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잡하고 다정하게 (3)화 (3/83)

3화.

“너, 뭐야.”

몸 위에 올라탄 남자의 매서운 눈이 내리꽂혔다.

괜한 오지랖 부리면 명만 재촉한댔는데. 지금 딱 그 꼴이었다.

더운 숨을 내뱉는 남자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유정은 남자의 손등을 긁으며 절박하게 버둥거렸다.

그나마 힘을 조절하고 있는 건지 더 조여 오진 않았다. 다만 꿈쩍도 안 할 뿐이었다.

“놔……주세요.”

어떤 악의도 없다는 듯 유정이 절실하게 남자와 눈을 맞췄다.

“피……. 방금 거즈 붙였는데…… 또 피 나요.”

얼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 남자의 시선이 그제야 내려갔다.

말대로, 허리춤에는 피가 흥건한 거즈가 붙어 있었다.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구긴 남자가 시선을 들다가 멈칫했다.

그녀가 분명 손등을 긁어 대고는 있는데, 날카로운 손톱은 사용하지 않았다.

손끝, 뭉툭한 피부로 긁고 있으니 타격감이 있을 리 없다. 그냥 애처롭게 바르작거리는 수준인 셈이었다.

이번엔 정말 기가 찬다는 듯, 남자의 입술이 비틀렸다.

남자가 더 위협적으로 눈을 치떴다. 오해가 풀리기는커녕 더 서슬 퍼런 눈이 부딪혀 들어오자, 안 그래도 산소가 부족한 지경의 유정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까딱하다간 이대로 죽겠다 싶은 순간, 거짓말처럼 목을 조이던 손이 헐거워졌다. 유정은 물에서 갓 건져진 물고기처럼 꼴사납게 퍼덕거렸다.

그녀의 몸 위를 차지한 채 그 모습을 여상히 보던 남자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남자는 꼭 한 대 맞은 얼굴이었다.

유정이 결백하다는 듯 쳐다봤다. 눈 뜨자마자 제압부터 할 만큼 주변에 적이 어지간히도 많은 남잔가 보다.

“그, 저기요.”

여차하면 다시 낚아채기라도 할 거처럼 자세를 잡고 있던 남자가 돌연 순순히 풀어 주고는, 몸 위에서 물러났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정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고작 삼십 초 남짓 틀어잡혀 있었다고, 그새 허전해진 목을 제 손으로 감싼 채 경계 어린 눈으로 남자를 주시했다.

“그게, 집 근처에 쓰러져 계시길래 위험해 보여서요.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되거든요?”

남자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몸을 일으켰다. 피가 찍 새어 나와 거즈를 더 빨갛게 물들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족히 190cm는 될 것 같은 장신의 남자는 7평 남짓한 방을 완전히 장악했다. 단지 일어선 것만으로.

남자의 시선이 집 안을 천천히 훑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비를 받아 내고 있는 반쯤 물이 찬 양동이, 습해서 곰팡이가 핀 벽지, 금방이라도 암전될 듯 깜빡거리는 형광등…….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던 유정은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짓씹었다.

어디로 보나 남자는 이런 데 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풍파라고는 모를 것 같이 생겼다. 무엇보다 환자가 편히 쉬기엔 이 단칸방은 여러모로 불편하겠지.

남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근육이 유려하게 꿈틀거렸다.

유정은 숨죽여 그를 지켜봤다. 낯선 장소도 그에겐 장벽이 될 수 없는 듯, 싱크대에서 물을 틀고 얼굴을 씻었다.

“어디예요? 여기.”

침착한 남자의 목소리는 보통 사람보다 한 톤 낮았다.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가 사는 집이에요.”

남자가 유정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 다리로 나 데려온 거예요?”

바지 속 다쳤던 무릎을 떠올리자 순간 핏기가 가셨다.

알아봤다. 내가 누군지.

유정의 눈꺼풀이 불쌍할 정도로 파르르 떨렸다.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세워 두 팔로 껴안았다.

