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 14화
에블린은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살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지? 내가 언제 잠이 들었지?’
푸릇한 나뭇잎이 햇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여름 바람이 창문 밖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분명 지금은 겨울임에도.
혼란스러워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녀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언니!”
‘언니?’
들려서는 안 될 말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가르티아가 볼을 말갛게 물들이며 흥분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다시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시 보니 지금 있는 곳은 자신이 힘겹게 찾아온 은신처가 아닌 익숙한 루이사 저택이었다.
“여기서 뭐 해요! 다들 기다리고 있는걸요!”
“무슨 소리…….”
에블린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르티아가 덥석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어찌나 힘이 센지 내치기도 전에 그대로 이끌려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잠시만…….”
이해가 안 가는 이 상황에 관해 묻고자 입을 뗐지만 연신 싱글싱글 웃고 있는 가르티아는 에블린을 붙잡은 채 발걸음을 뗐다.
방을 나서자 익숙한 복도가 보인다. 아니, 익숙한데 분위기가 무언가 달랐다.
“어머, 아가씨들. 그리 뛰시면 위험해요.”
“어쩜, 우리 아가씨들은 사이가 좋기도 하지.”
지나가며 마주친 고용인들이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검고 회색빛이었던 삭막한 복도는 황금색과 붉은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고, 곳곳에 보지 못했던 예술작품들이 놓여 있었다.
확신하건대 평소와는 달랐다. 언제나 싸늘한 긴장감만 흐르던 저택은 마치 사람의 온기를 품은 것처럼 따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언젠가 에블린이 보고 싶었던 그런 광경이었다.
훈훈한 시선들과 따사로운 미소가 닿는다. 두려움이 아닌 존경심과 애정이 담긴 눈길이 향한다.
“우리 왔어요, 오라버니들! 데몬스!”
복도 끝, 식당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며 외치는 가르티아의 모습에도 안에 있는 이들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반겨 주었다.
“너희는 둘이 다니면 언제나 소란스럽구나.”
웃으며 감탄하는 블러드윈.
“가르티아, 또 누님을 억지로 끌고 온 건 아니지?”
걱정하는 데몬스.
“그러게. 안색이 안 좋은데.”
조용히 서류를 보다 데몬스의 말에 반응하는 체이서까지.
“하지만 오래간만에 같이 하는 점심 식사잖아요! 언니도 저처럼 두근거렸다고요! 헉, 언니 표정이 왜 그래요?”
억울하다며 외치던 가르티아가 뒤를 돌아보더니 깜짝 놀란다.
“그러게. 꼭 못 볼 걸 봤다는 얼굴인걸. 사교계의 꽃이 그런 얼굴 해도 되는 건가?”
가르티아의 호들갑에 체이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에 에블린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데 하필이면 문턱에 걸리고 말았다.
무어라 외치기도 전에 빠르게 다가온 체이서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위험하잖아.”
“…….”
“……정말 이상하네. 어디 아픈 건가?”
커다란 손이 에블린의 이마를 짚었다.
“형님 손은 원체 따뜻해서 잘 못 느낄걸. 그보다 에블린이 어디 아플 애야?”
블러드윈이 키득거리며 웃음기 섞인 핀잔을 해 주었지만, 체이서의 얼굴은 진지했다.
“미열이 있는 것 같은데.”
“뭐야, 진짜 아파?”
심각한 체이서의 목소리에 블러드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몬스와 가르티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 웃음기 서린 식당의 분위기가 변했다.
“아무래도 무리했나 보네.”
“……내가?”
체이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답은 데몬스 쪽에서 돌아왔다.
“저택 바꾼다고 고생하셨잖습니까.”
“형님이 공작이 되었으니 그에 어울리게 공작저 분위기를 싹 바꿔야 한다고 난리 친 장본인이 왜 모른 척하지? 아, 형님을 위해서는 이 정도는 무리도 아니라는 건가?”
짓궂은 말이 뒤따른다. 에블린은 당황스러워 그저 눈만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체이서가 공작이 되었다고?’
그저 멍청하게 똑같은 질문만 반복하는 것 보다는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나 때문에 그리할 필요 없다고 했건만.”
짧은 탄식이 와닿는다. 웃음기가 서린 것이 에블린의 행동이 기쁘긴 했던 것 같다.
“공작위를 무사히 내게 준 것만 해도 충분하다 했잖아. 더 이상 내게, 우리에게 무언가 해 주려고 하지 않아도 돼.”
언젠가 머지않은 미래에 듣고 싶었던 말이 체이서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이 꿈인 것 같았다.
