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 6화
에블린은 들으라는 듯 크게 혀를 찼다.
평소 하지 않는 짓을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더스틴이 던진 재떨이에 머리를 잘못 맞아 어딘가 이상해졌나 보다.
“아까 아버지께 잘못 맞기라도 했어?”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물었으나 체이서는 가볍게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는 제 말을 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더스틴에게 이용밖에 더 당하는 것뿐이 더 되겠어?”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아무리 주위에 아무도 없다지만 자꾸만 뜬금없는 소리를 하니 이건 이거대로 수상했다.
‘혹시 나를 시험이라도 하는 건가?’
에블린의 눈가에 의심이 서리자 체이서는 진정하라는 말 뒤로 이미 그녀가 아는 사실을 읊기 시작했다.
“더스틴이 네게 잘해 주는 이유는 우리 중 네가 가장 이용하기 쉬워서야.”
‘역시 체이서도 내게 향한 게 단순한 편애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구나.’
하긴, 더스틴은 워낙 욕심이 많은 녀석이고 마찬가지로 체이서 또한 눈치가 빠르니 그의 속내를 진작 눈치채는 게 당연했다.
에블린은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살짝 틀어 시선을 피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퉁명한 에블린의 목소리에 돌아온 대답은 퍽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네 가족으로서 더는 그가 너를 이용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그러니 내가 도와줄게.”
“그래? 뭘 도와줄 건데?”
“안 그런 척하지만 너는 루이사를 싫어하잖아.”
순간 에블린은 숨을 크게 들이 삼켰다. 언제나 겉으로 가문을 자랑스러워하고, 더스틴의 신임을 받는 사람의 모습을 훌륭히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들킨 것인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체이서에게 들켰다면 더스틴도 눈치챘을 텐데. 설마 지금껏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나?’
그런 것치고 더스틴이 에블린에게 보이는 것은 꽤나 선명한 신뢰였다.
‘하지만 그 또한 연기일지도 모르지. 평생을 루이사에서 자랐으니.’
에블린은 깊은 생각에 빠지는 대신 차분히 표정을 관리하며 체이서의 뒷말을 기다렸다.
단둘만인 장소에서 그가 무슨 목적으로 에블린을 이리 설득하려고 하는지 궁금해졌다.
“네가 루이사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게.”
하지만 궁금한 것은 찰나였다. 이내 이어진 속이 뻔히 보이는 다정한 말에 에블린은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기사단에 도움을 줄 사람들이 많아. 더스틴의 눈을 피해 널 무사히 수도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수 있지. 머물 곳이나 재산 등은 얼마든지 내가 준비해 줄 수 있고.”
작정하고 계획을 세워 본 듯 줄줄 이어지는 설명에 에블린은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나를 죽이게?”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을 하지 그래?”
순간이지만 그가 꺼낼 계책을 궁금해했던 제가 바보였다.
“두 눈에 서린 그 살벌한 적대감부터 치우고 말하면 믿는 척이라도 했을 텐데. 아쉽게도 연기하는 실력은 별로네, 우리 오라버니.”
에블린은 한껏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이번에야말로 힘껏 그를 밀었다.
당황했는지 그녀를 껴안은 팔의 힘이 스르륵 풀렸고, 때를 놓치지 않고 에블린은 온전히 체이서의 품에서 벗어났다.
크게 들이치는 분노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자신은 형제들을 위해서 원치 않는 연기를 하며 더스틴을 속이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데 정작 구해 주고 싶은 이들은 에블린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서 가증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었다.
‘잘한다면 몰라. 저렇게 티 날 거면 차라리 말이라도 하지 말든가.’
강한 열망이 서린 눈동자는 분명히 그녀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에블린은 체이서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리고는 조금 전까지 지었던 미소를 지웠다.
안 그래도 체력적으로 피곤한데 조금 전의 대화가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가 되었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더는 연기를 이어 갈 수도, 이어 가고 싶지도 않았다.
“나라고 아버지의 뜻을 모르겠어?”
에블린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자 나타난 무표정은 상대를 향한 적개심, 원망 그리고 분노를 품고 있었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언제나 서글서글 웃고 있는 에블린의 싸늘한 낯을 맞이하는 것은 처음인지 체이서의 얼굴에 얼핏 놀라움이 스쳤다.
