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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외전 11화 (152/159)

IF 외전 11화

‘진짜 운 거야? 하, 기가 막힌다.’

하필이면 체이서의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였을 줄이야. 

‘보니까 쓰러지기 전에 잡아 준 게 체이서 같은데. 대충 방에만 데려다주고 가면 될 것이지. 왜 답지 않게 옆을 지켜서는.’

민망함에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쓰러지기 전에 보였던 모습들도 연달아 떠올라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꿈을 꾸든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있지.”

“왜?”

톡 쏘는 말에 체이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신경이 쓰이니까.”

“하하,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람.”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혔다.

에블린은 제 눈가를 마사지해 주는 체이서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고서는 똑바로 그를 마주했다. 

이 상황이 만족스러운지 그의 입가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내가 얌전히 있으니까 재미있었나 보지.’

비뚤어진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에블린은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에 가르티아나 신경 써 줘. 애가 여려 보이던데.”

말을 내뱉기 무섭게 곧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아, 싫다. 이래서야 꼭 가르티아를 질투하는 애 같잖아.’

다시 돌아온 싸늘한 분위기에 체이서가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다 혹시나 하는 어조로 물었다.

“……가르티아가 신경 쓰이나?”

“……!”

눈치 빠른 체이서가 겉으로 선명히 드러나는 감정을 못 읽었을 리 없다.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에블린이 휙 고개를 돌리자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웃고 있는 체이서가 보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에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던 자존감이 바닥으로 거침없이 떨어졌다.

“하하, 정말로?”

체이서의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들려오니 속이 울렁거렸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기분이 진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체이서는 너무도 멀쩡한데,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왜 자신만 이리 비참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걸까.

“……지금 우나?”

“아.”

체이서의 말에 그제야 에블린은 제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잔뜩 당황한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건을 찾더니 이내 혀를 차고는 제 손으로 조심스럽게 에블린의 눈가를 훔쳤다.

닿은 손길 따스했다. 너무도 따뜻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초에 내가 뭐라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 고작 게임의 내용을 조금 엿봤다고 이들을 구하겠다고 설쳤을까.

무력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 절망감이 동시에 밀려옴에 속이 다시금 울렁거렸다.

“왜 우는 거지?”

당황한 것은 찰나의 순간뿐 이었다. 곧이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의문이 들려왔다.

‘그래, 너는 모르겠지.’

이 비참함을,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는 외톨이의 기분을 체이서는 모를 것이다.

가르티아가 나타났으니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악녀의 역할 정도라면 모를까.

‘한심해. 가르티아가 나타나면 다 같이 행복하게 살 방법을 생각하자면서 저택에 남았던 거면서.’

결국은 가족들 틈에 어울리지 못해 쫓겨나는 신세나 다름없게 되어 버렸다.

‘어떻게든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내 인생은 침몰하는 배였던 걸 거야.’

애초에 이토록 나약한 정신으로 무언가 성공시킨다는 게 스스로에 대한 자만이었을 것이다.

에블린은 소매로 눈을 거칠게 닦았다. 체이서는 그러지 말라는 듯 그녀의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에블린은 오히려 그 손을 쳐 냈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해.”

얼마나 볼품없는 얼굴일까.

우느라 퉁퉁 부은 얼굴은 좋게 봐 주려고 해도 웃음이 나오는 얼굴일 것이다.

이런 볼품없고 나약한 모습을 더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지. 차라리 더스틴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초라하게 시드는 모습을 체이서에게만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에블린은 손을 들고는 문을 가리키며 단호히 말했다.

“나는 지금 네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만 나가.”

*** 

체이서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하면서도 에블린의 부탁대로 방을 나섰다.

그 후로는 똑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더스틴의 관심은 가르티아에게 향했고, 가족들도 모두 그녀를 싸고돌았다. 

그와 대비되게 에블린은 보란 듯이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아니, 겉으로 보기에는 즐기는 척해 보였으나 그녀는 하루하루 말라 갔다.

일부러 사용인들을 물리고서 산책하는 일이 잦아졌던 그녀는 제 정원의 또 다른 수상한 점을 찾아냈다.

“……밖과 연결되어 있었구나.”

체이서가 만들어 낸 정원 속 비밀의 공간이 바로 수도 성벽 밖의 숲과 연결되어 있던 것이다.

