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5)화 (5/83)

5화.

“안 다쳤네요.”

찬물을 끼얹듯, 태경이 말했다. 어쩐지 건조한 음성이었다. 쓰다듬는 손길을 받으며 나사 빠진 얼굴로 있던 유정은 그제야 고개를 세웠다.

그가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집어삼킬 듯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좀 전까지만 해도 피부를 어루만져 주던 손은 금세 떨어져 나갔다. 대신 냄비를 주워 들고, 흥건한 바닥을 수건으로 훔쳐 내고 있었다.

유정의 눈길이 아쉬운 듯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다가, 흠칫하고 시선이 흔들렸다. 아쉽다는 생각이 낯설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던 열아홉부터 그런 감정은 못 느낄 줄 알았는데.

“제가 할게요.”

무릎걸음으로 가려는 걸 그가 막았다.

“둬요.”

“하지만…….”

“유정 씨 놀랐잖아요. 그냥 있어요.”

까딱까딱.

태경이 보지도 않고 가만히 있으라는 듯 젖은 손을 저었다. 고개 숙인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불에 냄비 하나도 못 올리는 칠푼이로 보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타박 한마디도 없는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그는 원래도 불평이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값깨나 나가 보이던 전투복이나 가죽 하네스, 벨트, 시계…….

온몸에 그런 걸 두르고 다니던 사람에게 저가의 의류나 사 입혀도 싫은 기색 없이 받아 입었다. 감정 표현이 서툴러 그렇지, 그는 정말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었다.

그가 대신 뒷정리를 전부 해 주고는 이부자리까지 봐 줬다.

다친 환자의 돌봄을 받았다는 생각에, 유정은 숙면에 들지 못한 채 이불에 얼굴을 묻고 후회를 거듭했다. 밖에서는 동네 개가 월월 짖어 댔다. 꼭 한심하다고 잔소리를 하는 것 같았다.

아니. 다 핑계다. 사실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간 순간에 매여 있었다.

누가 걱정해 주는 게 처음이었다. 가족도 사느라 바빠 안부 한 번 묻지 않는데. 든든하게 발목을 감싸던 태경의 뜨거웠던 체온이 아직도 발목이 남은 듯 화끈거렸다. 얼굴 가죽에 빈틈없이 달라붙던 눈길도 피부에 남아 간질였다.

먹고 사는 게 바빠서 남자를 만나는 건 꿈도 꿔 본 적 없지만, 대신에 지아에게 주워들은 건 있었다.

그때는 흘려들었던, 무용담처럼 늘어놓던 지아의 말이 지금에야 뚜렷하게 기억이 났다. 남녀 간에 생기는 스킨십은 뭐가 됐든 신호라고 했다. 그게 키스든, 섹스든, 연애든.

유정은 무차별 폭격처럼 떠오르는 낯선 단어들에 떠밀려 뒤척였다. 그러다 옆에서 자는 태경을 깨울까 봐 단정히 모로 누워 눈을 꾹 감았다. 모르면 몰랐지, 알고는 태연할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스윽, 하고 이불이 내려갔다.

바람구멍이 뚫린 것처럼 벌어진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유정이 금세 차갑게 식은 팔을 감싸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틀자, 어둠 속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은 그의 실루엣이 보였다. 태경이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삐딱하게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왜 안 자고.”

“…….”

“어디 불편해요?”

“아니요. 그냥…… 이제 자려고요. 태경 씨는 왜 안 주무세요?”

“…….”

“저 때문이죠?”

바닥을 지탱한 손끝으로 이불을 툭툭 두드리던 태경이 이내 순순히 대답했다.

“네.”

“이제 안 뒤척이고 잘게요.”

유정이 짐짓 경건한 자세로 약속했다.

그걸 보던 태경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 눈매를 뒤틀며, 놀고 있던 손으로 제 머리통을 감쌌다.

어두워서 그걸 보지 못한 유정은 몸에 힘을 주면서 모로 누웠다.

그러자 태경이 친히 팔을 뻗어 양어깨를 잡아 똑바로 눕혔다. 이대로 움직일 생각 말라는 듯 아프지 않게 찍어 누르기도 했다.

“왜 벽 보고 눕지. 습관이에요?”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뭔가 달랐다. 뭐에 심사가 꼬인 걸까. 유정은 아리송한 얼굴로 그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비좁아서 서로의 몸이 거의 맞닿을 지경이라, 금세 머리가 녹아내렸다.

손끝에 태경의 새끼손가락이 툭, 닿았다.

놀란 유정은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더 꼭 감았다.

* * *

오랜만의 휴일이었다. 알람을 맞춰 놓지 않아, 느지막이 눈을 뜬 유정은 집안 상태가 깔끔해서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싱크대엔 설거짓거리가 없었고, 엊저녁에 빨아 놨던 옷은 잘 개켜져 탁상 위에 있었다. 심지어 각이 잡혀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엄마도 저렇게까지 꼼꼼하진 않았는데. 같이 살면 원래 이렇게 일거리가 줄어드는 건가.

저만 빼고 온 가족이 마카오로 야반도주해서 외톨이. 재작년 겨우 마카오로 찾아왔을 때도 얼마 못 가 생이별을 해서 또 외톨이.

없는 형편에 룸메이트를 만들면 편했겠지만, 친구도 없는 판국에 언감생심이었다. 지아는 솔로 라이프를 좋아해서 무리였고.

뭉근한 따뜻함으로 마음이 이상했다.

그러던 차에 욕실 문이 열리며 태경이 나왔다. 유정은 개켜진 빨랫감에서 눈을 못 떼고 말했다.

