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 8화
“……뭐?”
밀려오던 잠이 단번에 달아나 버렸다.
에블린이 당장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갈 기세를 보이자 하녀가 다급히 그녀를 막았다.
“아가씨, 잠시만요! 밖에 사람이 많아서 이런 차림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지금 옷차림이 중요해?”
“주인님뿐만 아니라 도련님들 모두 모이셨단 말이에요! 절대 이대로는 안 되셔요!”
에블린이 버럭 소리를 질러도 필사적으로 그녀를 붙잡는 하녀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다급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설명해 봐.”
평소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달리 싸늘한 다그침에도 하녀는 놀랐다가도 상황이 이해가 갔기에 빠르게 설명을 이어 갔다.
“자신이 루이사의 핏줄이라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고, 그 여자에 대하여 주인님께서 직접 조사를 하셨답니다.”
“……딸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확실한가 보지?”
“예, 주인님께서 예전에 그분이 오신 영지에 가셨을 때 하룻밤 즐긴 여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에블린은 입술을 거세게 물었다.
‘언제 등장하나 싶더라니. 이렇게 갑자기 등장한다고?’
사실 에블린은 여자 주인공이 언제 등장할지 고민하면서도 내심 그녀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긴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녀가 존재하는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라 실존하는 현실이라 믿었고, 그렇다면 여자 주인공을 움직일 플레이어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여겼으니까.
그래서 더스틴의 눈을 피해 몰래 그녀를 찾아볼 수 있음에도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외면한다고 현실이 변하지 않지.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루이사 공작가를 휘어잡을 이가 등장했다면 자신 또한 그녀의 적이 되는 것일까?
‘악녀, 뭐 그런 게 되는 건가?’
안 그래도 재수 없는 척 연기하는 게 힘든데 이제는 악녀 짓까지 해야 한다니 정말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에블린이 흘러나오는 한숨을 막지 않고 내쉬니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며 눈치를 보던 하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그리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뒤이어진 말에 에블린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을 마주한 듯,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한참이고 멈춰 선 채 움직이지 못하였다.
* * *
“이쪽은 가르티아 루이사. 나이는 열일곱으로 데몬스와 동갑이란다.”
드물게 모두가 모인 정찬 시간, 더스틴은 긴장한 얼굴로 제 옆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모인 이들에게 소개했다.
“가문 밖에서 살다 온 아이다 보니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 게다. 형제인 너희가 이 아이를 잘 챙겨 줄 수 있도록 하거라.”
밝은 분홍빛 머리칼에 진한 루비 빛 눈동자. 동글동글하지만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해지니 꽤나 사랑스러운 외모였다.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의 더스틴과 달리 가르티아는 긴장 반 설렘 반이 서린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가르티아라고 해요. 비, 비록 부족함이 많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허리를 반으로 접는 과하게 예의 바른 인사에도 모인 이들에게서 돌아오는 인사가 없었다.
싸늘한 분위기에 가르티아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는 것에 챙겨 줄까 싶어 에블린이 입을 열려던 순간.
“그래, 반가워. 다음부터는 그리 격식을 갖춰 인사할 필요 없다는 것 알아두고 그만 앉으렴.”
체이서가 입을 열어 직접 가르티아를 챙겨 주었다. 그녀의 볼에 옅은 홍조와 함께 미소가 지어지는 것에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식기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임무를 나가셨던 두 도련님께서 직접 모셔 온 걸 마부들이 보았다고 해요. 그 후에 가신들에게 서신이 속속히 도착했고, 그분이 새로운 아가씨가 되었다는 것 같아요.’★
침착하고 싶었지만, 자꾸만 속이 들끓었다.
원래 게임의 스토리대로라면 갑자기 등장한 여자 주인공을 경계하고, 없애려는 것이 체이서지 않았던가.
‘그래야 할 네가 저 아이를 직접 데려왔다고?’
분명 저 아이는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아주 훌륭할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더스틴이 저 아이를 받아들였을 리 없으니까.’
“나는 바빠서 이만 일어나마. 가르티아, 가문에 누가 될 행동하지 않도록 잘 배우거라.”
아니나 다를까.
더스틴은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분명 불쾌감이 어려 있었다.
