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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외전 10화 (151/159)

 IF 외전 10화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생각보다 기분이 더 더러웠다. 순간이지만 체이서가 그날 얼마나 기분이 나빴을지 공감할 수 있었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뒤이어 비참한 생각이 함께 밀려왔다.

‘어차피 가르티아가 있으니 나는 필요 없으면서…….’

적임에도 능력을 버리기는 아까우니 곁에 두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에게 제 목줄을 쥐여 준다고 해도 온전히 그의 곁에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나는 두 번째밖에 안 될 테니까.’

그의 곁에는 가르티아가 있을 테고, 자신은 그녀의 대용품이 될 것이다. 혹은 그조차도 되지 못하고 저물지도 모른다.

체이서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기에 더욱 우울해졌다.

온전히 제 것이어야 할 자리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가르티아에게 뺏겨야 한다는 사실에 속이 상했다.

아니, 속이 쓰리다 못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꿋꿋이 연기를 하는 자신이 못나 보였다.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이렇게 되돌려주네?”

피식 흘러나온 웃음에도 체이서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도움이 되는 여동생 덕에 유머 감각이라도 생긴 건가? 고마워, 덕분에 기분 참 잡쳤어.”

“내 말이 농담 같나?”

“농담이어야 할걸?”

안 그러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듯 협박이 어린 어조에도 체이서는 에블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 말해도 내 말이 진심인 건 변하지 않아.”

담담히 꺼낸 말에 이상하게도 심장이 쥐어짜이는 기분이었다.

‘이상하지. 예전에는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 해도 가슴이 아프고, 자꾸만 울컥하는 감정이 뒤따랐다.

양산을 쥔 두 손이 움찔거렸다. 당장이라도 저 차분한 얼굴을 밀쳐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어서 머리를 울릴 만큼 거대한 고통이 찾아왔다.

자꾸만 짜증과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이 아무리 봐도 제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래, 그냥 모든 걸 밝혀 버리고 싶은 걸 보니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야.’

네가 가주가 되면 좋겠다고, 나는 온전히 너의 편이라고, 네가 가주가 되는 걸 보고서 있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헛소리하지 말고 비켜.”

그럼에도 에블린은 끝내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리는데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 위에 덮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이마 위로.

“……열이 나는군.”

‘열? 어쩐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더라니.’

에블린은 건드리지 말라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신경 쓰지 마. 내가 열이 나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던 에블린은 제 시야에 들어온 체이서를 보고 멍한 표정을 짓다가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차라리 기뻐해. 그런 걱정 가득한 오라비 행세하려고 들지 말고!”

무표정이었던 얼굴에 서린 선명한 감정은 오히려 그녀에게 치욕만을 안겨 줄 뿐이었다. 

“……나는 너를 걱정하면 안 되나?”

그의 말대로 걱정이 아닌 동정임을 알기에 더더욱.

“당연한 소리 하지 마.”

“너는 나를 걱정하면서?”

낮아진 목소리에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다시금 마주한 체이서의 눈은 화를 참는 듯 강렬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도 싫다 이거야?’

생각이 자꾸만 비뚠 쪽으로 향한다.

‘억울해. 나는 그저……, 정말 그저…….’

모두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나 자신만 조금 고생만 하면 된다 생각했을 뿐인데.

걷잡을 수 없는 오해는 커지고 결국 둘 사이는 어떻게 노력해도 가까워질 수 없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공작이 되더라도, 그 자리를 넘겨주어도 절대 받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해 온 일이 모두 헛수고라는 생각에까지 다다르니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냥 모두 포기할까.’

“다시 말하지만, 에블린, 나는…….”

조용히 에블린을 관찰하던 체이서는 차분해진 그녀의 모습에 진정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입을 뗐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으려던 때에 갑자기 뒤에서 바스락하고 풀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에블린이 뒤를 돌아보자 가르티아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어, 어……. 체이서 오라버니께서 보자고 하셔서 왔는데요…….”

자신감 없이 떨리는 눈빛을 하던 가르티아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제가 지금 두 분 사이를 방해한 건지…….”