“이런 거 되게 잘하시네요.”

“어릴 때 많이 해 봐서요.”

태경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정말 의외인데, 본인은 모르는 눈치였다. 거짓말 좀 보태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 본 것처럼 생기셨는데.

“저도 어릴 때 엄마랑 같이 집안일 해 봤어서 익숙해요.”

어릴 땐 그래도 화목했는데. 지금 유정이 남의 집 살림을 하는 것처럼 그녀의 가정도 옛날에는 살림을 도와줄 사람을 둘 만큼 여유로웠다. 소소한 집안일 같은 건 괜히 엄마랑 있고 싶어서 졸라야 가능한 일일 정도로.

“지금은 따로 살지만…….”

“따로?”

“엄마랑 오빠는 한국에 있고, 저만 여기에 있어요.”

가족 이야기를 하는 건 오랜만이라 목구멍이 뻐근하던 차에 누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안 그래도 부실한 문이 애처롭게 흔들릴 정도였다.

얼굴에 언뜻 불안함이 스쳐 간 유정이 서둘러 나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이제부터 오갈 대화가 감추고 싶은 비밀이라도 되는지 현관문이 탁, 하고 닫혔다.

그런다고 못 들을까 봐서.

태경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벅벅, 문지르며 현관문 옆에 붙은 창문 아래로 가서 섰다. 벽에 등을 대면, 귀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잘 들렸다.

방세가 또 밀렸어! 자꾸 이런 식이면 나도 곤란해!

목에 가래가 잔뜩 낀 노인은 꽤 강경한 태도였다.

월세가 한두 번 밀린 것도, 죄송하단 말을 하는 것도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닌 모양인지 퍽 자연스러웠다.

태경이 젖은 수건을 목에 툭 걸고는 벽에 뒤통수를 툭, 툭, 두드렸다.

“이번 주까지 드릴게요.”

“이번 주까지 돈 안 내면 방 빼야 할 거야. 알았어?”

“네. 죄송합니다.”

대화를 끝낸 유정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배고프네요. 밥 먹죠.”

태경을 보지도 않고 말한 유정은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지만 반찬이랄 게 없어서 속상한지 멈칫하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기껏 차린 밥상 앞에서 태경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왜 혼자 여기 있어요?”

숟가락을 든 손을 무릎 위로 내린 유정의 손등이 하얗게 드러났다.

“집에 빚이 좀 있어서 돈이 급했거든요. 어렸을 때 배운 피아노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월급 많이 주는 곳으로 여기 일을 주선 받았어요.”

피아노로 콩쿠르에 출전해 수상도 했었지만, 그것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가계에 당장 보탬이 되지는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작고하고, 제일 먼저 팔아 치워 돈을 챙긴 게 피아노였으니 그래도 도움은 된 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유정은 사회로 던져졌다. 마카오에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통신비, 집세, 식비만 남기고 모조리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부치며 생활 중이었다.

“빚이 얼만데요.”

“팔천 정도요.”

“……유정 씨 몇 살이죠?”

남자는 오늘따라 질문이 많다. 하는 질문 족족 민감한 부분인데도 그게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신기했다. 그가 뭔가 궁금해한다는 자체가.

다만 대답이랍시고 할 게 하나같이 구질구질한 것들 뿐이라 좀 그랬다.

“스물네 살이요.”

태경은 미간을 구겼다.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났다. 어리게 생겼다고는 느꼈지만, 정말 어리다. 그런 애 등에 가족이 죄다 업혀서 기생충처럼 피를 빨아먹는 눈치고.

그가 임무에 한 번 나설 때마다 받는 보수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아니,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금액의 빚으로 이렇게 사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대체 머리가 어떻게 돼먹었길래 그 나이에 가장 노릇을 해. 착한 것도 어지간해야지.

가족이랍시고 있는 것들이 남보다 못할 수 있다는 의심도 못 할 정도로 그녀는 완벽하게 선량한 인간인 것이다.

그였다면 어땠을까.

아는 사람도 없는 타국에, 그것도 이따위 골방에 처박혀 매일같이 일해 번 돈을 뺏어 가는 가족이라면, 없는 형편에 당장 그것들부터 팔아 치워 생활비를 마련할 것이다.

하여간, 이 애는 제 살 깎아 먹는 줄도 모르는 미련한 애다.

태경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그 혀에는 어떤 사탕을 처먹을 때보다 더 달콤한 맛이 감겼다.

그런데 그녀는 얼마나 더 놀라게 할 작정인지, 다음 날 아침에 불쑥 다가왔다.

출근 전, 자꾸만 눈치를 보며 망설이다 겨우 용기를 냈는지 감추고 있던 손에서 지폐를 펼쳐 내밀었다.

“이제 조금씩 움직일 수 있잖아요. 몇 푼 안 되지만, 저 없을 때 뭐라도 사 드세요.”

턱없이 적은 금액이라 무안하지만 그래도 그게 자기가 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듯 초연했다.

그가 선뜻 받지 않자, 직접 손에 지폐를 쥐여 주기도 했다.

태경은 하찮을 정도로 꼬깃꼬깃한 지폐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녀는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에코백을 크로스로 두르고는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

어이가 없지.

이번 주까지 월세 못 내면 쫓겨나야 하는 주제에. 빈대 붙은 놈에게 용돈을 줘?

기가 막힌 감동이었다. 그 신선함에 뇌가 도파민으로 범벅이 됐다.

“하.”

태경은 헛웃음이 터졌다.

이거 뭐지. 쟤 뭐야.

누가 쥐어뜯고 흔들어도 모를 정도로 심장이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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