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4)화 (4/83)

4화.

스스로가 물건인 것처럼 말하면서 웃는데, 유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래서 얼굴 반절을 가리고 다녔나 생각이 들 만큼, 순간 정신이 멍해질 뿐이었다.

“그보다, 병원에 입원하는 게 더 나을 텐데요.”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로 말이 띄엄띄엄 나왔다.

멋대로 주워 왔으니 책임지라는 건가. 얼떨떨했지만, 남자의 말이 거북하지 않았다.

게다가 피 줄줄 흘리며 다친 남자를 내쫓을 수 없었다.

“어쨌든 병원은 가야 해요. 아무리 봐도 그냥 두면 낫지 않을 상처인데. 이대로 우리 집에만 있을 수는 없어요.”

확실히 남자는 어제보다 더 창백했다.

평온한 얼굴이긴 했으나 식은땀을 매달고 있던 남자는, 그녀의 말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반박하지 않고 얌전히 따랐다.

유정은 일 년간 모은 돈을 챙겨 남자의 옷부터 사서 입힌 후, 남자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복부의 찔린 상처를 긴급으로 치료받고, 베인 허벅지를 20바늘 꿰매는 동안 악 소리 한 번 내지 않던 남자는 입원도 마다했다.

도대체 이 상태로 어떻게 멀쩡히 있었던 건지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한 건 남자가 별다른 증명 없이 병원에서 쉽게 치료받을 수 있단 거였다.

외국인 신분이 아닌 건가.

유정은 집에 도착해, 불편한 거동으로 일어서는 남자를 바라봤다.

“좀 씻고 싶은데.”

남자가 그녀를 느리게 쳐다보며 읊조렸다.

그간의 통증으로 남자는 피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말리는 것보단 도와주는 게 나을 거라 여긴 유정이 짤막한 탄식과 함께 욕실 문을 열었다.

“도와드릴게요.”

유정은 커다란 고무 대야를 뒤집어서, 남자를 앉혔다.

생각해 보니 어제 허벅지 부위 상처도 그가 처치했는데, 그 후 복부 쪽 거즈가 더 붉게 젖었다.

유정은 어두워진 표정을 가리며 남자의 벗은 하체에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수건으로 덮고, 수건 하나를 더 꺼내어 물을 적셨다.

물기를 꼭 짜내고 남자의 어깨와 등부터 닦아 주는데 괜히 긴장돼서 손이 떨렸다.

수건이 조금씩 부드럽게 닿을 때마다, 꼿꼿하게 세운 남자의 등에 잔근육이 불거졌다.

수도꼭지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욕실 전체를 울릴 만큼 적막한 공간에 두 사람이 내뱉는 숨이 가득 찼다.

이윽고 조금 개운해졌는지 남자는 목을 옆으로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잠시만 고개 뒤로 젖혀 봐요. 머리 감겨 드릴게요.”

유정의 조용한 목소리에 한쪽 눈을 가늘게 뜬 남자가 다시 눈꺼풀을 닫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반듯하고 깨끗한 이마와 기다란 눈매. 높은 콧대가 어두운 욕실 조명에 음영을 드리웠다.

눈 감은 남자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유정이 샴푸를 짜서 조심스럽게 머리를 감겨 주고, 물기가 촉촉한 남자의 몸도 마른 수건으로 닦아 줬다.

남자는 숨을 크게, 그리고 천천히 들이마시며 여자의 손길에 집중했다.

단단한 가슴이 크게 부풀며 줄어들더니 이내 그가 스르르 눈을 떠 고개를 숙였다.

온아하게 펼쳐진 사뿐한 속눈썹. 데굴데굴 움직이는 커다란 눈망울. 집중하느라 찡그린 작은 코. 핏줄이 비치는 새하얀 얼굴 위에서 남자의 시선이 진득하게 굴러갔다.

그녀는 상처를 제외한 몸을 조심스레 닦아 주고서는 복부 상처에 물기가 닿은 건 아닌지 꼼꼼히 확인까지 했다.

자신의 목을 조르는 손보다 조르는 사람의 상처를 더 신경 쓰던 눈으로 꿰맨 상처를 참 조심히도 살펴봤다.