에블린이 어깨를 움찔 떨자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체이서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몸살이 온 걸지도 모르니 역시 쉬는 게 좋겠어.”
“맞아요, 아쉽지만 식사는 다음번에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병간호라도 해 줄까?”
“블러드윈 형님……. 에블린 누님이 복장 터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립니다.”
왁자지껄한 형제들의 모습에 에블린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우나?”
가까이서 당황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 체이서가 이런 표정이라니.’
눈을 크게 뜨고는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이 우스웠다. 와중에 걱정된다고 조심스럽게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은 어색해도 따스했다.
“많이 아팠나 보네.”
다정한 위로에 에블린은 조용히 훌쩍였다.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체이서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이내 커지는 울음소리에 다른 이들까지 에블린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아무래도 많이 아픈 것 같다며 의사를 찾는 목소리와 장난쳐서 미안하다는 사과, 어서 이동하자는 재촉 가득한 말들이 동시에 들려왔다.
“다음부터는 아프면 숨기지 마.”
그리 말한 체이서는 그대로 에블린을 안아 들었다. 어린 시절, 루이사 시험장에서 빠져나왔을 때 이후로 오래간만에 그의 품에 안겼다.
조그만 소년이 이렇게 커졌다는 것이 신기했고, 그토록 바라던 미래가 눈앞에 펼쳐졌다는 것이 기뻤다.
당황한 이들이 에블린의 눈물을 멈추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멈출 수 있을 리가.
‘꿈이라면 제발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
모두가 다정하고, 적이란 없는 행복한 세계.
서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세상이야말로 그토록 꿈꿨던 곳이기에.
에블린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었다. 그러자 주변이 물에 잠긴 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사물들이 변한다. 붉은색, 황금빛, 따사로운 모든 것들이 하나씩 지워져 간다.
세상이 삭막한 회색빛으로 물들어 변해 갔다.
고개를 들자 미소를 짓고 있던 체이서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 있었다. 냉정한 눈길이 와닿는다. 주위에 있었던 다른 형제들도 모두 사라졌다.
“이런 걸 원했나? 감히?”
매정한 목소리가 비수에 내리꽂혔다.
에블린은 다시 눈을 깜빡였다. 이제는 그녀를 안고 있던 체이서마저 지워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때 보인 것은 어느새 익숙해진 은신처 침실의 천장이었다.
얼굴이 흠뻑 젖은 것이 오늘도 꿈을 꾸며 엉엉 울어 버린 모양이다.
“……멍청이.”
이루어질 수 없는 미래를 꿈꾸며 허상에 잡아 먹힌 제 모습이 참으로 한심했다.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희망을 놓지 않는 미련함이 싫었다.
루이사 저택에서 무사히 도망친 지 두 달째.
에블린은 여전히 이루지 못할 희망을 그리고 있었다.
***
“아가씨, 오늘 좋은 사과 들어왔어. 챙겨 줄 테니 가서 조금 맛 좀 봐.”
“감사합니다.”
에블린은 장을 보러 나왔다가 챙겨 주는 말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화사한 금발은 푸석한 갈색 머리로 바꾸고, 청명한 녹색 또한 흔한 고동색으로 바꿨다. 일부러 어깨와 허리를 굽혀 단정하지 못한 자세로 다녀도 그간 쌓은 분위기나 외모 탓인지 사람들은 그녀에게 친절했다.
그나마 전생의 기억이 있는 덕에 귀한 공녀로 살아왔음에도 적당히 사람 사는 법을 익혀 살고 있었다.
“요새 마을 분위기가 참 흉흉해.”
사과를 챙겨 주던 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눈으로 대장간 쪽을 가리켰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로브를 뒤집어쓴 덩치 큰 두 사람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저 사람들은…….’
“누구를 찾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젊은 여자인 것 같더라고. 딱 보니 도망친 사람 찾는 것 같던데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
“네, 조심할게요.”
에블린은 그녀가 건네주는 종이봉투를 받아 들고서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는 일부러 자연스럽게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슬쩍 비친 로브 사이의 얼굴이 익숙했다. 다행히 그들은 에블린을 보고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그녀에게 익숙한 것을 보면 분명 더스틴의 사람이거나 루이사와 관련이 있는 자임이 분명했다.
‘슬슬 은신처를 옮겨야 하나.’
예상치 못하고 한곳에 오래 머물기는 하였다.
‘적응하나 싶었는데. 아쉽네.’
에블린은 적당히 장을 본 뒤 모두의 시선을 피해 자연스럽게 숲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이때의 그녀는 몰랐다.
누군가가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