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 12화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는지 가르티아가 재빨리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에블린은 놓칠 생각이 없기에 곧바로 캐물었다.
지금껏 무시하던 것이 무색하게 에블린은 그대로 가르티아의 어깨를 붙들었다.
“숨기고 있는 것 다 말하렴.”
“그러니까……. 아, 비밀인데.”
에블린과 눈이 마주친 가르티아는 한숨과 함께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저 사실 루이사 공작의 자식이 아니에요.”
“…….”
“역시 언니도 비밀을 알고 있으니 놀라지 않으시네요.”
작은 한숨과 함께 뒤따른 말에 에블린의 두 눈이 잘게 흔들렸다. 겉으로는 최대한 감추고 있지만 그녀는 최근 들어 가장 당황하는 중이었다.
‘설마 가르티아는 현실 인물이 아닌 건가? 누군가 게임 캐릭터인 이 애를 조정하는 것 아냐?’
현실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평정을 잡으려고 하지만 쉽지 않음에 인상을 찌푸리자니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실은 마을에서 치료사로 일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체이서 오라버니께 발견되었고, 협박받아서 이곳에 오게 되었어요.”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관련이 있지?”
“저는 억지로 온 것도 모자라서 제가 루이사의 핏줄이 아닌데 권력 싸움에 이용되고 있는 게 너무 싫어서…….”
“싫어서?”
“도망칠 수단을 찾아보는데 언니가 유독 눈에 띄더라고요.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라 눈에 밟혔나 봐요.”
“비슷한 생각이라면…….”
흔들리는 목소리에 가르티아는 뭐 별거냐며 밝게 웃었다.
“루이사를 싫어하고, 당장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거요. 언니의 뒤를 밟다 보면 함께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머뭇거리던 목소리에 곧 부끄러움이 서렸다.
“밤늦게 나서길래 도망치는구나 싶어서요…….”
“정리하자면 너는 억지로 끌려왔고, 이곳이 싫고, 나와 함께 이곳을 탈출하고 싶어 내 뒤를 밟았다는 게 되네?”
정답이라며 가르티아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없는 상황에 힘이 잔뜩 들어갔던 몸이 단번에 가라앉았다.
“언니, 저 여기 너무 무서워요. 제발 나갈 때 저도 데리고 나가 주시면 안 돼요?”
“……안 돼. 너는 여기에 있어야 해.”
“왜요? 도대체 왜? 저보다 언니가 이곳에 더 잘 어울리잖아요!”
두 손을 곱게 모아 간절히 비는 모습에 에블린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나는 있고 싶어도 못 있는 건 줄도 모르고.’
이유가 어찌 됐든 가르티아가 체이서의 필요로 이곳에 온 것은 변치 않았다.
“히잉, 이렇게 하면 분명 불쌍해서 들어주실 거라 했는데.”
“……누가?”
“당연히 체이서 오라버니지요. 언니는 귀여운 것에 약해 부탁을 잘 들어준다 했어요.”
솔직하게 내뱉은 말에 에블린은 뒤통수를 한 대 거세게 얻어맞은 듯,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말 못 할 고민이 있다면 가르티아에게 해 보는 건 어때?>
<같은 여자고, 앞으로 자매가 될 사이니 서로 고민 같은 걸 나누며 친해지면 얼마나 좋겠어?>
그날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니?’
에블린과 가르티아가 친해지도록 만들어 안심할 수 있도록? 두 사람이 상호 작용을 하며 루이사 저택에서 버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게 바로 체이서의 본래 모습인 건가.’
게임 속에서 보여 주던 모습과 같았다. 가족도 가리지 않고 맘껏 이용하는 그의 냉정한 면모를 처음으로 직면한 기분이었다.
부정하던 세계를 마주한 것을 느꼈을 때, 금방이라도 마음속 어딘가가 펑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에블린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검푸른 평지를 밟고 있음에도 얇은 밧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기분이었다.
“……무리네.”
“네?”
지금이야 모른다지만 어차피 쓸모가 다한다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체이서를 가족으로 생각한 건 나뿐이었나 봐. 블러드윈도 데몬스도 다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어린 시절 쌓아 놓은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었나 보다.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냥 모든 것이 현실감이 없었다.
“……더 이상 여기에 못 있겠어.”
한계였다. 나약한 자신은 이따위 정신으로 더 이상 여기서 버티지 못할 것이다.
누구를 믿을 수도, 믿고 싶지도 않았다.