남자는 흐응, 하고 숨을 뱉으며 같잖은 것처럼 물었다.

“적선하는 게 버릇인가?”

위험한 남자라는 건 어차피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친 사람을 거기 내버려 두고 올 수 없는 노릇이었고, 남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일찌감치 죽을 운명이었다.

“적선이 아니라 돕는 거예요.”

유정이 담담하게 정정하자 눈매 끝을 가늘게 좁힌 남자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녀는 긴장한 기색을 숨기며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남자는 정체를 숨길 의사가 없다는 건데.

유정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충동적으로 남자를 데려왔다. 뒷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테러범이면 자신을 살려 줄 리 없었으나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며칠 전에 결혼식에는…… 왜 계셨던 거예요?”

“테러범 처리요.”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유정은 눈에 띄게 안도했다. 이왕 구해 줄 거라면 나쁜 놈보단 착한 놈이 나으니까.

경찰일까? 군인일까? 남자를 살피는 그녀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럼, 지금 다치신 건 보복 당하신 건가요?”

축축한 바지를 툭툭 털던 남자가 시선을 들었다.

“이제야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좀 감이 왔어요?”

“……네. 테러범한테서 당신을 구했네요.”

남자가 입을 다물며 유정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곧 피가 주르륵 흐르는 제 다리로 시선을 내렸다.

이번에도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던 유정이 다급히 붕대를 집어 들어, 남자의 손에 쥐여 줬다.

“상체는 제가 했는데, 나머지는 직접 하실 수 있죠?”

남자는 대답 대신 몸을 살짝 구부렸다. 바지 단추가 풀리는 것을 보고 유정이 다급히 뒤를 돌았다.

얌전한 자세로 벽을 쳐다보고 있으니, 사락사락 옷이 내려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고서야 유정이 다시 뒤를 돌았다.

드로어즈만 입은 상태로 남자가 가족사진을 담은 액자를 들어, 보고 있었다.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 위, 허리춤에 한 손을 얹은 남자는 거리낌이 없었다.

단속할 새도 없이 눈이 남자의 위아래를 훑었다. 근육질 허벅지가 붕대에 친친 감겨 있었다. 끝을 여민 부분이 깔끔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감탄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유정은 남자가 불시에 돌아보자 황급히 눈을 돌렸다.

“미안해요. 다 보진 않았어요.”

어설프게 말하고선,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방황했다.

뚫어지게 보던 남자가 한 손으로 제 턱 아래를 쓸어 만졌다. 남성성이 뚜렷한 몸하고는 매치가 안 되지만, 남자는 수염 자국 하나 없이 피부가 희고 매끈했다.

“이불 좀 깔아 드릴게요.”

유정은 당황하며 얼른 몸을 움직였다.

“적선이든 뭐든 오늘은 제가 멋대로 도운 거니 계시고, 내일 가세요.”

그나마 멀쩡한 이부자리를 그에게 내어 주고, 저는 구석에 앉았다.

곧 남자가 옆으로 오라는 듯 툭툭 이불을 치는 바람에 오래가지 못했지만.

문제는 여기가 단칸방이라는 데 있었다.

혼자 있을 때는 이 정도로 비좁다는 자각은 못 했었는데 남자가 있으니 정말이지, 좁았다.

최대한 이불 끄트머리에 붙어 누운 유정은 행여 몸부림치다 닿을까 싶어 아예 모로 누웠다.

양동이에 물 떨어지는 소리는 더 이상 거슬리지 않았다. 이따금 들려오는 나직한 남자의 숨소리와 그의 향기가 온통 머릿속을 장악했다.

이불 속에서 발을 꼼지락거리다 그만 뒤꿈치가 남자의 다리 사이로 쑥 들어갔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체온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 순간, 남자가 목에서부터 긁힌 듯한 신음을 흘렸다.

상처에 닿기라도 했을까 봐 놀란 유정이 벌떡 상체를 일으켜 그를 내려다봤다.

온통 까매서 남자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있다는 것까지는 보였다.