“나를 가주로 만들고, 너희를 루이사의 기사로 만들어 그대로 손에 쥐어 흔들 생각이었겠지. 아, 좋게 말해야 기사겠구나. 현실적으로 보면 개겠다. 루이사의 개이자 가주의 명령을 따르는 충견, 감히 하극상을 일으킬 수 없도록 혹독한 훈련을 받은 그런 존재.”
굳어 버린 체이서의 얼굴은 꽤나 살벌했지만, 에블린은 빈정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 이상, 너는 절대로 네가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걸 왜 모르지?”
차라리 아무도 없는 이 순간을 이용해 제 계획을 이야기하고 체이서의 협조를 얻어 내는 방법을 이끌어 가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짜증이 나잖아.’
아무것도 모르니 이러는 것 이해가 간다. 적대감 정도라면 어느 정도 감수하려고 했을 것이다.
제가 해 왔던 것들이 있으니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며 결국 그와 같은 편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생각으로 더스틴의 옆에서 입가에 경련이 나도록 웃고 다니는지도 모르면서 제 자리를 탐낸다는 이유로 죽이려고 하다니!
에블린이 얄밉게 군 적은 많아도 맹세컨대 그가 잘못되기를 바라며 행동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체이서는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적이라 여긴 에블린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다정함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에 포장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배신감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왜 그런 표정일까. 내가 설마 아버지의 의도 하나 몰랐겠어? 오라버니도 아는 걸 내가 몰랐을 리가 없잖아.”
차갑게 굳어 버린 체이서를 보며 에블린은 지독한 불쾌감이 계속 제 몸을 휩싸는 것을 느꼈다.
“내가 루이사에서 도망치게 해 주려고 한다는 말에 기뻐하며 고맙다고 인사라도 할 줄 알았어?”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정말로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낼 것 같았다.
“내가 루이사를 싫어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이곳에서 버티고 있는 이유가 뭐인지 궁금했던 적은 있어?”
돌아오는 답이 없다.
체이서는 입을 달싹였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쓸데없는 말을 얹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판단하에 입을 다물었다.
돌아오는 답이 없음에 에블린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자리를 박차고 벗어났다.
다급히 체이서가 손을 내밀어 에블린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에게는 소용없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손끝이 스친 순간 에블린은 참지 못하고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 것이다.
“……너.”
처음 보는 에블린의 모습에 체이서의 눈에 당혹함이 서렸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만 껌뻑이는 모습에 더욱더 열불이 치솟았다.
“나도 가주가 될 생각은 없었어! 그날 말했듯 나는 여전히 조용히 살고 싶다고!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털어놓는다고 달라질까?’
에블린이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은 오롯이 그녀의 선택이지 체이서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도움도 아니고, 제 욕심에 의해 결정한 일이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살았던 것이었다며 생색을 낸다면 뭐가 달라질까.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건가?”
체이서의 서늘한 목소리에 멀리 나갔던 이성이 돌아왔다.
‘달라지는 건 없지.’
그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체이서는 자신의 도움 따위 원치 않았고, 그딴 것 없이도 충분히 가주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저 그의 말처럼 오지랖을 부렸다가 혼자 상처받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진심으로 너희와 형제가 되고 싶었어…….’
비참함에 금방이라도 울고 싶어졌다.
지금껏 표정 관리를 잘 연습해 온 덕에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눈가와 코끝이 시큰거렸다.
어느새 붉어진 에블린의 눈가에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던 체이서가 성큼성큼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우나?”
다시금 당황이 어린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체이서는 조금 전과 달리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눈가를 쓸어내렸다.
“왜 울지?”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에 이제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믿기지는 않겠지만. 에블린, 나는 맹세코 너를 죽일 생각이 없어.”
눈가를 매만지던 손이 서서히 아래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차가워진 뺨 위를 스쳐 지나 얇은 목과 어깨에 멈췄다.
커다란 손이 그대로 에블린의 목 위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섬뜩한 느낌에 그녀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긴장이 가득 어린 에블린을 보며 체이서는 처음으로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애초에 죽이고자 했으면 이곳에서 단번에 네 목을 비틀었을 테니까.”