에요.”

유정의 대답을 들은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거짓말했지.”

고요하고 낮은 음성을 끝으로 시선을 옆으로 돌리던 그가 다시 유정을 쳐다봤다.

얼굴에 닿은 기다란 눈매가 차가워, 그녀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남들에게 그를 정의할 수 없는 건 당연한 건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정체가 모호하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고, 저도 태경 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서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디서 왔는지…….”

그러면서도 잘도 같이 살았다.

유정이 말끝을 흐리자, 태경이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군인이에요. 대충은.”

멈칫하며 그를 빤히 보던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싱거운 대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그녀를 지켜보던 태경이 이해 안 간다는 듯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내 말이면 다 믿어요?”

맥없는 웃음과 함께 낮은 음성이 들렸다.

유정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간솔하게 답했다.

“나쁜 사람이면 지금까지 제가 이렇게 살아 있을 리 없잖아요. 그거면 됐어요.”

그녀의 모습이 가득 담긴 태경의 검은 동공이 확장됐다가 줄어들었다.

하.

태경은 잇새로 감탄 같은 헛웃음을 뱉어 내며 웃었다.

하얀 송곳니가 드러날 만큼 한쪽 입꼬리를 올린 그는 유정의 팔을 그러쥐어 바닥에 눕혔다.

“정확해요. 똑똑하네.”

웃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유정이 떨리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종아리를 움켜쥔 뒤 대뜸 다쳤던 복부 위로 올렸다.

“싫으면 여기 발로 차요.”

“네?”

뭐가 싫다고 표현하라는 건지는 말 대신 행동으로 이어졌다.

태경은 유정의 목덜미를 감싸며 입을 맞추고, 잡고 있던 종아리를 매만지다가 허벅지로 손을 올렸다.

기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더 깊은 안쪽으로 파고들 듯 애타게 굴었다. 목덜미를 감싼 손은 티셔츠 사이를 파고들어, 군살 없는 하얀 배를 누르더니 옆구리를 꽉 움켜잡았다.

“…흐읏……!”

유정의 달뜬 숨으로 좁은 방 안이 순식간에 후끈해졌다.

위로 들린 한쪽 다리 사이가 촉촉해지는 걸 느낀 유정은 하늘 위로 붕 날아오르는 느낌에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처음 겪는 감각에 눈이 그렁그렁해졌는데 그의 손길에 녹을 것만 같아 생리적으로 맺히는 눈물이었다.

이게 뭐지? 아, 너무 이상해.

곧 그가 제 안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

유정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그의 어깨를 미약하게 밀었다.

“…저기……. 피임……!”

그녀의 말에 상체를 우뚝 세운 태경은 고요했다.

“제가 내일 퇴근하면서…….”

본능은 멈출 수 없었지만, 아무것도 준비 안 된 상태에서는 이성적으로 굴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가 오해하지 않게 말을 덧붙이는 순간, 태경이 유정을 끌어당기며 누웠다.

“그건 내가 준비할게요.”

나지막이 나온 말을 정적이 흘렀다.

유정은 등에서 느껴지는 태경의 심장 박동이 조금 빠른 것을 느끼며 숨죽였다.

그녀의 심장은 그보다 더 빨리 뛰고 있어, 그렇게 해야만 그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 *

일이 끝나자마자 슈퍼마켓에 들른 유정은 한참을 고민한 뒤 빈손으로 집에 갔다.

갑작스럽고 순식간에 벌어진 어제의 일은 그저 해프닝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두 번 다시 없을 일이라고는 장담 못 했다. 다친 곳을 발로 짓이기며 거절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처음 함께하는 밤부터 잠 못 이루던 건 그녀였기에.

종일 자기 생각만 했냐는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비우려고 해도 가득 차는 게 그 남자여서 인정 안 할 수가 없었다.

아침엔 일찍 출근하는 바람에 부끄러울 새도 없었지만, 저녁은 어쩌지.

공용 대문 앞에서 어름어름하던 유정은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을 울리자 모든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엄마, 차영에게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유정아. 이번 달은 급하다고 했잖아.

“월급 거의 다 보낸 거야. 아르바이트도 일이 생겨서 돈 못 받았어.”

-진기가 일하다 숨이 차서 못하겠다더라. 네 오빠 병원비는 챙겨야지 않겠어? 어렸을 때 너 구하려다가 다쳐서 그런 건데.

유정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오빠 얘기만 나오면 어깨에 짐을 짊어진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는 엄마에게 오늘은 조금 서운했다.

“여기서 생활하기 부족할 정도로 받은 돈 거의 다 준 거야, 엄마.”

-그래. 엄마도 알지. 하지만 어떻게 더 안 되겠어?

유정은 공용 대문 안으로 들어가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런데 대문 안쪽에 태경이 기대고 서 있었다. 걸음을 급하게 멈춘 그녀는 대충 통화를 마무리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려고 하던 찰나, 태경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게 가족이에요?”

높낮이 없는 물음에 유정은 멈칫했다.

뭔가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마음에 울컥 말이 튀어나왔다.

“네. 태경 씨도 부모님 계셔서 알겠지만…….”

“없어요.”

“네?”

당황한 유정이 눈꺼풀을 떨었다.

“아… 그럼 부모님께서…….”

“처음부터 없었는데.”

무덤덤한 태경의 목소리에 되려 저가 상처 받은 듯한 눈을 한 유정은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해요?”

상체를 조금 숙이며 유정의 얼굴을 보는 태경은 정작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울적한 표정의 유정을 살피더니 상체를 세웠다.

“외식하려고 했는데, 기분 풀어요.”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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