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 16화
“도망이야 가실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면 체이서 도련님께서는 매우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고요.”
“닥치거라!”
데몬스가 답지 않게 버럭 소리쳤다. 그럼에도 트렐로니 백작은 전혀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누님, 제발!”
굳은 얼굴의 데몬스는 필사적으로 에블린을 설득하고 있었고, 건너편의 트렐로니 백작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그녀가 어떤 답을 선택할지 짐작하듯 여유로웠다.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지 않았지만 현 상황이 이해가 갔다.
‘나 때문에 고문을 당했구나. 그래서 아픈 거야.’
아무래도 체이서가 에블린의 도주를 도운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도왔다기보다는 방관에 가까웠지만.
“체이서 도련님께서는 생각보다 더 입이 무거우시더군요. 덕분에 저희가 꽤나 고생했습니다.”
체이서의 눈만 가린다면 다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안일한 선택이었나 보다.
“……그 말은 아직은 안 죽었다는 거고?”
“누님!”
에블린의 물음에 데몬스가 소리쳤다. 그에 트렐로니 백작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럼요. 조금이라도 빨리 간다면 금방 회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공작님께서도 돈독한 우애를 그리 탓하실 생각은 없으실 거고요.”
“그래, 그럼 가자꾸나.”
계속해서 데몬스의 등 뒤에 숨어 있던 그녀가 나서자 다급한 손이 그녀를 붙들었다.
“안 됩니다. 이대로 가면 누님은 다시는 자유를 찾을 수 없을 겁니다.”
“…….”
“매번, 매번 힘들어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상황만 무사히 지나가면 조용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도망을 가야 해요.”
간절함이 잔뜩 어린 데몬스의 눈동자 안에 평온한 에블린의 얼굴이 비쳤다.
“하지만 체이서가 죽을지도 모른다잖아.”
고민할 거리도 아니라는 듯 담담한 모습에 데몬스의 두 눈이 잘게 떨렸다. 에블린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떼었다.
“나 혼자서 자유로워지자고 체이서를 죽게 할 수는 없잖니.”
이 정도 평화를 즐겼으면 되었다.
‘단순한 일탈 정도로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에블린은 스스로도 퍽 말도 안 되는 생각했음을 짐작한 듯 피식 웃었다.
‘차라리 이상함을 느끼자마자 도망갈 것을.’
그랬더라면 이리 양심에 찔려 다시 호랑이 굴로 돌아가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데몬스를 지나쳐 트렐로니 백작에게 다가갔다.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에 절로 불쾌해졌다.
‘이제 더스틴이 죽기 전까지 이런 자유는 즐길 수도 없겠지.’
다만 끌려가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확실히 나를 죽이려는 것 같지는 않아.’
가르티아가 있는데 사이가 안 좋은 트렐로니 백작까지 시켜 자신을 찾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올라가면 알 수 있겠지.’
에블린은 분한 얼굴로 서 있는 데몬스를 뒤로한 채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데몬스, 수도에서 보자꾸나.”
짧은 인사와 함께 마차의 문은 그렇게 닫히고 말았다.
***
짜악-!
뺨을 내리치는 거센 손에 에블린이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힘없이 주저앉는 모습에 더스틴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내 너를 가장 믿었건만 이렇게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
오자마자 제 방에 갇힌 에블린은 자신을 찾아온 더스틴에게 처음으로 뺨을 맞았다.
‘……처음이네.’
욱신거리는 뺨을 매만지던 그녀는 나올 뻔한 실소를 참아 냈다.
더스틴은 에블린을 귀하게 키웠다. 훈련을 고되게 시키면 시켰지 단 한 번도 손을 올린 적이 없었던 이다.
그런 이가 이렇게 손찌검까지 하는 것을 보니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다.
씩씩거리던 더스틴은 쓰러진 에블린을 두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고 거만히 앉아 물었다.
“말해 보거라. 내가 너에게 부족하게 대해 준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래, 없다. 그런데 뭐가 불만이어서 아무런 말도 없이 가출하였느냐?”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도 그를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루이사가 싫다고, 증오스럽다고, 무섭고 두려운 곳이라고 말하면 그는 믿지 않을 테니.
‘결국 또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네.’
에블린이 할 수 있는 건 그를 이해시킬 만한 연기였다.
그녀는 가녀린 딸의 역할을 계속해서 이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뺨을 감싼 채 가련하게 눈을 내리깔고 눈물을 떨구었다.
“……정말 체이서와 결탁하고 도망친 것이냐?”
