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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외전 13화 (154/159)

IF 외전 13화

지난밤, 에블린이 도망칠 계획을 세운 소식을 체이서에게 전하자 그는 도망치는 척 함께 따르는 것을 계약의 마지막 임무라 하였다.

예상보다 앞당겨졌지만 넉넉한 보수도 받았고, 모두의 눈을 피해서 도망만 친다면 희망찬 내일을 살 수 있으리라.

에블린이 집중한 틈을 타 가르티아는 슬쩍 발걸음을 뒤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어지는 사이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아니, 숨기려고 했다.

“응?”

누군가 도망치려는 그녀를 붙잡았고, 곧바로 익숙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블러드윈 오라버…….”

가르티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번쩍 빛난 블러드윈의 눈에 강력한 힘이 어렸다.

“이곳에서 있던 일은 모두 잊어. 강도 높은 일을 하느라 큰돈을 번 것뿐이야.”

간단한 기억의 조작에 가르티아의 눈이 흐릿해졌다. 이대로 공작저를 빠져나가라는 명령이 더해지자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서로 반대로 향한 루이사의 두 자매를 본 블러드윈 또한 어둠 속에 몸을 묻고 인기척을 감췄다.

*** 

“……가르티아?”

이런, 탈출에 미쳐 일행이 잘 뒤따라오고 있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에블린은 들려오지 않는 발소리에 자리에서 멈춰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들어가면 아티팩트의 구역이라 공작저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데 가르티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인다면 어쩔 수 없지.”

애석하게도 가르티아까지 챙겨 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녀는 조금의 아쉬움도 없는 얼굴로 아티팩트로 가려진 영역에 들어갔다. 한 30분 안 되게 움직였을까.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도 그때 보았던 사내가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체이서가 기절한 상태라면 오늘은 굉장히 멀쩡해 보인다는 것 정도?

“……하.”

가르티아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급하기는 했나 보다. 그런 허접한 거짓말에 속다니.’

하지만 이제 와서 이 계획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체이서 또한 그녀가 루이사를 떠나는 것을 기쁘게 반겨 줄 것이다.

‘싸움에서 진 개가 꼬리 말고 도망치는 꼴이나 다름없으니 말이야.’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덕인지 마음이 홀가분하다는 것 정도였다.

“저택에 있어서는 안 되지 않아?”

“가르티아에게 소식 듣고 곧바로 이리로 넘어왔어. 모두의 눈을 피해 오느라 나 또한 막 도착한 참이지.”

“역시 가르티아와 너는 한패였구나?”

“정확히 말하자면 고용인과 고용주 사이지.”

“그건 사실이야? 재미있네.”

그때와 마찬가지로 에블린은 천천히 체이서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올 줄은 몰랐는지 조금 경직되어 있는 모습에 어째서인지 설핏 웃음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에블린의 웃음소리가 듣기 싫은지 체이서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질 뿐이었다.

그는 냉철하게 물었다.

“그래도 제 의지로 도망치는 걸 보면 가주 자리는 포기한 모양이지?”

에블린은 버릇처럼 무어라 톡 쏘아붙이려다가 이곳에 둘만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정말로 오로지 둘밖에 없는 곳, 가르티아 또한 더 들어올 일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둥그러졌다.

“……그래. 보면 알잖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손에 든 커다란 짐가방을 보여 주었다.

“붙잡을 생각은 아니지?”

“붙잡는다면 붙잡혀는 주고?”

“좋을 대로 생각해.”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 것에 체이서의 얼굴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 보기 싫은가.’

민망할 정도로 딱딱하게 정색 한 체이서의 앞에서도 에블린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건 고통의 순간에서 도망치고 편해지려는 회피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에블린은 다시 제 역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냥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살고 싶었다.

“이렇게 된 이상 네가 정말 네가 가주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래, 너는 언제나 가주가 되기 싫다는 감정을 참아 왔으니까.”

의외의 소리에 에블린의 눈이 홉뜨였다.

“알고 있었구나?”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 리가.”

“그래도 한때는 정적이어서 그랬다는 건가?”

에블린은 설핏 웃으며 체이서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녀는 모른 척 물었다.

“그럼 앞으로 내가 무얼 할지도 말해 봐.”

“……조용히 살겠지. 아무도 모르게 평화로움을 즐길 거야.”

“정말 나에 대해 많이 아는구나.”

체이서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에블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너도 맞혀 봐. 가주가 된 내가 무얼 할 것 같은지.”

“……으음.”

에블린은 눈을 감고 옛날을 떠올렸다. 처음 루이사 저택에 오기 전 서로 사이좋게 떠들던 때를.