이미 에블린을 차기 가주로 내정해 놓고서 가문을 쥐락펴락하려던 계획에 방해꾼 하나가 들어왔으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를 발견한 이상, 대대로 내려오던 법칙대로 어떻게든 루이사로 끌어들여야겠지.’
심지어 자신이 루이사의 핏줄이라고 주장까지 하였으니 굳이 귀찮은 과정 거치지 않고, 가문에 입적시키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가르티아는 밝은 성격 덕에 어느새 블러드윈과 데몬스와도 인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때 봤을 때는 숲을 구른 것 같았는데 이리 깨끗이 씻고 차려입으니 몰라보겠다.”
블러드윈의 장난 섞인 놀림에 가르티아가 얼굴을 붉혔다.
“저 진짜 산에서 굴러 떨어졌다가 오라버니들 만난 거 모르시는 거 아니죠?”
“기가 막힌 첫 만남을 어떻게 있겠어. 루이사를 만나야 한다며 무작정 쳐들어온 사람인데.”
“으으, 제발 잊어 주세요.”
순수하고 밝은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에블린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식당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벌써 일어나게?”
가르티아와 함께 즐겁게 떠들던 블러드윈은 어느새 표정을 굳히고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님, 너무 적게 드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입맛이 없어서. 먼저 갈 테니 좋은 시간들 보내.”
예의상 붙잡는 두 사람들과 달리 체이서는 에블린을 쳐다도 보지 않고는 제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 설마 지금 안 잡아 준다고 서운한 거야?’
스스로 이해가 안 가는 감정에 에블린은 기가 차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내가 왜 이딴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거지?’
가르티아의 등장은 뜻밖이었지만 체이서가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온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더스틴이 그러는 것처럼 자신 또한 가르티아를 이용해 자신과 대척할 이를 앞에 세우려는 것임을 어찌 모를까.
‘치유 능력이 있으니 저주나 능력 과부하에 의해 고통스러워도 치료도 해 줄 수 있을 테고.’
정녕 자신과 척질 것을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걱정돼서 도와줬다고까지 말했는데.’
자신만 이들에게 진심이었던 것 같아 퍽 서글퍼졌다.
눈가가 시큰거리는 게 이대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아 그대로 나가려는 순간,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가르티아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저, 언니. 조금 더 드시는 게 어떠세요? 거의 손도 안 대셨잖아요.”
“…….”
답하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는 에블린의 모습에 가르티아는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며 눈치를 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마, 맛있는데.”
포크를 물고서 웅얼거리는 모습이 참 기가 막히게 깜찍했다.
머리끝까지 짜증이 솟은 와중에도 긴 시간 동안 몸에 체화시킨 연기는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밖에서 자라 왔다더니 아직 예절이 부족한 것 같구나.”
에블린은 가르티아가 잡은 소매를 내치고서는 더러운 것이 닿았다는 듯 툭툭 털어 냈다.
“더럽게 포크를 물고 말하지 말렴. 허락 없이 타인에게 손을 올리지 말고…….”
무언가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는지 가르티아의 눈이 반짝였다.
혼나는 와중에도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 심기가 거슬렸다.
‘여기서 가장 화목해질 방법은 잘 지내자고 하는 거지만…….’
그건 에블린이 만들어 낸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사생아인 주제에 내게 함부로 말을 걸지 마.”
곧 이어진 에블린의 싸늘한 경고에 가르티아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단번에 지워졌다.
금방이라도 울 듯 울먹이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에블린은 그대로 데몬스에게도 경고를 남겼다.
“조금의 부족함도 없이, 네가 책임지고 가족들 얼굴 먹칠하는 일 없게 해. 같은 처지이니 뭘 조심해야 할지 정도는 잘 알려 줄 수 있겠지.”
더스틴이 떠나고 평화로웠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오갔다.
“……예, 알겠습니다.”
“아…….”
가르티아가 낮은 탄식을 내뱉다가 에블린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또다시 질책을 들을까 겁이 나는지 황급히 눈을 내리까는 것이 분명해 안 그래도 진창인 기분이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연기할 생각을 하다니. 대단하다, 에블린. 정말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게 없네.’
에블린은 스스로의 만들어낸 처지를 비웃으며 그대로 식당을 나섰다.
등 뒤로 닿은 뜨거운 시선들을 무시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