마치 지켜보기라도 한 듯 정곡을 찌르는 말에 에블린은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제가 왜 체이서 오라버니와 결탁을 맺습니까? 제가 아버지께 그리 믿음을 못 드렸나요?”
짜증이 어린 목소리에 더스틴은 턱을 괴고서는 피식 웃었다.
“요새 체이서가 참 이상하더구나. 수상해 보일 정도로 네 행적을 감싸니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지. 너도 체이서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단번에 저택으로 돌아오고 말이야.”
진실을 캐내려는 눈빛이 그녀에게 닿았다. 에블린은 두려움을 삼키고서 불쾌함을 마음껏 표현했다.
“체이서 오라버니는 미래에 제 검이 될 존재예요.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하면 나중에 제가 활용할 패가 줄어드는 건데 어찌 그걸 가만히 두고 보나요!”
“뭐?”
“제가 정말 바보인 줄 아십니까? 아버지께서 저를 가주 자리에 앉히고 싶다는 것 진작 눈치챘습니다! 저는 그저, 그저…….”
억울함 한 스푼, 서글픔 한 스푼 넣어 마침 그럴싸한 변명을 소리쳤다.
“제게 향하던 모든 것들이 가르티아에게 향하니 아버지께서 저를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닌……, 제가 아닌 가르티아에게 가주의 자리를 물려줄 것 같아 속상해서 그랬습니다!”
“허어?”
기막힌 소리를 들었다는 듯 더스틴이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고작 속상해서 가출했다고?”
언뜻 한심하다는 시선이 닿은 것도 같다. 조금은 유해진 분위기에 에블린은 제 선택이 옳았음에 계속해서 이 이유를 밀고 갔다.
“고작이 아닙니다! 제가, 제가 얼마나 슬펐는지 아버지께서는 몰라요!”
“허허허, 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살 줄이야. 철이 다 든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구나. 그리고 왜 네가 가주가 되느냐? 장자인 체이서가 저리 버티고 있는데.”
졸지에 철없는 딸이 되었지만, 에블린은 싫은 티 내지 않고 훌쩍이며 제 의견을 말했다.
“체이서 오라버니는 그저 눈속임에 불과해요. 왜냐면 제가 다른 형제들보다 가장 뛰어난 존재니까요. 체이서 오라버니는 그걸 인정하지 못했으니 가주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거겠지만……. 오라버니의 역할은 제 옆자리에서 제 명령에 따르는 거예요.”
억울한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더스틴은 피식 웃고는 물었다.
“그래. 역시 너는 체이서의 활용처를 잘 알고 있었구나.”
가주는커녕 이용할 검이라고 하니 더스틴은 만족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히 의심의 눈초리는 거두어진 것 같았다.
“그걸 그리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가출했을까. 내가 가르티아 같은 멍청한 이에게 이 자리를 넘길 리 없지 않으냐. 애초에 그런 가짜 따위.”
“네? 가짜라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더스틴은 더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갑자기 종적을 감췄더구나. 뒷조사해 보니 유명한 사기꾼이라고 하고, 보니 보석을 몇 개 훔쳐 달아난 모양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에블린이 이해 못 하는 얼굴이 되자 더스틴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만약 그 아이가 진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절대로 가주 자리에 앉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걸 두고만 보지 않을 테니까.”
“……왜요?”
“그래, 곧 네가 성인이니 알려 줄 때도 되었지.”
자꾸만 맥락 없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에블린은 멍청하게 눈만 깜빡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거만하게 앉아 있던 그가 일어나서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친절히 그녀를 일으켜 주고는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잘 듣거라, 에블린. 너는 내 친딸이란다.”
“……네?”
“젊었을 적 너를 몰래 낳았고, 가문의 눈을 피해 밖으로 빼돌렸어. 바이아르도에 너를 맞기고, 적당한 때에 루이사의 시험에 치를 수 있도록 조치도 했지.”
쿵, 하고 무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추락하는 것 같았다.
“내 피를 이어받은 딸이라면 당연히 시험에 통과할 줄 알았고, 아니나 다를까 합격한 이들 중 가장 훌륭하더구나.”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귓가에 박힌다. 에블린의 두 눈이 거칠게 흔들림에 더스틴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 내가 너를 왜 버리겠느냐. 일부러 체이서와 블러드윈 그리고 데몬스 그 아이들 모두 너를 위해 곁에 두었는데.”
“……네?”
“맷집도 좋은지 그 녀석들은 내 훈련도 잘 버텼지. 도망치지 못할 족쇄도 채웠으니 네 말대로 네가 가주가 된 이후로 잘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특하다는 듯 에블린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고, 마치 이 타이밍을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