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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잡하고 다정하게 (6)화 (6/83)

6화.

유정은 사모님인 미희에게 월급을 최대한 빨리 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해서 다음 날 받을 수 있게 됐다.

여태까지는 아무리 급해도 재촉하는 법은 없었으나 이젠 입이 두 개니,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퇴근한 유정은 시멘트가 벗겨진 오래된 건물 대문 앞에 섰다.

모두가 쓰는 공용 대문은 항상 활짝 열려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면 그녀가 사는 다세대 주택이 있었다. 그녀가 머무는 곳은 건물 뒤편에 홀로 있는 방이라서 모퉁이를 돌아야 했다.

유정은 열쇠로 문을 열지 않는 게 익숙해졌다. 그 익숙함이 낯설기도 해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 감상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당연하다시피 방에 태경이 있었다.

“근처에 전당포 있어요?”

방에 들어와서 가방을 내려놓는 유정을 보며 그가 물었다.

시장 근처 가게를 떠올린 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요. 왜요?”

태경은 자리에서 일어서 유정의 가방을 다시 챙겼다.

“나가죠.”

그는 천장이 낮은 현관에서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갸웃하며 뒷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던 유정이 뒤늦게 문을 잠그고 따라갔다.

태경은 다친 다리답지 않게 절뚝이지 않고 똑바로 걸었지만, 확실히 걸음이 느렸다.

그래도 보폭이 워낙 커서 유정과 걸음이 맞춰지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정은 평소 그의 걸음이 무척이나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철컹-.

도착한 가게는 두꺼운 철문으로 닫혀 있었다.

안에 불이 켜진 것을 확인한 태경이 문을 열자, 가전제품과 잡동사니들이 먼저 보였고, 커다란 구멍이 뚫린 유리창 안에 가게 주인이 있었다. 주인은 태경과 유정을 번갈아 쳐다봤다.

유정이 태경에게 뭔가 물으려던 찰나, 태경이 뚫린 구멍 안으로 시계를 밀어 넣었다.

주인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시계를 손에 들고는 눈을 비비적거렸다.

빈민가에 자리한 곳이다 보니 당장 급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꽤 값비싼 물건들도 종종 들어오는 편이었다.

하지만 230000HK$의 시계라니.

주인은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고 태경을 올려다보며 기침했다.

“큼. 30000달러.”

가끔 들어오는 값비싼 물건들도 대부분 훔쳐 오거나, 주워 온 물건들인지라 어쨌든 이 시계도 정당한 방법으로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던 태경이 테이블을 짚고 상체를 숙였다.

“확실해?”

낮은 음성과 함께 태경과 눈이 마주친 주인이 움찔하더니 손을 저었다.

“33000달러. 그 이상은 안 돼.”

어차피 외국인이니 다른 곳을 가도 제값 받긴 힘들 것이었다.

그가 고개를 까딱거리자, 주인은 냉큼 현찰을 준비해 유리 구멍 밖으로 밀었다.

태경이 돈을 한 움큼 쥐는 걸 지켜보던 유정은 주인이 애지중지 들고 있는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짜디짠 현지 전당포에서 한국 돈으로 거의 500만 원을 준다고 하는 걸 보면 값이 굉장히 나가는 시계일 게 분명했다. 그건 사실 생김새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다친 그를 발견했을 때 그가 몸에 두른 것은 전부 그랬으니.

“시계, 중요한 거 아니에요?”

도매상을 나서며 유정이 묻자, 태경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

그녀는 신줏단지 모셔 놓듯 탁상 위에 올려 두었지만, 그에겐 굴러다니는 시계에 불과했으니 대수롭지 않은 게 당연했다.

그는 돈을 담은 유정의 가방을 그녀의 어깨에 메 줬다.

“가져요.”

묵직한 무게가 어깨에서 느껴지자 유정이 당황했다.

“제가 왜요?”

“난 필요 없어요.”

이 세상에 돈 필요 없는 사람이 있던가. 유정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눈빛은 건조했다.

궁핍한 제 생활 형편을 생각한 유정이 작은 목소리로 거절했다.

“안 주셔도 돼요.”

“생활비예요. 같이 살잖아요, 우리.”

같이 살잖아요, 우리…….

눈동자를 잘게 떨던 유정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저. 아무리 그래도 전부 다 받을 순 없어요. 개인적으로 쓰실 돈도 필요하잖아요.”

그럴싸한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그와 같이 살고 있기에.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돈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유정은 고개를 좌우로 휘휘 돌리기까지 했다.

태경이 그런 유정을 물끄러미 봤다.

“난 돈 필요 없어요.”

진심인 듯 미련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 필요하면 오늘 아침처럼 해 줘요.”

정작 유정은 아침에 푼돈을 쥐여 주며 조금 창피하기까지 했는데, 그게 좋았는지 그의 얼굴에 문득 만족감이 스쳤다.

그는 더 거절하지 말라는 듯 긴 다리를 움직여 먼저 나아갔다.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커다란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정은 어깨에 멘 가방을 품에 안았다.

* * *

억지로 받긴 했지만 그가 준 돈 덕분에 생활이 여유로워졌다.

반찬 걱정 없이 끼니마다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었다. 그의 돈이지만 마음이 한결 편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에게 쓰는 것만 아끼지 않고 나머지 부분에선 평소처럼 절약하던 유정은 쫓겨나기 싫다는 태경의 회유로 집세도 냈다.

흡족한 집주인의 반응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온 유정은 시장에 들르려 공용 문을 나서는 순간 태경과 마주쳤다.

“어디 가요.”

그는 오늘 실밥을 제거하고 왔다. 병원에서도 인정할 만큼 엄청난 회복력이었다.