“아, 미안해요. 조심한다는 게 그만…….”

“됐으니까 누워요.”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저음이었다. 마음 같아선 상처가 덧났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는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안절부절못하던 유정은 결국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왔다. 아무래도 남자에게 저가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남자가 운이 더럽게 안 좋았다.

* * *

평소처럼 출근 준비를 하는데 남자의 시선이 계속 따라왔다. 차라리 어디 가냐고 묻기라도 하면 대답해 줄 텐데, 남자는 통 질문도 없이 과묵했다.

“아침밥으로 죽 했는데 많이 해서 남았어요. 그거 먹고 가세요. 열쇠는 여기 두고 갈 테니까, 문 잠그고 화분 밑에 놔두시면 돼요. 저는 출근해야 해서…… 이만.”

펼쳐 준 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고 있던 남자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모로 삐딱하게 기울였다.

뭐가 문제냐고 물어보려다 말고 유정은 몸을 돌렸다. 어차피 갈 사람인데, 오버하지 말자는 심정이었다. 남자도 좁고 허름한 집에 오래 있고 싶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면서도 유정은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남자가 신경 쓰였다.

죽은 먹고 갔을까, 병원엔 갔을까, 열쇠는 화분 밑에 잘 숨겨 뒀을까,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저택 창문 청소 날이라 평소보다 퇴근이 늦었지만, 남자에 대해 생각하느라 늦은 것도 실감이 안 났다.

집에 돌아와 약속한 대로 화분 밑을 뒤졌지만, 열쇠는 없었다. 문도 그냥 열렸다.

유정이 서둘러 들어서는데, 불 켜진 방 안에서 남자가 독서 중이었다.

여전히 어제 그 차림이었다. 헐벗은 몸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돼, 유정의 눈이 갈피를 잃었다.

겨우 눈을 둔 곳은 그가 읽고 있는 책이었다.

그녀가 평소 좋아하는 책이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남자가 태연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제야 유정은 질문을 꺼낼 수 있었다.

“왜 안 가고 있어요?”

남자가 보던 책을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더니 여상히 말했다.

“열흘 정도 있을까 하는데요.”

“네?”

“아무래도 아직 움직이긴 무리일 거 같아서.”

자기 집인 것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남자는 허락을 구했다.

“불편하면 지금이라도 갈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힘에 부친다는 듯, 남자가 몸을 구부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색이 된 유정이 신발을 벗고 얼른 뛰어 올라왔다.

“괜찮으세요?”

회복도 다 안 된 사람을 내쫓으려 한 모양새가 됐다. 그런 건 아닌데.

“함부로 움직였다가 상처 덧나면 큰일이에요. 물론 병원에 가서 의사한테 보이면 더 좋겠지마는, 아직 거동이 불편하시고.”

남자가 고통을 없애려는 듯 머리를 털었다. 그러고는 눈을 맞춰 왔다.

“근데 늦었네요.”

“네? 아, 네. 오늘은 창문 청소하는 날이라서요.”

유정은 물에 오래 닿아 쪼글쪼글해진 손가락을 만지작댔다.

이름이라도 알고 헤어지고 싶었는데. 조금은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뭔데요?”

“이름이…… 뭐예요?”

남자가 쥐 죽은 듯 침묵했다.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이름 같은 걸 알려 주고 싶을 리가 있나.

뒤늦게 딸려 오는 생각에 유정이 질문을 물리기 전 남자가 대답했다.

“주태경.”

남자는 순식간에 표정을 고쳤지만, 유정은 똑똑히 봤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었다.

“저는 서유정이에요.”

별로 궁금해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름 석 자를 말할 때 신중하게 또박또박 발음했다.

“그런데, 병원도 가지 않고 계속 여기 계신다고요?”

“네.”

남자는 마치 잊지 말라는 듯이 말끝에 힘을 줬다.

“날 주워 왔잖아요.”

“…….”

“유정 씨가 주웠어요.”

유정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말하며 웃는데,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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