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발을 쫑긋 세워, 고용주가 아끼는 커튼을 걷어 내리던 유정은 문득 섬뜩한 기운에 주변을 둘러봤다.
아비규환이었던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저승 문턱까지 갔던 유정은 몸살로 생고생을 해야만 했다. 발열과 오한 증상, 그리고 악몽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뜨기 일쑤였다.
사흘째 되는 날, 결혼식 자체가 누군가를 해하기 위한 테러범들의 작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게 진실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사망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고, 부상자는 전부 테러범들이라는 말이 전해졌다.
일자리를 주선했던 지아는 연락도 닿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집과 반대 방향인 지아의 집에 매번 들렀지만, 집 안에선 인기척이 없었다.
완전히 증발했다. 사람 하나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는데도 기사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이었다. 경찰의 수사를 기대해 보아도 무슨 영문인지 제자리걸음이었다.
그저 외국인 소시민에 불과한 그녀는 평소처럼 일상을 소화했다. 시시할 정도로 무료한 나날이 반복되고 있었다. 분명 그랬다.
하지만 그때의 사건은 여전히 유정을 휘어잡고 놔주질 않았다.
빨랫감이 휘날리는 정원에 유정이 멀거니 서서, 마른침을 삼켰다.
붉은 벨벳 커튼을 걷어 올려 흔들림 없는 시선을 부딪쳐 오던 남자의 얼굴이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소름이 돋아난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손바닥에 피가 묻어 나온 것 같았다.
다친 사람으로 위장시켜 주던 남자.
저녁노을을 받아 붉게 빛나는 유정의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고개를 젖히자, 그새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
유정의 미간이 구겨졌다. 습하고 변덕스러운 날씨에 늦장 부리긴 글렀다.
남은 빨래까지 서둘러 걷어 낸 유정이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뒤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솨아아-.
쏟아지는 빗줄기를 잠깐 응시하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남의 집에서 일하다 보니 눈치가 제법 는 유정이 고개를 들자, 고용주이자 사모님인 미희가 눈앞에서 숄을 여몄다.
“저기, 유정 씨. 이번 월급 며칠만 미뤄도 될까?”
부유하기로 소문난 한국인 가정의 미희는 고액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가사 도우미는 꼭 한국인으로 원했다.
인력 소개소를 통해 인계를 받아 미희와 인연을 맺은 유정은 오히려 한국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보다 수입은 더 좋은 편이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그래서 불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어도, 구타까지 하는 고용주도 널리고 널린 생태계임을 고려할 때 이 정도면 괜찮은 수준이다.
며칠 미루긴 해도 월급은 꼬박꼬박 주니까.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아, 집에 갈 때 바비큐 좀 싸 갈래요? 뒷마당에서 굽는 중인데.”
“아니요. 괜찮아요.”
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실내 계단 층마다 있는 화분에 물 주는 것을 부탁했다.
마침 시간이 비었던 유정은 물뿌리개를 들고 정성스럽게 물을 주었다.
이런 소일거리를 시키면 성가셔 죽겠다고 말하던 동료도 있는데, 그녀는 오히려 도맡아 할 정도로 좋아하는 편이었다.
식물의 생존을 도왔다는 게 썩 마음에 들었다. 무의미한 일상 중 그나마 유의미한 일이랄까.
모든 화분에 물을 준 후 유정은 개운하게 몸을 세웠다. 어느덧 퇴근 시간이었다.
하늘에 구멍 뚫린 듯 오던 비는 점차 약해지기 시작하더니, 퇴근길에는 안개처럼 부슬부슬 내렸다.
우산 없이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던 유정은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골목 앞에서 발을 멈춰 세웠다.
짙은 가로등 밑에 검은 인영이 있었다.
빈부 격차가 심한 동네는 밤이면 다친 사람들이 발견되고는 했다. 그 사실을 아는 유정이 주춤거렸다. 신발 밑창에 물이 찰박찰박 밟혔다.
가까이 다가서자, 불규칙하게 호흡하고 있는 것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자세히 보였다.
그때, 옆으로 헤드라이트를 켠 오토바이가 지나가며 검은 인영의 정체가 드러났다.
기다란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남자였다. 새까만 전투복을 가죽으로 된 하네스로 고정하고는 있었지만, 어디서 굴렀는지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쇳덩어리도 거뜬히 버틸 것 같은 묵직한 워커 역시 지저분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고통에 일그러졌지만 조각해 놓은 듯 수려한 얼굴.
“…….”
심장이 멎을 뻔했다.
결혼식, 그 남자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에코백을 움켜쥔 유정이 뭐에 홀린 듯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는 의식이 없었다.
검은 옷 상의 아래로 검붉은 피까지 울컥울컥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이 긴 다리를 감싼 젖은 바지는 피부에 빈틈없이 달라붙어 두툼한 허벅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비좁은 골목에 피가 빗물과 섞여 흐르고 있었다.
빨갛게 고인 웅덩이를 밟고 다가선 유정이 남자의 코밑에 손을 가져갔다.