저를 편애하고 아끼는 더스틴만 보아도 새로운 수단이 나오니 곧바로 가르티아에게 정성을 쏟기 시작하지 않았나.
자신은 어차피 대체될 수 있는 존재, 스스로 빛날 수 없는 사람,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내일.”
“……네?”
“내일 자정 여기서 빠져나갈 거야.”
“헉!”
에블린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무릎 꿇고 애원하던 가르티아가 벌떡 일어났다. 두 눈에 서린 희망은 자세히 보면 수상했으나 정신이 혼미한 에블린이 눈치채기에는 무리였다.
“아무도 모르게 필요한 것만 챙겨서 나와. 수도 밖으로는 나가게 해 줄 테니까.”
“저, 저야 너무 좋은데요. 갑자기 나가는 건 너무 빠르지 않을까요?”
“아니. 마침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내일 영지로 떠나니 지금이야말로 적기지.”
“하, 하지만……”
“힘들면 나오지 마. 나 혼자라도 도망갈 테니.”
당황이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물쭈물하는 태도를 부드럽게 응대할 정도로 에블린은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안 그러면 내가 정말 미쳐서 죽을지도 모르겠거든.”
***
“인사도 안 하고 떠나도 되는 거예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자정의 정원, 가르티아는 애처롭게 에블린을 불렀으나 그녀는 매정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리 잠재웠다지만 이래도 되나?’
당장 내일 떠나겠다고 말한 에블린의 실행력은 놀라웠다. 그녀는 모두의 눈을 피해 손쉽게 식사에 수면제를 탔고, 저택 일원 모두를 깊게 잠재웠다.
‘사실은 예전부터 탈출할 생각이 있던 것 아니야?’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가장 위험한 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워 걱정할 거리가 없다는 것 정도였다.
‘착하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네. 이 집안사람들은 다 무섭단 말이야. 귀족들은 원래 다 이러나?’
가르티아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처음 체이서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큰 관광도시에서 간간이 도둑질로 먹고살던 그녀는 운이 나쁘게 체이서의 주머니를 털었고, 곧바로 자리에서 잡혔다.
그는 곧바로 가르티아를 죽이려고 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자비심을 베풀어 주었고, 감사하지 않게도 단번에 그녀를 고용까지 해 버렸다.
비밀을 잘 지키고, 능력자인 척 연기만 수월히 해낸다면 먹고살 걱정은 없다는 협박에 강제로 고용 계약도 맺었다.
가르티아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기를 했다. 길거리 생활이 어디 가지는 않는지 뻔뻔함은 그녀의 무기였고, 곧바로 모두에게 사랑받을 만큼 활발한 아이의 연기를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평화로울 것이라 생각한 공작저는 살벌한 얼음판이 따로 없었다. 먹고살기 퍽퍽했던 거리로 돌아가고 싶어질 만큼.
친해져서 에블린을 제 편으로 만들어 내라는 미션, 사기꾼과 도둑으로 살아온 가르티아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명 착하니까 친해지기 쉽다더니.’
무뚝뚝하던 사내가 에블린을 입에 담을 때만 옅은 미소를 짓고는 하여 목석같은 사내가 웃게 할 수 있는 따사로운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냉정하다 못해 살얼음판을 걷게 하는 분위기는 다정, 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 친해져야 하나 걱정하는 찰나, 잘 먹고 잘 자느라 활짝 피어나는 자신과 달리 하루하루 말라 가는 에블린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특히 가르티아와 체이서가 가까이 있을 때마다 에블린의 표정은 점점 더 딱딱히 굳어 갔고, 분위기는 매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둘이 남매라더니. 분위기가 남사스럽단 말이야.’
단둘이 있는 공간에서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듯 가까이 있던 모습을 기억해 낸 가르티아는 다급히 기억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슨 일이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부산스러운 행동에 앞서 가던 에블린이 물었고, 가르티아는 눈치껏 웃으며 답했다.
자신의 등장으로 하루하루 말라 가는 모습을 보니 미안하였지만, 가르티아 또한 일단은 제 목숨이 소중하였기에 필사적으로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밤, 몰래 뒤를 밟는 것을 들켰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대충 분위기를 보고 홧김에 던진 말이 아니었더라면 제 목숨은 연약한 에블린에 의해 이승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가르티아는 묵묵히 앞서 가는 에블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체이서의 말 따라 은근히 약한 부분이 있었다. 착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미안해요, 언니. 그렇지만 나도 이제 여기는 그만 떠나고 싶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