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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외전 17화 (158/159)

IF 외전 17화

“들어와라.”

들어온 이는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엉망이 된 체이서와 그를 부축하는 하인이었다.

“왜, 왜 이렇게…….”

“보기 좀 흉하지? 말을 좀 안 들어 혼을 좀 내주었단다.”

혼냈다는 귀여운 수준으로 설명할 상태가 아니었다. 에블린의 예상대로 고문이라도 당했는지 상태가 끔찍했다.

“어, 어째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하실 수 있는 있…….”

차마 끝까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고 있으니 더스틴이 체이서의 몸을 가볍게 발로 찼다.

“쿨럭.”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에 에블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잘 보거라, 에블린. 앞으로 네 앞길에 방해가 되는 존재들은 이리될 것이다.”

“…….”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에블린은 그제야 체이서에게서 시선을 떼어 더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란 소리다.”

그는 매서운 눈길로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에블린의 앞길을 막는 것이 그녀 본인이라도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일주일 뒤, 네 성인식을 진행할 거다. 그리고 곧바로 후계자로 발표할 거야. 루이사의 가신들 모두가 모이는 자리니 부족한 모습 없이 참석해야 한다.”

더스틴은 쓰러져 있는 체이서에게 힐끗 시선을 주고는 혀를 찼다.

“치료가 좀 필요해 보이니 네가 오라비를 좀 도와주거라. 그래도 오라비인데 네 성인식에는 참석해야지.”

전문의에게 시킬 수 있음에도 직접 치료하라 명령하는 의도가 훤히 보였다.

제 경고를 잊지 말라고, 허튼짓하면 같은 신세가 될 것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더스틴은 의심을 푼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변수도 일으키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는 매정히 방을 나섰고, 그제야 에블린과 체이서 단둘만 방에 남게 되었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에블린은 체이서의 상태를 살폈다. 원래도 체온이 높은 그의 이마는 뜨겁게 들끓고 있었고, 숨소리 또한 거칠었다.

“아, 아아.”

조금 전 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온전히 받아들일 틈도 없었다.

몸 곳곳에 굳어 있는 핏자국들을 보던 에블린은 필사적으로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내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으면 알려 줬어야지. 왜, 왜 미련하게 이렇게……!”

그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젖은 수건으로 말라붙은 피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

두 사람 주위로 훌쩍이는 울음과 거친 숨소리만이 오갔다. 

“……다 나 때문이야.”

“……뭐가? 네가 도망치는 걸 그냥 둔 건 나야. 말을 안 한 것도 내 의지고.”

울면서 그러고 있자니 체이서가 하얗게 일어난 손을 들어 올려 천천히 그녀의 눈가를 매만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다정했다.

“울지 마.”

“……흑.”

갈라진 목소리에 에블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상태가 되었음에도, 가해자나 다름없는 자신을 위로해 주는 손길에 더욱 거센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이 모든 상황이 고작 더스틴의 욕망 때문에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것도, 자신이 정말로 끔찍이 싫어하는 이의 딸이라는 점도 모두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그녀가 처한 현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내가 더스틴의 친딸이래.”

한숨과 함께 뱉어진 말에 거칠게 내쉬던 체이서의 숨결 소리 또한 사라졌다. 

“그래서 나를 그렇게 편애했던 거래. 이 가문을 자기 피를 이어받은 내가 물려받고, 다다음 대 공작도 내 아이로 만들고 싶었대.”

말하면 말할수록 인정하고 싶지 않은 비참함이 밀려왔다. 

더스틴이 싫었지만, 그가 자기 능력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부족했던 자존감을 채워 살았었다.

도움이 된다는 능력이라 언제나 스스로를 위로했건만 그는 고작 그녀가 자신의 혈육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감쌌던 것이다.

눈에 차지도 않는 이를 데리고서 루이사의 가주로 앉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을까, 죄 없는 다른 이들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나 때문에 너희가 그런 삶을 살아야 했어.”

오로지 루이사를 자신의 가문으로 만들기 위해 아무런 잘못도 짓지 않은 제 형제들이 이용당했다. 

원치 않았음에도 에블린 또한 가해자나 다름이 없었다. 차라리 원래의 내용대로 루이사의 시험에서 자신이 죽었어야 함이 옳았다.