“…그냥 다친 건가…….”
다행히 숨은 붙어 있는데.
안 그래도 하얀데, 더 하얗게 질린 얼굴이 흠뻑 젖어 있었다.
부슬비를 맞은 속눈썹엔 안개처럼 부연 물이 고여 있었다. 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속눈썹이 놀랍도록 길었다.
그린 듯 단정하고 도톰한 입술은 살짝 벌어진 채 애처로울 정도로 약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지만, 새파랗게 질린 상태에서도 부드럽고 촉촉해 보였다.
정말이지, 다시 봐도 현실감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때, 까만 머리카락과 속눈썹에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던 빗물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던 유정이 마른침을 삼키며 정신을 추슬렀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출혈이 있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정말로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지경에 이를 테니까.
우선 남자의 팔을 잡아 올려 어깨에 둘렀다. 무게감에 몇 번이고 휘청였지만, 이를 악물고 몸을 세웠다.
일 분이면 도착할 집을 십오 분이나 걸려서 도착했다.
좁은 방 안에 가까스로 남자를 눕혀 놓은 유정은 숨을 헉헉대며 찬물을 마셨다.
무릎이 땅에 닿을 정도로 형편없이 질질 끌고 오긴 했지만 어쨌거나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당연하게도 남자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경찰이나 구급대원을 부르는 게 올바른 대처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
워커, 총, 피.
도무지 선량한 민간인의 소지품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로 무장한 남자가 아니던가.
그래도 혼자서 도와주는 건 얼마 못 가 한계에 부딪힐 테니, 유정은 남자의 몸을 더듬어 소지품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군가와 상황을 공유하는 데 쓰였던 핸드폰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난감했다.
“제발 도와줄 만한 사람을 말해 줘요…….”
들리지도 않을 말을 간절하게 속삭이던 유정은 이내 다시 바지런하게 움직였다.
우선 구급 약상자와 가위, 수건을 가져왔다.
언뜻 봐도 어설프게 흉내 낸 전투복이 아니었다. 하네스며 허리춤에 두른 벨트에서 무두질한 고가의 가죽 냄새가 났다. 게다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는 한눈에 봐도 보통 브랜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판단한 유정은 조심스러운 말과는 달리 거침없이 시계를 빼고, 남자의 상의를 가위질했다.
싹둑 잘려 나간 옷은 터질 듯한 대흉근을 견디지 못하고 튕기듯이 양옆으로 벌어졌다.
복부의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주륵, 흘렀다.
세 들어 살던 주인집 아저씨가 왕진 의사였다. 말만 의사지, 실은 머리 희끗한 돌팔이였지만 제법 흉내는 내는 편이라 일대에서 가장 콜을 많이 받았었다.
월세를 제때 못 내서 어쩌다 한 번씩 왕진 가방을 들고 조수 노릇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게 있어 다행이었다.
남자의 상처 부위를 유심히 살피던 유정은 이내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다행히 뼈가 보일 정도로 상처가 깊지 않았다.
도움을 청할 곳도 마땅치 않았는데,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남자의 몸이 불에 달군 듯 뜨거웠다.
유정은 서둘러 상처를 소독하고, 지혈제를 뿌린 후 거즈를 단단히 붙였다.
아픔도 못 느끼는지 남자는 눈썹 한 번 꿈쩍이지 않았다.
남자의 고통이 꼭 제 몫인 양 유정이 앓는 소리를 하며 연신 그를 살폈다.
드넓은 상체의 상처를 겨우 처치해 뒀더니, 이번에는 찢어진 허벅지 부근에서 피가 비쳤다.
유정이 무릎걸음으로 내려갔다. 바지가 찢어진 곳이 상처 부위가 아니었다. 어딜 다쳤는지 확인하려면 바지를 벗겨야 했다.
아랫배의 가운데를 두고 양쪽으로 깊게 패인 근육을 내려다보던 유정의 손이 머뭇거렸다.
도저히 바지까진 벗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힐긋거리던 유정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바지 허리선에 손을 댔다.
벨트에 손이 닿은 순간, 남자가 고이 감았던 눈꺼풀을 확 치켜떴다.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매 안에서 형형한 안광을 쏘았다.
그 눈하고 마주친 것도 질겁할 일인데, 크고 딱딱한 손에 손목까지 휘어잡혔다.
본능적으로 뿌리치려 했지만, 힘도 쓸 수 없었다. 놀라울 정도의 악력이었다.
그 상태로 남자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잡힌 손목이 후들후들 떨렸다.
음영이 드리워진 남자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동시에 몸이 떠밀리며 등이 바닥에 맞닿았다.
아니, 바닥과 남자 사이에 몸이 끼였다.
배 위에 앉은 남자의 다른 손에 목도 틀어 잡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두려움에 눈물까지 고였다.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남자의 눈은 위화감이 들 정도로 검었다.
“너, 뭐야.”
남자의 긁힌 듯한 목소리는 무섭도록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