남자의 시선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때마침 유정이 상처 확인을 끝내고 이불을 덮어 주며 상을 폈다.

“드세요. 뭐라도 넣어야 하는데, 월급 받는 날이 조금 미뤄져서요.”

머쓱하게 말하며 간이 심심하게 된 죽과 병원에서 타 온 약을 상에 올렸다.

태경은 상에 올려진 것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흰죽에는 이름 모를 채소가 곱게 다져서 섞여 있었다.

당장 죽을 입에 쑤셔 넣어야 할 것 같을 정도로 기대에 찬 눈빛과 마주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맛있어요?”

“네.”

애써 기쁜 기색을 숨기는 유정을 쳐다보던 그가 곰팡이 핀 벽지 구석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월급 제때 못 받아요?”

멈칫한 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이럴 때가 있어요. 그래도 주긴 주세요.”

설핏 찌푸린 남자의 눈이 유정에게 닿았다.

* * *

여자가 떠난 집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했다.

출근한 여자는 아침 식사로 먹으라며 구운 빵을 상 위에 올려 두고 갔다.

저는 먹지도 않는 아침밥을 왜 이렇게 꼬박꼬박 챙겨 주지.

빵에 꽂혀 있던 시선을 느리게 돌린 주태경이 벽에 고개를 기댔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탁상 위에 있는 몇 권의 책들과 가족사진, 여자의 허름한 흔적들을 훑었다.

구질구질한 게 딱 그 여자 같으면서도, 신선했다.

사흘 전. 러시아의 암묵적 킹메이커인 세르게이의 사고뭉치 아들, 발렌틴을 마카오에서 데려오라는 임무를 받았다.

얼마 전 결혼식 일도 발렌틴이 참석할 예정이어서 마카오 경찰과 협업해 처리했으나, 정작 발렌틴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실세 부친을 둔 자칭 러시아의 왕자 발렌틴. 불같은 성질에 천진난만함이 합쳐진 그 또라이 왕자님은 지저분한 유희에 흠뻑 빠져 있었지만, 몸뚱이를 무사히, 그리고 얌전히 러시아로 돌려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안 나타나면 찾아가면 되니까. 찾은 순간 발렌틴의 경호원으로 지정해서 데려간 놈들이 갑자기 칼로 쑤신 것만 아니었으면, 정말 그랬을 터다.

그래서 당분간은 죽었거나 빈사 상태로 알게 둘 예정이었다.

죽은 사람이 멀쩡히 살아 돌아와 다 조져 놓으면 뒤집어지겠지.

평화 유지를 위해 움직이지만, 질 나쁜 놈들에게 평화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 멋대로 굴 예정이었다.

벌써부터 기대감에 떨려 오는 몸을 뒤로하고, 머리는 제멋대로 휴식을 취했다.

그러니까, 주태경은 지금 이 말도 안 되게 열악하고 협소한 생활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불필요하게 통성명까지 주고받았는데 이젠 신경도 안 쓰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의심조차 없이 남에게 맡긴 적은 의사 말고는 난생처음인데 그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자꾸 언제 가냐는 식으로 말하는 여자를 볼 때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병원 가라는 말을 얌전히 들어주니 그런 말도 쏙 들어갔다.

열흘은 너무 짧았나. 한 달이라고 할걸 그랬나.

자기가 어떤 걸 주워 왔는지 자각도 못 하는 여자가 저를 내쫓을 리도 없을 텐데.

태경은 눈꺼풀을 내려 시선을 차단했다.

그녀가 올 때까지 시간을 축내고 있는 거지만, 기다리는 모양새 같아 괜한 웃음이 나왔다.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건지 그녀는 어제와 다른 늦은 시각에 들어왔다.

현관문을 열고 나타난 그녀는 가느다란 머리칼을 한데 모아 묶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숨겨졌던 동그란 귀와 어깨로 눈길이 갔다.

“오늘도 늦었네요.”

원체 뼈대가 가는 몸이라 못 먹어 그런 줄 알았는데. 목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선이 놀랍도록 유려하다.