“미안해……. 내가 그때 죽었어야 했어. 그랬더라면 너희가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거야.”

에블린은 체이서의 상처를 닦아 주던 손을 떼었다. 그리고서는 눈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소매로 거칠게 훔쳤다.

“확실히 충격이기는 하네.”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에블린이 눈도 못 마주친 채 고개를 푹 숙이니 다시금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던 손이 다가왔다. 

손은 에블린의 턱 끝을 쥐었고 그대로 끌어 올렸다. 그와 함께 앉아 있는 체이서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우리 모두 더스틴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네. 심지어 너조차도.”

한쪽으로 말려 올라간 입꼬리는 지금 펼쳐진 이 상황을 비웃고 있었다.

“미안…….”

체이서와 다른 이들을 향한 미안한 감정이 자꾸만 눈물샘을 자극했다.

“결국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건가.”

뒤따르는 허탈한 체이서의 목소리에 한숨이 서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눈에는 어쩌면 곧 절망이 어릴지도 모른다.

‘싫어. 나는 그런 걸 보고 싶어서 이렇게 버텼던 게 아니란 말이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것과 동시에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더스틴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싫겠지만 너를 치료할 수 있게는 해 줘. 너 계속 그러다간 정말 큰일 날지도 몰라.”

에블린의 간절한 부탁에 체이서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지난번보다 더 날뛰는 두 개의 거대한 능력이 느껴진다. 

둘 중 더 커다란 기운이 작은 기운을 그대로 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에블린이 필사적으로 제 능력을 쏟아부어 보았지만 거대한 기운은 에블린의 힘만으로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왜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걸까.’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그를 억누를 수 있는 능력을 갖췄더라면 이들의 목에 걸린 저주를 풀어 줄 수 있었을 텐데!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더스틴의 멱살을 잡고서 그녀가 맴도는 진창까지 끌어내리고 싶었다.

“……나는 분노를 삼키며 내 힘을 키워 왔어.”

그때, 에블린의 살의를 읽기라도 한 듯 체이서가 뜬금없는 말을 꺼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더스틴을 뛰어넘을 수 없었지.”

“……더스틴이 건 저주 때문에 말이지.”

에블린의 어두운 목소리에 체이서는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바로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

“너는 어떤 걸 양분 삼아 강해졌어?”

“나는…….”

행복해지고 싶은 미래를 생각하며 힘을 키웠다. 두려움을 이기고 희망찬 미래를 품에 안을 그 날을 떠올리며 이 끔찍한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에블린이 처한 상황은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엉망진창의 인생이었으니까. 

존재하지 않을 희망을 갈구한 대가는 성장의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분노를 제외한 모든 것들.”

낮게 터져 나온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은 웃음이 뒤따랐다.

“이제 그만 됐어. 너도 힘을 보충해야지.”

체이서는 숨을 편히 고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손을 놓으려고 했다.

이 분노는 더스틴을 향한 것이다. 그를 따르는 루이사의 가신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인생을 엉망으로 끌어들이게 한 모든 이들에게 쏟아부어야 할 격한 감정이었다.

에블린의 머릿속으로 지금껏 단 한 번도 품어 본 적 없는 끔찍한 생각이 번져 나갔다. 그와 반대되게 심장은 잔뜩 어린 기대감으로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너처럼 분노를 양분 삼고 싶어.”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떨어지는 체이서의 손을 붙들었다. 성장을 방해하는 거대한 벽이 무너진 것 같이 손끝이 아찔할 정도의 강렬한 쾌감이 느껴졌다.

체이서를 억죄고 있던 거대한 힘이 에블린의 힘과 맞닿자 거칠게 반항했다.

“우리가 저자의 손에서 못 벗어날 운명이라면…….”

맞닿은 손 너머로 들어오는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했던 기운에 체이서의 눈이 더더욱 커졌다. 

“그 운명을 바꿔 버리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운은 장렬히 패배하여 서서히 에블린이 들여보낸 힘에 잠식당하며 사라졌다.

체이서를 얽매었던 저주라는 족쇄가 깨졌다. 

“체이서, 아무래도 나는 가주가 되어야겠어.”

에블린은 환희에 찬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를 꽉 끌어안고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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