“이런 깜찍한 짓을 해 놨을지는 몰랐는데.”

어째서 체이서와 가르티아가 이곳에서 단둘이 만났는지 알 것 같았다.

‘데이트라도 하려고 했나 보지.’

남들의 시선을 피해 사이좋게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행복한 추억을 쌓아 갔을 것이다.

‘기분이 나쁘네.’

알콩달콩한 두 사람을 떠올리니 다시금 속이 울렁거렸다. 에블린은 제 건강을 생각하여 쓸데없는 생각을 지웠다. 

숲의 향긋한 냄새를 들이마시던 그녀는 그날 이후 오래간만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제 말을 듣지 않고 아직도 마도구를 남겨 둔 체이서 덕에 아주 좋은 계획이 떠오른 것이다.

“어머, 아가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응. 오래간만에 기분이 좋네.”

정원에서 나온 에블린이 흥얼거리며 웃는 모습에 뒤따르던 하녀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모습을 보여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모두 털어 낸 모양이라고 안심하면서.

*** 

모두의 걱정을 샀고, 쉽게 무너질 듯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에블린 또한 루이사였다.

“이왕 있으니 써 주면 좋잖아.”

더는 루이사 저택에 있지 못한다면 제 삶을 찾아 나가는 것이 맞았다. 

애초에 진작 이래야 했다며 에블린은 루이사 저택을 탈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차명으로 계약해 둔 숲속의 작은 별장을 첫 번째 은신처로 삼기로 하고, 은밀히 숨겨 둔 비상금을 운용하여 사람들을 고용해 별장에 식료품을 채웠다.

필요한 물품을 채우고, 더스틴이 영지로 출장을 떠나는 날 몰래 그녀를 옮길 마차도 구하고, 갈아탈 마차 또한 구매했다.

더스틴이 물 뿌리듯 제공해 준 용돈들 덕에 비상금도 충분히 만들어 놓았기에 굳이 장물로 의심받을 보석을 들고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가끔 따라야 할 명령을 안 듣는 이가 꼭 있었다.

바로 눈앞의 가르티아 같은 존재 말이다.

“……아,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죠, 언니?”

“…….”

“그때 이후로 처음 뵙는 것 같아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어, 언니? 몸은 괜찮으세요?”

에블린의 시선이 그대로 하늘 위로 향했다. 어둑한 밤하늘 위로 떠 오른 작은 초승달이 보였다.

“어두컴컴한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니?”

“하, 하하. 그, 그러니까요.”

어색하게 머리를 매만지며 시선을 피하는 행동이 꼭 무언가 숨기는 사람 같았다.

‘숨겨?’

떠오르는 작은 추측에 에블린의 안색이 싸늘히 굳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도망치려는 가르티아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딜 가니?”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붙들린 가르티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저, 저 사실은 언니랑 친해지고 싶어서 몰래 뒤를 밟았어요!”

“……블러드윈이나 데몬스가 나를 대할 때의 주의점 같은 건 알려 주지 않았니?”

“알려 주셨어요!”

“그래? 그럼 이런 짓을 할 생각 따위는 못 했을 텐데.”

그간 정신이 없어 뒤를 밟혔다는 것도 눈치 못 챘다니. 루이사로서 수치였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가르티아는 여전히 울음기 고인 얼굴로 빽 소리쳤다.

“언니, 요새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걸요! 걱정되어서 뒤를 좀 밟았어요! 그러면 안 되나요? 우리는 자매인데!”

“그 이유가 너 때문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니?”

에블린이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자 뾰로통한 얼굴로 가르티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저 때문이 아니라 루이사 때문이잖아요.”

“뭐?”

“언니, 루이사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

정곡을 찌르는 말을 부정할 틈도 없이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저 언니를 매일 관찰했어요. 제가 온 뒤로 언니는 웃는 일이 없었죠. 하지만 제게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매번 무표정이었는걸요.”

“……무슨 소리야?”

눈을 마주치고 싶었지만, 가르티아의 시선을 회피하는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체이서 오라버니께서 언니를 잘 보살피라 해서 지켜본 것뿐이고! 이, 이상은 말해드릴 수 없어요!”

“나와 자매로 지내고 싶다며? 그렇다면 모든 걸 숨김없이 이야기해야 내가 마음을 열지 않겠니?”

은근한 압박에 가르티아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묵비권 행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저 사실 루이사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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