“……잘 모르겠어. 가주가 되면 하고 싶었던 걸 하지 않을까?”

하필이면 가주가 되고 싶다고 한 뒤로 이유는 듣지 못했기에 정확한 답은 해 줄 수 없었다.

“……정말 인사도 안 하고 갈 생각이었나?”

원하던 답이 아니었는지 체이서는 말을 돌렸다.

“왜? 서운해?”

여유롭게 농담까지 던지는 제 모습이 우스워 키득거리는데 상상도 못 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안 서운할까?”

“패배자가 내쫓기는 건데 서운할 게 뭐 있어? 기뻐해야지.”

모든 것을 털어 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도 여유로웠다. 애초에 이렇게 살면 될 것을 너무 아등바등 살아왔던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그래, 오리가 어떻게 백조가 되겠어.’

맞지 않는 옷을 입다가는 결국 고꾸라지는 법이다.

“그러는 너는 패배자인데 기뻐 보이는군.”

그리고 그런 에블린의 변화를 예리하게 발견한 체이서의 말은 단번에 현실로 그녀를 끌고 왔다.

“응. 슬플 줄 알았는데 기쁘네.”

진심 어린 감정에 참지 못하고 활짝 웃고 말았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에 체이서는 제 어깨에 올려진 손을 잡더니 천천히 아래로 끌어 내렸다.

“……나는 오늘 여기서 너를 붙잡으려고 했어.”

붙잡은 손이 뜨거웠다. 그가 품고 있는 감정, 적의, 증오를 연상시키듯 아주 강렬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놔줄게.”

시간이 조금 걸려서 그렇지 언젠가는 에블린을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럼에도 인심 써 줬다는 듯 말하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기가 막힌 감정과 달리 웃음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래, 고마워.”

“……루이사의 이름을 버리고 나면 하고 싶은 게 있어?”

“아까 말했잖아. 조용히 살고 싶다고.”

“그것 외에는 없어?”

뜬금없는 질문에 에블린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더니 잠시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어렵지 않게 답을 꺼내었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아이도 낳고 오순도순 함께 살고 싶어.”

“……뭐?”

“왜 그런 반응이야? 내가 루이사 공작도 아니고, 귀족의 자리도 내려놓는다면 자유로운 사랑 정도는 해도 되잖아.”

믿기지 않는다는 충격이 가득한 체이서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건 오히려 에블린이었다.

둔기로 뒤통수라도 맞은 듯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해 못 하는 얼굴이다. 에블린은 절로 머쓱해졌다.

“나 곧 마차가 올 시간인데 가 봐도 되려나?”

그 말에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욱신거렸지만 지난번처럼 내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놓았다.

“그래.”

“그래, 그럼 잘 지내렴. 꼭 네가 가주가 되고.”

에블린은 손이 놓아지기 무섭게 그대로 등을 돌렸다. 미로에서 빠져나온 뒤 처음으로 마음 편히 대화한 것 같은데 너무 짧아 아쉬웠다.

그럼에도 발걸음을 지체해서는 안 될 것을 알기에 뒤돌아보지도 못한 채 움직여야 했다. 

빤히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하며 에블린은 조용히 루이사 저택을 떠났다.

*** 

‘생각보다 더 쉽네.’

에블린이 떠나 사라진 자리를 지켜보며 체이서는 그제야 슬며시 웃었다.

가주가 되기 위해 에블린은 체이서에게 크나큰 방해였다. 더스틴의 총애를 받는지라 존재 자체로 강한 라이벌이었고, 또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이였기 때문이다.

어린 날 미로에서 보여 주었던 용감한 모습은 더스틴에게 물들어 점점 변질하였지만 기질은 변치 않는지 다정한 심성은 여전하였다.

그렇기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어느 순간부터 체이서의 두 눈은 에블린의 뒷모습을 쫓았고, 그녀의 주변 인물과 관심사에 귀를 기울였으며, 몸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찾았다.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 정적이나 다름없는 이임에도 그녀의 눈치가 보였다.

거슬리는 존재라면 그냥 죽여 버리면 되건만 또 이상하게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체이서는 그녀를 제 눈앞에서 멀리 치워 버리기로 결심했다.

가르티아는 생각보다 훌륭한 연기를 해 주었고, 심약해진 에블린은 손쉽게 속아 넘어가 주었다.

적어도 속에서 일렁이는 수상하고도 알고 싶지 않은 감정이 사그라들기 전까지는 그녀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이렇게 미련 없이 떠나는 모습에 왜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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