“……하.”

에블린은 기가 막혔다.

‘그래, 애초에 체이서가 만든 공간이지 둘만의 공간이 아니었는데.’

어째서 자신은 이곳에 아무도 오지 않으리라 생각을 한 것일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에블린이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알고 보니 이곳은 두 사람의 약속 장소였던 모양이다. 깨달음과 동시에 비참함이 밀려들었다. 두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는 악당이 된 것 같았다.

“…….”

더 이상 무어라 말할 기운도 없었다. 에블린은 누가 뭐라고 하든 그만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몸을 틀려고 하자 체이서가 다시금 그녀를 붙들었다.

“잠시만, 에블린.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어.”

“나는 할 이야기 다 했어.”

“나는 진심으로…….”

체이서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지 자리를 떠나려는 에블린의 손을 꽉 붙들었다.

하지만 뒤이어 찾아온 이명에 그가 무어라 하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표정이 심각해지는 것에 좋지 않은 이야기라는 확신만 들 뿐 이렇게 있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제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에블린은 그대로 체이서의 가슴팍을 밀쳤다.

“그만, 이제 그냥 그만하자.”

“뭘? 도대체 뭘 그만하자는…….”

체이서는 다시금 에블린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그녀의 모습에 쉽사리 뒷말을 잇지 못했다.

에블린은 자신이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씨익 웃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에 체이서가 다시 손을 뻗자 그녀는 그대로 거칠게 그의 손을 쳐 냈다.

“건드리지 마.”

냉정한 목소리에 체이서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제 너 방해 안 할 거야. 그러니까…….”

다시는 아는 척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에블린……?”

다시금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아니, 가까이서?

“꺄악!”

귀를 찢을 것 같은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눈앞에 일렁이는 녹색 풀들이 물이 뿌려진 듯 흐려지더니 이내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 이런.’

아니, 떨어지는 것은 본인이었다. 에블린은 몸에 힘을 줄 틈도 없이 시야가 빠르게 하강하는 것을 느꼈다. 

풀썩, 하고 땅에 부딪쳤는데 의외로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흐릿한 녹색 풀들 사이로 검은 무언가가 빠르게 움직이는 게 보였지만 더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에블린은 그대로 멀어지는 의식을 잡지 못한 채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내 방이네.’

가물거리는 시야의 초점을 잡기 위해 열심히 눈을 깜빡거리니 따스한 물수건이 그녀의 눈가에 덮였다.

부드럽게 닦아 주는 손길에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부드러운 손길이지만 조금 거친 느낌, 이건 분명 교육받은 하녀의 손놀림이 아니었다.

황급히 수건을 쳐 내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환해진 시야 너머로 체이서가 놀란 듯 크게 뜬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 뜨기 힘든 것 같길래.”

소심하게 덧붙인 말에 에블린은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하아…….”

길게 내려 쉰 한숨에 고개를 푹 숙이는데 그의 손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다시 닦아 줘도 되나? 아직 눈가가 붉은데.”

“……붉다고?”

되물음에 돌아온 건 작은 손거울이었다. 에블린이 거울을 받아 들여다보자 펑펑 울기라도 한 듯 눈이 퉁퉁 불어 있었다.

“붉네.”

‘자면서 울기라도 했나?’

에블린이 민망해하며 눈가를 매만지는데 다시금 큰 손이 그녀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뭐 하는 거야?”

“마저 닦아도 되는 것 아니었나?”

“이걸 왜 오라버니가 해?”

냉큼 수건을 뺏으려는데 그가 뺏기지 않겠다는 듯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어이없는 행동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내뱉으니 포기했다 생각했는지 따스한 수건이 눈가에 닿았다.

또다시 내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기운이 나지 않았다. 포기 상태로 가만히 있으니 조심스러웠던 손길에 자신감이 들어섰다.

“무슨 꿈이라도 꿨나?”

“아무런 꿈도 안 꿨어.”

오히려 오래간만에 푹 잤다. 하지만 체이서는 단호히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자는 내내 울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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