애초에 어설픈 처치만 해 뒀을 때도 아픈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걸 보면 그런 상처쯤은 익숙한 듯했다.

유정은 그의 허벅지 쪽을 힐긋 내려다보며 고개를 들었다.

“내일 먹을 것 장 좀 봐 오려고요.”

“같이 가죠.”

먼저 문을 나선 그를 따라 유정도 밖으로 나갔다.

아직 물에는 닿으면 안 되지만 움직임이 확실히 편해진 그는 걸음도 달라졌다.

종종걸음으로 뛰어갈 생각을 하던 유정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걸음걸이가 맞춰지는 걸 느끼며 그를 바라봤다.

태경은 시장에 도착해서도 느긋한 자세로 걸으며 유정이 뭔가를 살 때마다 짐을 들어 줬다. 어디론가 혼자 가서 형광등을 사 오기도 했다.

상인과 잠시 얘기를 나누던 유정은 좁은 시장 안에 우뚝 서서 혼자 빛나는 남자를 자기도 모르게 멀거니 쳐다봤다.

지나치는 사람들이나 상인들이 그를 빤히 보며 쑥덕거려도 그게 익숙한 듯 시선조차 주지 않는 남자.

유정은 그가 집 안에만 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돌아다니는 거 피곤하지 않아요? 다리도 아직 다 안 나았고.”

“괜찮아요.”

고개를 작게 끄덕인 유정이 그가 잔뜩 들고 있는 짐을 쳐다봤다.

“짐 무겁진 않아요? 무거우면 저 주세요.”

“그럴 리가요.”

설핏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도 없이 하나둘 가져간 짐이 잔뜩이어도 그는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유정은 대신 집 가는 길에 사탕 같은 군것질거리를 많이 샀다.

며칠 같이 있다 보며 알게 된 것은, 남자는 엄청 깔끔하고, 집안일도 잘하고, 단 걸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단 걸 좋아하는 건 의외의 발견이라 출근 전 탁상 바구니 위에 사탕을 꽉 채우고 가는 게 버릇이 됐다. 가끔 퇴근하고 오면 그에게서 나는 레몬 향이 좋기도 했다.

“불 켜 봐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새로 산 형광등을 갈던 태경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정을 쳐다봤다.

불 켜는 스위치를 달칵 누르자 잠깐 깜빡깜빡하더니 방 안이 밝게 빛났다.

키가 닿지 않아 갈지 못했던 것을 그는 팔만 위로 살짝 뻗어 해결했다. 전보다 더 또렷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유정이 고마운 마음에 사근사근 입을 뗐다.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전부 말해 봐요.”

감동 어린 목소리에 그가 되물었다.

“전부?”

“네.”

유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으로 눈길을 돌리던 그가 잠깐의 침묵 끝에 답했다.

“유정 씨가 해 준 건 다 맛있어요.”

조금 놀란 유정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고마워서 한 질문인데 대답마저도 고마워, 얼굴에 옅게 분홍빛이 번졌다. 괜스레 손등으로 볼을 꾹 누르며 뒤를 돈 그녀는 저녁밥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유정과 눈을 마주하며 깨끗하게 다 먹어 치운 태경은 먼저 이부자리를 깔았다.

베개에 머리를 뉜 유정은 손끝에 닿는 태경의 팔뚝에 움찔하며 모로 누웠다.

너무 의식하는 거 같아서 무시하려 했지만, 그가 발을 어루만진 후로는 그것도 잘되지 않았다.

밤은 고요해서 심장 소리가 더 잘 들릴 것 같아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벽을 마주 보고 누운 유정은 눈을 깜빡이다가 꾹 감았다.

그러자 문 앞에서 웅성대며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보지 않아도 반대편에 사는 남자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이렇게 뒤쪽으로 와서 담배를 피우고 노상 방뇨까지 했다. 한동안은 없었지만, 그전엔 잦은 일이었으니 놀랄 것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잠 못 이루던 유정은 밖에서 들리는 소음에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혹여나 태경이 잠에서 깰까 뒤척이지도 않던 그녀는 갑자기 옆에서 불쑥 일어서는 그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잠시 후, 개미 한 마리도 없는 것처럼 밖이 조용해졌다.

덜컥-.

곧이어 문이 열리고 닫히며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리더니 유정의 몸이 휙 앞으로 돌려졌다.

“왜 또 불편하게 자요?”

캄캄한 어둠 속 달빛에 음영이 드리운 그의 얼굴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내가 그때 만져서 그래요? 그래서 닿는 게 싫나?”

발을 어루만졌던 걸 정확히 꼽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사나웠다.

그가 잡은 어깨가 조금 아프게 느껴진 유정이 놀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 때문은 맞지만, 그가 다르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서둘러 말을 뱉었다.

“저기, 싫은 건 아니고요. 좋았어요. 그렇게 걱정해 주는 거…… 처음 있는 일이라.”

급하게 말하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좋았다고 고백해 버린 유정은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자꾸 신경 쓰여서……. 오해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유정의 말을 차분히 다 듣고 나서도 조용히 있던 그가 상체를 조금 더 숙였다.

가슴이 맞닿은 상태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신 유정이 제 머리 옆을 짚은 그의 팔을 조심히 잡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아직도 오해하고 있나?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갔다.

“종일 내 생각만 했어요?”

천천히 열리는 그의 입술이 뱉은 말에 유정은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유정은 시선을 맞추는 남자의 눈동자를 피해 눈을 잠깐 감았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다시 눈을 뜨는데, 그 순간 목덜미를 감싼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뜨거운 감촉이 입술 위를 지그시 누르며, 숨결이 코끝과 입술 사이로 나붓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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