이러고 일을 했다고.

“원래 이 시간까지 일해요?”

“아니요. 오늘은 잠깐 장 좀 보고 왔어요. 그런데, 이건…….”

유정이 그가 낮에 개켜 놓은 빨래를 눈짓하자, 그도 그녀의 시선을 좇았다.

“다쳤는데 왜 이런 걸…….”

대답도 듣지 않고 서둘러 싱크대로 몸을 돌리는데 귓불이 빨갰다.

“배고프죠? 얼른 저녁 먹어요.”

퍼줄 줄만 알지, 받는 건 영 젬병이네.

태경은 유정의 가녀린 뒷모습을 응시했다.

연기력을 훈련받은 인간이라면 지겹도록 봐 왔다. 이제는 숨 쉬는 꼴만 봐도 뭐가 진짜고 가짠지 구별할 수 있다.

유정이 타국에서 혼자 지내느라 무표정이 굳은살처럼 배겼다고 해도, 그에겐 시시할 정도로 그 속내가 잘 보였다.

저축한 돈을 생판 남의 치료비로 몽땅 써 놓고, 고작 이까짓 걸로 뭉클해. 심지어 뭐라도 해 주겠다고 또 서두르는 것 좀 보라지.

빈민가라면 일가견이 있는데, 여긴 치안 좋은 마카오 안에서 압도적으로 질 낮은 동네다. 그런데도 타인에게 명백한 호의를 품고, 먹이고 재우고 입혀 줘? 어지간히도 이타적이다.

발로 걷어차면 한방에 열릴 것 같은 못 미더운 집에 살기까지 하면서 겁도 없는 여자는 저녁을 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댕그르르-.

그때 갑자기 바닥에 냄비가 구르고, 짤막한 신음이 들렸다.

“아……!”

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불에 올려 두었던 냄비를 쳐 버린 듯한데, 물이 다 쏟아져 하얀 발이 젖었다.

“이리 와 봐요.”

태경은 불쑥 목소리가 커지는 걸 억누르고 그녀를 불렀다.

“안 뜨거워요. 괜찮아요.”

그는 한쪽 눈썹을 세우며 제 앞으로 시선을 줬다. 다쳐도 다쳤다고 하지 않을 게 분명해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결국 유정은 어름어름 그의 앞에 가 앉았다.

태경은 상체를 조금 숙여, 팔을 뻗었다. 살집 없이 큰 손이 유정의 발목을 그러쥐었다.

다행히 화상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아픈 곳이 있는지 엄지로 발바닥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어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는데, 아랫입술을 오밀조밀 깨물고 있었다.

부끄러운지 조그만 발가락들이 오므라져 그의 손가락에 닿았다.

태경은 시선을 내려 제 손에 모아진 하얀 발을 쳐다봤다.

부드럽다. 너무 부드러워 딱딱한 손바닥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분명히 만지는 건 저인데, 만져지는 것 같은 자극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냄비 올려 둔 지 얼마 안 돼서 안 뜨거워요. 멀쩡한데.”

아니. 멀쩡하지 않은 건 그의 머릿속이었다.

그녀의 살결에서 풍기는 저렴한 바디 워시 향에 허벅지 사이로 열기가 느껴졌다.

기가 막히지. 좋다는 건 다 때려 넣은 고가의 향수도 불쾌해서 못 견디는데. 뱃가죽이 아니라 코가 터진 게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마저 들었다.

우물쭈물하는 유정의 입술을 보는데, 저도 모르게 그녀의 발목을 다시 그러쥐었다.

살갗 안까지 파고드는 간지럽고 기이한 느낌에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잡힌 발을 뒤로 살짝 뺐다. 태경은 그만큼 보다 더 제 허벅지로 당기며, 다시 뒤로 빼지 못하게 손아귀에 힘을 줬다.

다른 손으로는 발등과 발바닥을 뭉개듯 어루만지며 아킬레스건을 지났고 그 손가락 끝이 종아리에 닿는 순간, 유정이 작게 탄식을 뱉었다.

그 순간 그가 손에 힘을 탁 놔 버렸다.

그는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유정을 보는데, 유정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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